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그 남자, 실로 쿨하다
2010-03-25
글 : 송경원
뿌리 내리지 않고 ‘사이’에서 살아가는 남자 이야기 <인 디 에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인 디 에어>의 오프닝 시퀀스는 항공 촬영한 부감숏의 나열을 통해 조형적 관점에서 대도시의 전경을 실로 아름답게 구성한다. 하지만 평화롭기까지 한 이 지상 풍경에 망원경이 아닌 현미경을 들이대는 순간, 영화는 울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허망해하는 실직자들의 얼굴을 카메라 바로 앞까지 바싹 당겨온다. 금융위기 이후 밀어닥친 경기침체의 시대상과 불안을 예리하게 파고든 이 영화가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동시대를 공유하는 이러한 시대감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 디 에어>에는 단순한 물리적 거리를 포함하여, 카메라의 원경과 근경, 다큐멘터리적 기법과 기발한 허구의 경계, 대량해고 시대의 해고전문가라는 아이러니와 그것을 가로지르는 인간성처럼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일종의 ‘거리감’에 관한 역전과 균열이 엿보인다. 영화 제목 그대로 ‘공중에서’, 혹은 ‘결정되지 않은’ 삶을 사는 라이언(조지 클루니)은 이러한 틈새를 메우거나 반대로 더욱 벌어지게 하는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남자다. 이 영화는 명백히 이 ‘쿨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공항, 비행기, 호텔은 그의 안식처

라이언이 집과 같은 평온함을 느끼는 곳은 불편한 공항이나 잠시 머무는 호텔이다. 이것은 분명 이상하다. 스스로 말하는 바와 같이 공항의 환풍기, 인공조명, 공항의 싸구려 스시 같은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행의 불편함, 그 이상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목적이 아닌 생략하고 싶은 과정이기 때문에 불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항이나 호텔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곳이며 거쳐가야 하되 가능하면 떠나도록 운명지어진 공간이다. 그러나 라이언은 바로 이러한 비(非)장소에 삶의 돛을 내리고 있다. 실제 라이언은 그의 집(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집이라고 소개하는 임대아파트)에 1년 중 40일도 채 머물지 않으며 그 시간마저 괴로워한다. 그의 고향은 언제나 하늘 위이며 1천만 마일리지로 채워진 여행은 적어도 라이언에게 있어 빈 공간이 아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이나 의미를 남기지 않는 파이프와 같은 비장소에 압도적인 시간을 통해 자신의 흔적을 새겨넣으며 삶의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이것은 공항에 거주하는 남자에 관한 또 다른 영화 <터미널>의 빅터가 공항의 빈 공간 곳곳을 문서로는 습득할 수 없는 경험들로 채워넣는 모습과 닮아 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감시카메라로는 포착되지 않는, 개념이 아닌 경험으로의 공간이 분명 그곳에 있다. 라이언이 공항검색대를 효율적으로 빨리 통과하는 법을 익히게 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목적지까지 좀더 빨리 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좀더 편하게 공항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남자는 모두 이방인들이 스쳐지나갈 이동의 ‘사이’에서 살아가고 비장소에서의 삶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빅터는 공항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라이언은 공항에 머물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빅터가 공항에 머물러야 하는 당위는 외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지만 라이언의 그것은 얼핏 자유의지인 듯 보인다. 하지만 알렉스(베라 파미가)와 나탈리(안나 켄드릭)의 등장은 이 유리 같은 자유의지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킨다.

여러 도시를 오가며 모은 각종 마일리지 카드에 자부심을 느끼는 알렉스가 라이언의 닮은꼴이라면 나탈리는 라이언의 ‘하늘’을 빼앗으려는 대척점에 서 있다. 화상을 통한 원격해고 시스템을 들고 나와 해고통보를 위한 이동의 불합리함을 설파하는 나탈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라이언의 반대처럼 보인다. 그녀는 연인에 집착하고, 관계를 소중히 하며, 집이 있는 안정된 삶을 바란다. 나탈리의 원격해고 시스템에는 과정을 제거하고자 하는 효율의 측면보다 한곳에 머물고자 하는 그녀의 욕망이 절실히 반영되어 있다. 때문에 그녀가 시도한 해고 시스템의 본질은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기보다는 그것을 체감할 거리가 부족한 것(혹은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뿐이다. 그녀에게 있어 수백 마일 떨어진 곳의 사람들의 삶은 그저 문서 위의 텍스트에 불과하며, 해고통보출장 역시 지도 위에서 벌어지는 비효율적인 일이다. 때문에 나탈리는 ‘하늘’에 살고 있는 라이언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실감의 문제다.

‘하늘’에서 통일되는 삶과 일

기차의 발명을 통해 인간의 역사가 속도를 얻었을 때, 사람은 대신 오감으로 체화되는 여행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새로운 지각 경험은 종래의 지각 방식을 일정 부분 희생해야만 한다. <인 디 에어>의 오프닝 부감숏이 그것만으로도 신선한 인상을 주는 까닭은(물론 감각적인 편집에 힘입은 바 크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이 우리의 시각경험에 익숙하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점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물하는 대신 조작된 거리감으로 우리에게 실감을 앗아간다. 그것은 존재하지만 체화될 수 없는 이미지이며 나탈리가 해고전문가의 일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녀가 해고통보에 따른 결과를 라이언의 방식으로 실감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다. 정반대의 거울상 같은 두 사람이지만 실감의 거리에 관한 대상이 달랐을 뿐 본질적으로 라이언과 나탈리는 다르지 않다. 둘에게 있어 일과 생활은 분리되지 않는다. 단지 나탈리에게는 실감의 대상이 땅에 뿌리내린 가정이었다면, 라이언에게는 아무와도 관계하지 않는 하늘 위의 삶이었을 뿐이다. 그것이 두 사람이 종국에 교감하고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원천이다.

반대로 라이언과 알렉스의 경우 두 사람의 삶은 서로 단번에 빠져들 정도로 닮아 있다. 두 사람은 호텔의 각종 할인카드를 소중히 여기며 하늘 위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빈 가방’의 철학을 설파하며 관계를 내려놓아야만 하는 짐으로 생각하던 라이언에게 그 무거운 짐을 한번 져보고 싶다는 용기가 들도록 만든 것은 그녀가 자신을 이해해줄지 모른다는 믿음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외로움을 함께 달랠 수 있을 것 같은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말에서 밝혀지듯이 알렉스는 사실 라이언과는 가장 이질적인 존재다. 그녀에게 있어 하늘 위에서의 삶은 단지 탈출구이자 평범한 삶의 짧은 휴식일 뿐이며, 일과 생활을 철저히 분리시킨 그녀의 삶은 온전히 ‘사이’에 머무는 라이언과 겹칠 수 없다. 그렇다면 홀로 살아가는 상어의 삶을 접고 무리짓는 백조가 되어보고자 알렉스의 대문을 두드린 라이언의 결심은 그저 쓸쓸한 좌절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그 남자가 다시 비행기를 타는 이유

엔딩 시퀀스의 인터뷰에서 다양한 실직자들이 가족과의 관계가 짐이 아닌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그것을 옳다고 강변하는 것이라 보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며, 라이언이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까지 연장되진 않는다. 라이언이 알렉스의 진실을 알고 나서 다시 허공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은 단지 익숙한 관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라이언은 자기연민에 빠져 그녀를 미워하거나 자신을 파괴하지 않는다. 가족에 매달리는 자들 앞에서 ‘당신들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설파하고 있는 한 그의 비행은 나탈리나 가족들에게 있어서 관계에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의 도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록 좌절되었을지언정 라이언은 알렉스를 받아들이고자 한 시점에 땅에 정착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눈높이 또한 긍정할 수 있었다. 꼬리치는 강아지와 자녀들이 맞아주는 집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삶을 더이상 ‘짐’이라 부정하지 않고 하나의 삶으로 긍정했을 때, ‘사이’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비로소 온전한 자유의지에 의한 완전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이 남자의 선택, 정말 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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