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인 영화감독 P는 공포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투자상담 회의에서 P가 장광설을 늘어놓자, 투자 실무자인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말을 끊고 어떤 영화인지 알기 쉽게 설명하라고 짜증 섞인 말투로 다그친다. P는 갑자기 테이블 위를 기어가더니 만년필로 그녀의 눈을 찌르려 한다. 놀란 주변 사람들이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팔을 잡고 있고 만년필 촉은 그녀의 눈에 거의 닿아 있다. 하얗게 질린 여인에게 P는 태연하게 말한다. “뭐, 이런 거라고나 할까요.”
<마녀의 관>의 첫 에피소드의 한 장면이다. P는 지금 알기 쉽게 설명하라는 요청에 답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 설명은 여전히 애매한 것이다. 이 여직원은 이 순간의 공포감을 오히려 전통적인 호러의 방식에 가깝게 느낄 것이다. P는 제대로 설명한 것일까. 내 생각에 P는 지금 관객에게 설명하는 중이다. 이렇게 물어보자. P가 만일 그녀의 눈을 찔렀다면? <마녀의 관>은 아마도 전통적인 공포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찌르는 시늉만 하고 찌르지 않는다. 영화적 공간 안에서 만년필 촉과 여직원의 눈 사이의 거리는 거의 없지만, P는 그 거리를 넘지 않는다. 그 거리는 영화적 속임수가 아니면 사라질 수 없는 거리이며, 관객과 영화 속 존재 사이의 물리적 불연속의 막 즉 스크린의 느슨한 은유이다. 그가 말한 ‘뭐, 이런 거’는 만년필 촉이 당신을 찌를 수 있다가 아니라, 결코 찌를 수 없다는 것, 스크린은 결코 구멍나지 않으며 스크린 속 존재는 결코 당신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자의식의 다른 표현이다.
제각각의 세 이야기, 하나의 서사로 엮인
<마녀의 관>은 당신을 무섭게 하려는 공포영화가 아니다. 차라리 스스로 무서워하는 공포영화다. 물론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기담>의 각본을 쓴 박진성 감독은 자신을 끝내 죽일지도 모른다는 사적인 두려움을 자신의 첫 연출작의 소재로 택했다. 창작자로서의 자신이 집착하는 것들이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라는 아이러니에 연관된 그 두려움은 의미있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에 대한 언급을 대신할 수는 없다. 여기엔 최근의 몇몇 젊은 한국 감독들이 간헐적으로 시도해온 서사와 표현양식에 관련된 대담한 영화적 실험이 감행되고 있다.
P가 만들려고 하는 영화의 원작이면서 이 영화 전체의 원작은 러시아의 문호 니콜라이 고골의 <비이>이다. ‘비이’(Viy)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민간설화에 나오는 귀신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신학생 호마는 마법을 걸고 자신의 등에 업힌 마녀를 때려눕힌 뒤, 지역 영주의 죽은 딸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된다. 알고 보니 죽은 딸은 마녀에 빙의된 그 노파였고, 마녀는 살아나 ‘비이’를 불러들여 호마를 죽인다.
이 소설은 짧지만 요약하기 어렵다. 사건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사건의 표정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요약된 줄거리에 담을 수 없는 그 표정들이 이 소설의 귀기를 만들어낸다. 내면의 어둠과 초자연적 존재에 몰두했던 고골은 1809년에 태어나 1852년에 정신병자로 죽었다. 죽은 뒤에 ‘실은 그가 죽지 않았다’, ‘그의 해골을 실은 기차가 사라졌다’는 등의 괴담이 떠돌았다고 한다. <비이>라는 한편의 소설보다, 그의 작품과 생애 전체가 괴기로 둘러싸인 한 작가의 망집(妄執)이 <마녀의 관>이라는 영화에 더 깊이 전이되어 있다. 하지만 반복건대 중요한 건 그 망집보다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영화는 세 에피소드로 나뉘어져 있고, 각각 ‘1막 이상한 여자’, ‘2막 마녀의 관’, ‘3막 커튼콜’이라는 중간 제목이 붙여져 있다. 1막은 영화감독 P의 <비이> 영화 만들기 과정, 2막은 <비이>의 연극 공연, 3막은 <비이>의 인형극에 참여한 장님 음악가의 환상을 다루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은 동일하고 같은 원작의 상연이라는 공통의 모티브가 있지만 세편은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하나의 서사로 엮여 있다.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의 비유적인 표현으로서의 하나의 서사가 아니며, 세 이야기를 묶는 통합적인 상위 서사가 있다는 말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의 서사가 될 수 있는가. 물리적으로 비유하면 각각의 막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스크린이라는 막에 구멍을 뚫을 수 없다 해도, 세 이야기를 가르는 막에는 구멍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3D로 볼 수 있었다면…
구멍이 뚫리자 상이한 주체들, 격리된 시공간들, 현실과 환상이 서로 꼬리를 물고 넘나들고 서사는 이상한 형태로 변형되고 중층화하면서 이야기의 요약이 불가능해진다. 그 구멍이 디지털 미디어의 인터페이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데이비드 제임스가 이 영화를 “‘데이터베이스 내러티브’의 명석한 실현”이라고 말한 것은 일리가 있다. 물론 이것은 20세기 후반의 아방가르드와 데이비드 린치에 의해 시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녀의 관>의 새로운 점은 영화와 연극과 음악 인형극이 인터페이스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건 단일 스크린에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기획이다. 연극이나 인형극을 담은 필름은 결코 연극이나 인형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진성 감독은 그것은 연극인 척 혹은 인형극인 척 보이도록 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내부에서부터 불순화하고 혼성화한다. 다시 비유하자면 구멍들은 막간뿐 아니라 막의 내부에도 산재한다.
2막의 예를 드는 게 좋겠다. 2막은 원작을 그대로 상연하는 유일한 에피소드이지만, 불구의 연극이다. 이 에피소드의 무수한 시점 숏들, 특히 호마가 마녀를 업고 하늘을 나는 장면의 시점 숏은 실제 연극에서는 표현 불가능하다. 첫 등장한 마녀는 혼자 러시아어로 말하고 호마는 21세기의 한국어로 말하며 의상도 뒤죽박죽이다. 무엇보다 이 연극은 관객이 없는, 아니 극장 전체가 한 단위의 무대인 괴이한 연극이다(이 상연은 3부의 폐교회에서의 인형극 환상으로 변주되며, 이 환상은 1부의 P의 꿈과 느슨하게 이어져 있다). 여기서 지켜지는 연극의 요소는 연기와 무대의 약속된 양식성뿐이다. 마녀의 끔찍한 전력을 전하는 회상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1막의 장면들과 접속하며 이 연극은 종잡을 수 없이 혼성화한다.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 에피소드에서 왜 연극 공연이라는 형식을 필요로 했을까. 3막은 인형극이긴 하지만 리허설 장면만 나오고, 그나마 맹인 음악가의 환상이므로 영화적 표현의 영역에 흡수될 수 있다. 게다가 3막은 1막과 마찬가지로 현대적으로 각색되고 변형된 이야기이다. 하지만 2막은 원자의 각색이나 해석이 보이지도 않는다. 저예산영화임에도 2막을 3D로 찍었다는 것이 대답의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다(안타깝게도 <마녀의 관>은 2D로만 상영된다). 박진성 감독은 연극이 관객에게 지닌 육체적 직접성이 3D 스크린으로 변형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2D로 보는 우리로서는, 연극의 양식성에 대한 감독의 특별한 존중과 그 양식성과 영화의 사실성의 이접 효과에 주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3막은 이 영화에서 가장 관습적이지만 가슴 저미는 에피소드이며 양식미에 대한 애호가 2부보다 더 두드러진다. 룸살롱에서 기타를 치며 먹고사는 맹인 음악가는 여인의 손을 잡고 인형극 연습장으로 간다. 맹인은 천상의 음율 같은 피아노 반주로 인형극을 열고 닫으며 스탭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는다. 마녀의 인형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그러나 이것은 맹인의 환상이었다. 연습장은 신이 버린 듯한 폐교회이며 부서지기 적전의 피아노는 연주가 불가능하다. 점쟁이는 맹인에게 “윈귀 중에서 가장 지독한 딴따라 원귀가 달라붙었다”고 말한다. 맹인은 “귀신이면 어떤가. 내 음악을 그렇게 좋아해주는데”라고 말하며 폐건물로 향한다.
기괴하고도 역동적인 변형이 일어나도다
동료의 경멸, 주변인의 몰이해, 우울증과 환각과 욕정에 휩싸여, 그러면서도 ‘딴따라의 원귀’를 버리지 못해, 창작자는 자의로 혹은 타의로 죽거나, 눈멀고 귀멀어 비루하게 생존을 부지하면서도 예술가의 환상에 자족한다. 환호는 들리지만 관객은 프레임에 잡히지 않는 무대에서 세 주인공이 커튼콜에 응하는 장면으로 영화의 막은 내린다. 정념은 자조적이고 서글프지만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인 요소와 양식들이 뒤섞이며 영화 전체에는 하나의 서사로 요약할 수 없는 기괴하고도 역동적인 변형이 일어난다. 이 변형이 우리의 인지와 감상 방식을 바꿔놓을 만큼 새롭고 강한 (무)질서에 이르렀는가. 혹은 이 영화의 어둡고 폐쇄적인 정념은 그 변형의 형식에 조응하는가. 아직 확신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일단 이 변형의 활력에 내기를 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