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말하자면 톨레랑스이기는 한데…
2010-03-25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감옥이라는 세트장을 무대로 한 <예언자>가 타자를 다루는법

<예언자>가 프랑스 사회의 인종적 타자, 아랍인을 다루는 방식은 대담하다. 대담하다는 표현은 물론 양가적이다. “더러운 아랍 놈들”과 같은 인종차별과 증오에 가득 찬 언어들이 영화 속에 횡행한다. 동시에 아랍계 청년의 감옥에서의 삶을 통해 프랑스 사회의 인종문제를 축약해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감독 자크 오디아르는 자신의 이미지가 없는 아랍인들을 위해 이미지를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발언 자체는 문제가 있다. 자신이 속하지 않는 어떤 그룹을 재현하고 대변하려는 욕구는 오만하거나 생색내는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그래서 이런 식의 자신감보다는 윤리적 주저함이 중요하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두보이스는 세계와 유색의 베일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장벽인 ‘물어보지 않은 질문’에 대해 언급한다. 그 질문은 “문제로 살아가는 기분이 어떤가?”라는 것이다. 유색인종이 문제라는 생각은 인종차별적 사고의 핵심이다.

직설법의 <예언자>가 지닌 허장성세

<예언자>는 정확히 아랍 청년을 ‘문제’로 보고 출발한다. 19살, 막 성년이 된 말리크(타하 라힘)는 6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가 정확히 어떤 ‘문제’를 저질렀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감금의 과정을 자세히 보여줄 뿐이다. 문맹에 가까운 이슬람 청년 말리크는 감옥에서 코르시카 출신의 갱의 명령을 받고 같은 아랍계 사람을 청부살인한 뒤 코르시카 갱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잔재주를 익힌다.

<예언자>는 프랑스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한국도 직면하고 있는 인종적 타자라는 이슈를 홍콩, 마카오를 경유해 좀 글로벌한 맥락에서 보고 다시 <예언자>로 되돌아오려고 한다. 2009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랐던 <예언자>와 두기봉의 <복수> 중 내게 단연 놀라운 영화는 수상작인 <예언자>가 아닌 <복수>였다.

<예언자>는 말리크가 감옥에서 성장 아닌 성장을 하는 과정을 플래시 포워드나 유령의 출현을 제외하면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프랑스의 인종문제를 다룬다는 직설법을 구사하고 있다. <복수>는 명백하게 장르적 관행을 따른다. <복수>에는 복수를 위해 홍콩, 마카오에 도착한 프랑스인(조니 할리데이)이 등장한다. 그것이 특별히 인종적 차이로 플롯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복수>는 홍콩을 정주의 장소가 아니라 ‘통과(트랜짓)’의 공간으로 전제하고 있다. 직설어법의 <예언자>보다 오히려 <복수>가 글로벌한 단위에서의 이주와 이동, 이민문제, 식민의 기억, 사고에 가까운 결속, 형제애와 같은 시대적 징후와 기미를 영화적으로 사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복수>를 비교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예언자>의 허장성세를 보았기 때문일 거다. <예언자>는 인종적 ‘문제’를 기획한다. 그러나 말리크는 아랍인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인종차별적 호명들을 제외하면 ‘아랍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다. 부모, 친척, 친구 없는 혈혈단신으로 등장한다. 아랍계인으로서의 자원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시작해 그는 코르시카계, 아랍계, 집시 등과 어울리고 싸운다. 19살의 남자를 거의 사회적 유아에 가까운 제로 상태로 설정했다가 감옥에서 6년간 ‘성장’하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영화 텍스트를 구성하는 방식이지 인종차별을 다루는 방식은 아니다. 그것 자체가 안될 것은 없으나 이 영화가 예민한 부분을 다루고 있어 지적하는 것이다. 반면 <복수>는 스스로를 사회적 문제로 제시하지 않는다. 정의 없는 사회, 불법이 법이며 명령인 사회에서 개인간의 윤리는 낭비며 저주며 폐기물이다. 황추생이 이끄는 <복수>의 청부업자들은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계약을 파기하는 대신 쓰레기 폐기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더구나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해달라고 청부한 조니 할리데이는 머리에 박힌 총알 때문에 기억을 잃어가고 있고 왜,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지 망각한 상태라 ‘복수’의 기원도 도달점도 무의미해진 상태다. 원인도 효과도 사라진 상태에서 청부업자들은 자신들이 사라지는 길을 택한다.

실종에 관한 <복수>와 출현에 관한 <예언자>

이 영화의 배경이 홍콩이고 마카오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누가 홍콩인이고 프랑스인인가 하는 점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영화의 공간만큼 의미심장한 건 아니다. 아크바 압바스가 <홍콩: 문화와 실종의 정치>를 낸 것이 1997년, 홍콩 반환 시점과 일치한다. 그의 통찰은 홍콩은 중국과 영국이라는 두 식민권력 사이에 포획된 유례없는 역사적 상황 속에 있으며, 바로 이 실종의 공간에서 영화는 정체성의 이미지를 포착하려고 한다는 거였다.

당시에도 왕가위의 영화를 장소나 정체성의 실종, 사라짐을 표현하는 것으로 읽는 것에 공감이 갔다. <복수>의 명장면이 펼쳐지는 쓰레기 폐기장이나 기억을 잃어가는 조니 할리데이가 폴라로이드 사진을 든 채 빗속에서 황추생 일행을 찾아내는 장면은 바로 압바스가 이야기하는 ‘사라짐’, ‘실종’의 미학 그리고 그 윤리의 정점으로 보인다. 근래에 본 영화 중 진정 최고다. 장소도 공간도 정체성도 그리고 기억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곳에서 망각에 빠진 생존자 프랑스인 조니 할리데이의 웃는 얼굴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어떤 통탄할 만한 불가능성, 카타스트로프를 역설적으로 전한다. 사라지는 홍콩에 남은 프랑스인. 영화는 필사적으로 이 사라져가는 것들을 미적으로 되살려낸다. <복수>가 믿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장르영화의 치열한 영화적 완성도다. 영화는 이 사라짐을 기록하고 포스트 셀룰로이드 아카이브에 저장한다. 다음 영화에서 이 사라진 사람들은 다시 배우로 등장해 또 다른 실종을 재현할 것이다.

<복수>를 <예언자>와의 비교를 위해 등장시켰기 때문에 마음 같아선 <복수>에 매달리고 싶지만 다시 <예언자>로 돌아가보기로 한다. <복수>가 실종에 연루된다면 <예언자>는 출현의 이야기다. 뱅상 카셀, 마티외 카소비츠 같은 배우들을 기용했던 프랑스 감독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에 아랍계 배우가 출연하다. 인종적 타자인 배우의 출현. 감옥에는 마약을 취급하는 집시들과 아랍계 갱도 있어 말리크는 코르시카 갱들로부터 배운 아랍계 하이브리드 갱으로 재출현한다. 영화는 예언이라기보다는 어떤 환영들을 적절하게 출현시키는데 그것은 불가지이며 영화에 통합하지 못하고 떠돈다. 영상으로써 걸출한 장면은 이 환영 속에 등장한다. 말리크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도망가는 사슴들과 사슴 출현 경고 사인보드를 본다. 이 환영이 현실에서 유사하게 구현된다. 제목은 마호메트를 가리키는 <예언자>이나 시선을 끄는 이 장면은 예언과는 관계가 별로 없고 무언가를 시사하거나 제시하는 것도 아이다. 이러한 간극 속에서, 리얼리즘적 법칙도 아니고 판타스틱하지도 않은 애매함 속에서, 코르시카 대부를 공격하는 말리크의 변모를 극적으로 과장해나간다. 처음에는 말리크를 텅 빈 ‘문제’로 설정하고, 나중에는 해결사로 변모시켰다가, 출옥해선 병으로 죽은 자신의 공범자인 아랍계 남자의 가족과 함께 살게 한다.

디아스포라의 출현과 실종의 시대에

<복수>의 사라짐, 실종이 오히려 철저하게 역사화된 공간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예언자>는 감옥이라는 세트장에서 구성된다. 여기는 프랑스이기는 한 것인가? 영화는 아랍계 청년을 영화적으로 조련해 어떤 하이브리드적 정체성을 가진 갱으로 내부화시킨다. 악화된 순화다. 뭐 관용, 톨레랑스라면 톨레랑스일 테고…. 이것을 프랑스식 인종문제의 해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장일 수 있으나, 프랑스 예술영화의 해법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야말로 글로벌하고 트랜스내셔널할 영화 생산과 확산의 시대. 프랑스 남자는 홍콩에서 살인 청부를 지시하고, 아랍계 남자는 프랑스에서 살인 청부를 지시받는다. 디아스포라의 출현과 실종의 시대. 예언자는 어디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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