[영화읽기]
[영화읽기] 애타게 천재를 찾아서
2010-03-18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일견 범작으로 보이는 구스 반 산트의 <밀크>, 음미할 만한 문제작이네

여럿으로부터 재능에 걸맞은 작품을 만난 숀 펜이 영화 <밀크>의 모든 것이라는 평판을 들었으되, 그 실체를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구스 반 산트의 확고부동한 개성이 이 영화의 진면목이라고 믿게 되었다. <밀크>는 구스 반 산트의 위업을 말할 때 첫 번째로 거론되어야 할 영화는 아니다. 현대영화에서 반 산트의 작품이 가한 획기적인 충격을 논하자면 여전히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가 가장 앞자리에 놓일 것이기 때문이다. 외견상 <밀크>는 스테레오 타입화된 전기영화이며, 심지어 <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와 함께 반 산트의 가장 주류 지향적인 영화로 평가될 만하기까지 하다.

잘 알려진 대로 <밀크>는 미국 내 성정치학뿐 아니라 진보정치운동의 시금석이 됐던 게이 액티비스트이자 최초의 게이 정치가였던 하비 밀크의 인생유전을 묘사한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액면 그대로의 사실은 반 산트의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치 않다. 컬럼바인 총기 난사사건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했던 <엘리펀트>는 느슨하게만 그 사건을 참조하고 있으며, 커트 코베인의 권총 자살에 바탕하고 있는 <라스트 데이즈> 역시 설핏 코베인의 비극을 상기시킬 뿐이다.

본색을 감춘 영웅의 변신기

구스 반 산트는 종종 종잡을 수 없는 행보로 화제에 오르곤 한다.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을 한 감독이 아닌가? 좀체 한 작가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 상이한 경향의 영화들로 채워진 반 산트의 필모그래피는 크게 두 갈래로 요약된다. 먼저는 그에게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라는 확고한 명성과 위엄을 가져다준 새로운 어법의 급진적인 아방가드르 영화들이다. <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파라노이드 파크>에 그 원류가 있다. 이들의 맞은편에 <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기를 따르는 영화들이 놓인다.

계통을 따지자면, <밀크>는 <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와 한 묶음이 될 만하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에서인지 이들 영화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덜 이야기되었다. 저들이 너무 관습적이라서? 과연 그런가. 나는 반 산트의 가장 혁신적인 영화들만큼이나 <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 <밀크>가 음미할 만한 문제작이라고 생각한다. 반 산트의 이력 가운데 덜 논의되었고, 그럼에도 긴요한 또 하나의 테마에 대해 이들 영화가 말문트기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영화가 독립된 작품으로서 지니고 있는 의미와 성격에도 불구하고 비상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정서적 충동과 지적 모험을 겪으며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저들을 관류하는 줄기는 하나이다.

여기서 구스 반 산트는 감춰진 천재 혹은 초인의 삶을 들춘다. 그 자신조차 가늠하기 힘든 ‘천재적 인간의 가공스러운 잠재력의 현실화’가 이들 영화의 주제이다. 반 산트의 인물들에게 ‘은폐’는 차라리 하나의 습벽이라고 칭할 만하다. 자신의 진상이 누출된다면 필경 일을 그르치게 되리라고 그들은 정체를 숨긴다. <굿 윌 헌팅>의 윌 헌팅은 보스턴 빈민가 출신으로 MIT 공대생들을 능가할 대단한 수학 천재지만, 대학 청소부로 살며 본색을 감춘다. 종종 통제할 수 없는 분노로 쩔쩔매지만 수학에 대한 윌 헌팅의 열망은 텅 빈 강의실에서 교수가 낸 난해한 수학문제의 해법을 몰래 써넣는 은밀한 의식으로 표현된다. <파인딩 포레스터>의 흑인 문학 소년 자말은 그의 사회적 위치가 명령하는 농구선수(미국사회에서 흑인들에게 허락된 성공은 농구를 하거나 힙합 가수가 되는 것이다)의 길에 순응하려 하지만 글쓰기를 향한 욕구는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다.

회상을 통한 역행적 시간 구성을 취한 <밀크>는 40년간 정체성을 숨기고 산 하비 밀크가 정치에 입문한 뒤 게이 정치인으로서 커리어가 만개하려는 1977년 시점에서 암살당하기까지의 시간을 다룬다. <굿 윌 헌팅>과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감춰진 재능을 실현하는 소년들처럼 하비 밀크는 평범한 보험 설계사로 40년을 살다 불현듯 자신의 능력을 각성한다. 우승열패의 법칙이 엄존하는 현실로부터 유폐된 채 숨어 살았던 하비는 게이이며 무엇보다 천부적인 정치인이다. 갈피를 잡지 못했던 40년 동안의 삶에서 벗어나기로 했을 때 분출하는 하비의 능력은 ‘타고난 것’(natural born)이 분명하다. 정말이지 무지렁이 보험 아저씨에게 청중을 휘어잡는 선동적인 정치꾼의 자질이 있으리라고 누군들 알았으랴!

집단적인, 거국적인 커밍아웃을 향하여

<밀크>는 ‘커밍아웃’에 대한 영화이다. <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 역시 커밍아웃에 대한 영화였다. <굿 윌 헌팅>과 <파인딩 포레스터>가 ‘개인’의 커밍아웃을 다룬다면, <밀크>는 하비 밀크라는 천재적인 정치인에 의해 집단적인 커밍아웃이 단행되었던 시대를 회고하는 것이다. 요컨대 ‘커밍아웃’은 구스 반 산트식 서사의 핵심 모티브라고 해도 그닥 틀리지 않다.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의 드러나지 않은 내면은 서서히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은폐된 존재에 대한 비밀스러운 탐사’를 보여주는 이 영화들을 통해 반 산트는 일관되게 한 지점을 가리켜 보인다. 손상된 과거를 청산하고 자신의 진면목을 선언하는 사람들의 존재론적 투쟁 묘사하기.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는 만남이라는 주제는 <밀크>에서 좀더 확장된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후일 명소가 되는 사진 가게 ‘카스트로’를 열면서 하비의 삶은 달라진다. 숨죽여 살던 게이들이 카스트로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커밍아웃은 하비 일당의 네트워킹을 타고 집단화된다. 수면 아래 숨죽여 살던 저들을 충동하는 것은 타자성의 공포를 뛰어넘은 농밀한 자존감이다. 실존의 무게를 끝내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진정한 생의 의미와 참모습을 찾기 위해 거국적인 커밍아웃에 나서는 것이다.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는 투쟁은 완악한 세상에 맞서는 무기가 될 것인가? 구스 반 산트가 질기게 탐색해온 이 질문에 그가 내놓은 영화적 응답은 주목할 만하다. 반 산트의 주인공들은 현실에 대한 냉소와 그들 내면의 진실이 수용되기를 바라는 열망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커밍아웃은 정치적인 행위이기에 앞서 존재의 진실을 향한 부단한 추구의 결과로 간주되어야 한다. 게이뿐 아니라 누구나 그런 투쟁을 한다. 흡사 그것은 완전무결한 인간으로 입문하기 위한 엄숙한 제의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의 천재들은 야수의 논리가 횡행하는 바깥세상에서 감당해야 하는 쓰라림과 서글픔에도 불구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스스로에 의해 승인되고 충일되어야 하리라는 걸 끝내 깨닫게 된다.

현존은 실존으로 이어져야 한다

주섬주섬 기워진 프랑켄슈타인의 두 얼굴은 마침내 세상 밖으로 공표된다. 무감각한 근시안과 피상성을 뚫고 이들의 진면목을 끌어내는 것은 우연한 계기로 천재들의 삶에 끼어든 정신적 멘토들이다. <굿 윌 헌팅>의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 <파인딩 포레스터>의 윌리엄 포레스터(숀 코너리), “새로운 삶을 살아보라”고 충동하는 불혹의 하비 밀크를 충동하는 스콧(제임스 프랭코)이 방향감각을 상실한 천재들을 인도하는 멘토들이다. 게이 커뮤니티의 지도자가 된 뒤 밀크는 이 현자의 미션을 계승하게 된다. <밀크>의 후반부에서 하비는 선거캠프 사람들에게 집단적인 커밍아웃을 권유한다. “숨어 지내는 생활은 그만하고 벽장 속을 박차고 나오라”는 것이다. 거짓된 존재를 버리고 진짜 이름을 찾으라는 밀크의 호명은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드러내는 방식으로 세상과 맞서라는 우주적 선동이다. 하비 밀크는 게이들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아니타의 폭압에 자신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대적한다.

밀크의 응전은 수많은 이름 없는 게이들을 커밍아웃시키고 결국 세상을 바꾸어놓는다. 그러므로 커밍아웃이 주는 교훈, 현존은 실존으로 이어질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비범한 재능의 천재가 세상과 불화하는 것은 비극이다. 바꿔 말해 발현되지 않은 본성을 그 안에 숨기고 사는 사람들 누구라도 천재일 수 있다. 고로 세상에는 아직 발견되어야 할 천재들이 너무 많다. 전설로 남은 70년대 퀴어 아이콘을 다룬,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균형이라는 테마 위에 살포시 겹치는 <밀크>의 또 다른 테마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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