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이 슬픈 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으로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되기 때문에….
공지영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중
-고 최진영의 미니홈피에서-
배우 겸 가수 최진영이 세상을 떠났다. 누나 최진실의 죽음 이후 2년 만의 비보다. 최진실이 사망한 2008년 이후, 최진영은 활동을 접은 채 가장 역할에만 전념했다. 실의에 빠진 어머니를 대신해 가족을 이끌었고, 누나가 남긴 두 조카 환희와 준희에게 든든한 아빠가 되었다. 고(故) 최진실 1주기를 추모하는 몇몇 버라이어티쇼 프로그램에 간간이 모습을 비추다가 최진영은 학업을 이어가라는 누나의 뜻에 따라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2009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재기의 꿈을 키워나갔다. 하늘에 있는 누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간절한 마음과 함께. 하지만 지난 3월29일 최진영은 어머니와 자식같이 키우던 두 조카를 남기고 떠나갔다. 31일, 그가 가는 길에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돌이켜보면 최진영은 늘 청춘에 머물러 있었다. 데뷔작인 <우리들의 천국>(1990)을 비롯해 <있잖아요 비밀이에요2>(1990),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1991) 등 하이틴드라마나 영화에서 최진영은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풋풋한 소년이었다. 안경 쓴, 특유의 선한 인상 덕분에 그는 이성에게 편한 느낌을 주었다. 간혹 불량배로 나오는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 달이 뜨는가>(1991)나 인생을 진중하게 고민하는 스님 역을 맡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같은 작품에서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면모를 보인 적도 있다. 하지만 이후 출연한 드라마 <도시남녀>(1996)나 <방울이>(1997)에서의 최진영은 하이틴영화 속 그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최진영은 늘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그의 앞을 항상 따라다녔던 ‘최진실 동생’이라는 수식어를 부담스러워했고, 또 떼어내려고 애썼다. 1999년 <영원>이라는 곡으로 가수 데뷔할 때였다. “최진실의 동생이 아닌 당당히 내 이름을 찾고 싶다”는 이유로, 최진영은 자신의 본명 대신 ‘SKY’라는 예명을 택했다. ‘얼굴없는 가수’의 컨셉으로 그는 한동안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엄마 같은 누나의 존재는 껍데기를 바꾼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최진실의 부재 이후, 특히 그랬다. 누나 대신 아버지 역할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최진영은 늘 힘들어하고 부담스러워했다. “누나가 있을 때는 몰랐는데, 혼자서 가정을 이끌어보니 누나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그때마다 누나가 그립다.” 이는 그의 얼굴에서 잘 드러났다. 당시 TV 속에서 그는 항상 표정이 어둡고, 눈물을 종종 흘리고, 고개를 숙일 때가 많았다. 그 모습에는 가장 ‘최진영’의 삶만 있었을 뿐, 개인 ‘최진영’의 삶은 없었다.
최근 최진영은 다시 활기를 되찾은 듯 보였다. 버라이어티쇼 프로그램에 나와 16살 연하의 아가씨와 가상 결혼 생활을 하며 밝은 얼굴을 보여주는가 하면, 새 소속사와 계약을 맺어 배우에 대한 욕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내심 기대가 됐다. 고인에게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큰 아픔을 겪었기에 한 차원 더 높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그는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 더 많고, 우리 역시 그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면모가 한참 남았다. 충무로에 신선한 활력소가 되어주길 바랐는데. 무엇보다 엄마에 이어 삼촌까지, 든든한 두 버팀목이 사라진 어린아이들을 생각하니 그의 죽음이 더욱 원망스럽다.
“지친다. 사람이란 것에 지치고, 살아온 것들에 지치고. 이런 나 때문에 지친다.” 죽기 전, 최진영이 자신의 미니홈피에 남긴 심경이다. 사람 좋아했고, 술 좋아했고, 아이 돌보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마지막까지 남모르는 고통을 겪었다. 이제는 그 마음의 짐을 벗어던지고 아무 걱정과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