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두나] 다 벗었다, 기쁘게 쿨하게
2010-04-09
글 : 이화정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공기인형>의 배두나

배두나가 갇혔다. 그곳은 경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속 장면이다. 무심한 듯 자연스러운, 잔뜩 풀어진 배우 배두나는 <공기인형>에서 자신을 꽁꽁 묶어두는 모험을 한다. 섹스돌 ‘노조미’의 몸속, 빳빳하게 긴장한 목선 하나까지도 기존의 배두나를 거스르는 ‘부자연스러운’ 연기다. 도전을 감행한 그녀의 변이 궁금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는 어떻게 알게됐나.
=감독님이 내 팬이란 얘기를 들었다. 그러다 봉준호 감독님을 만나 “배두나가 맡아줬으면 하고 쓰는 배역이 있는데, 해줄까” 하면서. “근데 좀 야하다”고 고민을 털어놨다더라. 봉 감독님이 “배두나라면 괜찮다고 할 거다”라고 했고. (웃음)

-그래서 역시 ‘배두나여서’ 괜찮았던 건가. 섹스돌이라는 만만치 않은 캐릭터였는데.
=오히려 좋았다. 시놉시스는 완성된 영화보다 설정 자체가 훨씬 셌는데 그게 확 다가왔다. 게다가 독창적이고 엄청난 세계관이 있는 감독이 날 선택한 거다.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80~90% 정도. 근데 사실 난 99%가 맘에 들어도 1%가 거슬리면 하지 않는다.

-이 경우엔 그 1%가 노출이었겠다.
=사실 그렇다. 노출이 제일 컸다.

-노출신이라면 이미 <복수는 나의 것>에서 소화하지 않았나.
=하기 쉬운 말로 ‘여배우가 벗는 걸 왜 두려워해’ 하지만, 그렇다고 꼭 벗을 필요는 없는 거다. 일본까지 가서 그런 위험부담을 떠안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노출을 걱정하기엔 장점들이 많았던 영화다.
=맞다. 시나리오가 맘에 들었고, 고레에다 감독 작품이란 걸 놓치기 싫었다. 박찬욱 감독님과도 상의했는데 바로 하라고 하더라. 노출 걱정을 내비쳤더니,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시더라.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거 같더라. 10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걱정했던 노출 부분은 영화를 보고 나서 싹 사라지지 않았나. 배우가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긍정적인 노출이었다.
=촬영하면서는 기쁘게 벗었다. 감독님의 배려가 1분 1초 매일 느껴졌다. 프로페셔널하게 돌아가는 바쁜 현장에서도 어떻게 해야 배우의 몸이 아름답게 나올 수 있는지 세심하게 신경써주셨다. 내가 감독이라도 그렇게까지는 못했을 것 같다.

-막상 촬영을 하고 나니 결정하기 전에 가졌던 두려움 같은 건 쉽게 없어지던가.
=결정까지는 엄청 까다로워도 한번 도장 찍으면 엄청 열심히 한다. 싫으면 아예 선택을 하지 말지, 한다고 하고 나중에 빼달라, 바꿔달라 식의 요구는 안 한다. 촬영도 무척 재밌었다. CG를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웃긴 장면도 많았다. 처음 창가에서 인형이 생명을 얻어 사람으로 변하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가발이 하나밖에 없는 거다. 인형 뒤에서 대머리(가발망)에 누드로 대기하고 있다가 인형이 촬영하고 빠지면 그 가발 받아서 쓰고 들어가는 거다.

-촬영은 얼마나 걸렸나.
=한달 반 걸렸다. 보통 일본영화는 촬영 기간이 4주가 안되니 꽤 긴 편이었다. 일본어 분량이 많아서 녹음 CD 들으면서 대본 연습을 했다. 프리 프로덕션 때 감독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하는 바, 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꼼꼼히 설명해주셨다. 같이 출연한 아라타씨 얘길 들어보니 원래 감독님이 절대 그런 분이 아니라더라. 자기랑 일할 때는 아예 대본을 안 줬다고. 심지어 아라타씨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대본을 찢어버리고 주기도 했다고 한다.

-고레에다 감독의 개인과외 덕분인가, 대사량이 상당한데도 일본어가 꽤 자연스럽더라.
=처음엔 대사량이 많지 않았다. 감독님이 ‘이 역할이면 외국인 배두나에게도 맡길 수 있겠다’ 생각하셨다니,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형이니 아기가 말을 배워나가는 것 같은 과정이니까. 근데 감독님이 다른 일본 감독들과 달리 신을 추가하거나 수정하는 걸 즐기시는 편이다. 아침마다 “미안해. 내가 대사를 더 추가했어” 하시면서 쓱 새로운 대본을 내미시는 거다. 그러다보니 대사가 점점 많아져서…. (웃음)

-감독은 ‘배두나란 배우의 자연스런 모습에 반했다’고 했다. 배두나 연기의 강점 역시 그런 내추럴함에 있다. 그런데 노조미는 온통 부자연스러움의 결합체다.
=기존 연기와 다른 건 사실이었지만, 변신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난 변신에 대한 필요를 별로 못 느낀다. 새로운 데 도전하는 건 재밌지만 ‘꼭 해야 해?’라는 질문도 생기는 거다. 그냥 세월이 흐르면서 나란 배우도 변하는데 인위적으로 뭔가를 만들어야 하나 싶다. 그럴 정도로 욕심도 없고.

-상복은 있었다. 일본아카데미를 비롯해 연달아 일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너무 놀랐다. 이 작품으로 상을 받을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다. 내숭이 아니라 진짜다. 알지 않나. 내가 상을 받을 만한 연기스타일이 아니란 걸. 대단한 열연을 한다거나, ‘자, 나 이렇게 연기 잘하니까 봐봐’ 하고 보여주는 스타일이 아니다. 게다가 인형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니 표현하기보다 감정을 누르는 데 더 신경을 쓴 연기였는데 이게 뭔 일인가 싶더라. 시상식에서 다른 일본 배우들이 나를 알아봐주는 것에도 많이 놀랐다.

-‘박찬욱, 봉준호 효과’가 있는데, 몰라볼 리가 있나.
=같이 했던 감독들이 세계적인 감독이 되니 덩달아 그런 배우가 된 거다. (웃음) 행운아다. 한 90%가 운이고 10%가 그 기회를 잡는 내 노력이었다. 어떻게 내가 영화배우가 됐나부터가 신기할 일이다. 이런 과정이 아직도 얼떨떨하다. 난 그냥 그대로인데 주변이 바뀌고 달라지니 나도 다르게 평가받는다. 근데 그게 꼭 좋지만은 않다.

-무명 시절이라곤 모르고 배우로 자리를 잡은 대표적 케이스다.
=영화배우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 자체가 영화배우가 되고 나서였으니까. 어쩌다 보니 연예인이 돼 있었고, 또 어쩌다보니 <플란다스의 개> 오디션을 보러 가게 된 거다. 그때 너무 졸려서 오디션장에서 졸고 있었는데, 봉준호 감독은 “얘다” 싶었다더라. 그러니 도대체 얼마나 운이 좋은 건가.

-한류배우와는 다른 측면이지만, 배두나라는 배우의 활동 영역은 글로벌하다. 얼마 전엔 패션 매거진 <나일론 뉴욕>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것도 우연이었다. 거기 편집장이 잠깐 1박으로 한국에 왔다가 우연히 잡지를 보고 나를 궁금해했고, 촬영이 성사됐다.

-그걸 운이라고 치부하진 말자. 창작자들을 사로잡는 본인의 매력이 있는 거다.
=굳이 꼽아보자면 무심함인 것 같다. 난 이상향은 있지만 거기 도달하고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냥 내 것이 아닌가보다 하고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해본 적도 없고. 강아지처럼 애정을 갈구하는 게 아니라 고양이처럼 무심하게 있으니 괜히 한번 가서 만져보고 싶은 거 아닐까. (웃음)

-연극배우인 어머니 김화영씨의 영향도 크지 않았나. 주목받는 삶에 대해 어릴 적부터 자각이 있었을 것 같다.
=배우인 엄마의 영향이 큰 건 사실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나에겐 커다란 벽이었다. 다섯살 때부터 박정수, 송영창 같은 연기 잘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배우는 저렇게 타고난 사람만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난 초등학생 때 웅변대회 나가서 5분 동안 단상에서 울다 내려올 정도로 끼라곤 하나도 없는 아이였다. 지금도 촬영장이나 무대에선 배우인 건 알겠는데 그외에는 자각이 잘 안 든다. 평소엔 그냥 ‘사람’ 배두나. 그래서 난 배두나란 튀는 이름이 맘에 안 든다. 실생활엔 배우 배두나와 다른 이름이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

-욕심은 몰라도 확실히 전략은 있는 배우 같다. 타협없이 그 특이한 이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몇 안되는 여배우다.
=생각해보면 내가 참 독하다. 2~3년에 한번씩 작품을 하는 건 죽어도 안되는 거, 내가 허락할 수 없는 선이 있기 때문이다. 맘에 들지 않는 건 하지 않겠다는 거, 그게 나의 유일한 욕심이다. 그래서 대중과 소통하는 창구로 드라마를 하게 된다. 드라마에서의 배두나와 영화에서의 배두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소통은 필요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작품을 고르는 데 휘둘릴 수는 없는 거다. 그런 고집들이 내 길을 만든 것 같다.

-<괴물>을 계기로 기존의 마이너한 부분에 대중적인 부분을 획득했고, 그 기반이 선택을 더 자유롭게 해주었다.
=한동안은 갈등이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깐깐하게 작품을 고르게 됐지. 당장 일본에서만 해도 배두나가 하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라는 인식이 있고, 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맘 편하게 하는 게 힘들어졌다. 그냥 편하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의 부담을 안게 됐나. 이게 무슨 허영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지금은 그런 고민에서 좀 벗어났다. 한국영화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하고 싶은 역할이 끝까지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냥 연기 하지 않을 거 같다. 안 해도 좋다. 하기 싫은 걸 하면서 해야 할 정도로 미련이 있지는 않다.

-다른 관심이 많아서 그런 거 아닐까. 배우로서의 배두나와 라이프 스타일을 강조한 배두나라는 아이콘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보인다.
=스타일 아이콘으로 20대 또래 여성들의 감수성을 자극한 건 분명하다. 여행책을 세권이나 내면서 그런 부분을 부추긴 것도 있다. 얼마 전 뉴욕에서 6개월간 머물면서 영어를 배우며 살았더니 뉴욕편은 왜 빨리 안 내냐고 많이들 물어보신다. 사실 계획이 전혀 없다. 난 배우고 그건 잠깐의 이벤트였다. 그러니 본능적으로 더이상 손이 안 가는 거다. 영화제나 패션쇼에 가는 것도 싫다. 화려한 데서 사진 찍히는 게 안 맞는다. 물론 영향을 끼치는 사람으로서 자각은 있다. 화려한 배우의 모습이 아니라 생활적인 부분에 대한 기호. 예를 들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공개해도 될 만한 기호들은 공개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팬시하게 포장된 건 사실이다. 배두나라면 집에서 추리닝을 입은 모습도 모두 예뻐야 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다. 집에서 밥을 먹을 때도 반찬통에서 그냥 집어먹는 건 절대 하면 안된다고, 항상 예쁜 접시에다 덜어먹어야 한다고. 그러다보니 그게 귀찮아서 아예 밥을 안 먹는다. (웃음) 심지어 배우가 된 다음에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도 네가 배우인 걸 잊으면 안된다라고 하셨다.

-일 이외의 것, 취미도 꽤 깊이 파고드는 편 아닌가.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 때문이다. 내겐 새로운 게 아니면 별 의미가 없다. 모델 할 때, 날 두고 세기말 스타라고 평가할 때도, 그걸 벗어나 영화를 선택했다. 전환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남보다 먼저 뭘 해야 직성이 풀린다. 원래 집착이 심하다. 우리 집에서 유명한 일화가 어릴 때 내가 지우개를 엄청 모았고, 다 모으면 친구들한테 나눠줘버렸다는 거다. 모으기에만 집착하고, 일단 마음이 떠나면 뒤도 안 돌아보는 성격이다.

-애정을 주기보다 획득하는, 받는 스타일이다.
=마음은 참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그걸 내뿜는 걸 잘 못하는 것 같다. 내 자신을 보여주고 그런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하다. 연기도 절제하고 감추는 것을 선호하듯이. 어떻게 보면 그게 콤플렉스 같기도 하다.

-그런 모습을 한번 깨고 싶지는 않나. 절절하게 내뿜는 연기가 해보고 싶다거나.
=신파 같은 거 말인가. 난 그런 거 되게 싫어한다. 난 배우가 극중에서 절절하면 내가 빠져나온다. 그래서 그런 연기를 잘 못한다. 그게 관객 배려 차원이기도 하고. (웃음) 나이 들면 또 모르겠다. 20대 초반부터 청춘 연기,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연기는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30대가 되면서 이제 붕붕 뜨던 것들이 많이 가라앉았으니 아마 자연스럽게 변하지 않을까. 어쨌든 아직은 내가 그런 모습이 상상이 잘 안 간다.

-다음 작품은 영화가 되는 건가.
=아직 결정 안 했다. 좀 기다려보려고 한다. 요즘엔 일본에서 20분씩 인터뷰한 게 거의 전부였는데 오랜만에 영화지랑 인터뷰하니 참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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