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우리는 섣불리 답할 수 없다
2010-04-08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코언 형제의 <시리어스 맨>이 해답을 가린 질문에 답하는 법

소설 <변신>에서 그레고르는 생계를 책임질 수 없는 모습으로 변형되자 가족에게 소외받는다. 그를 의사소통 부재의 상황으로 내몬 것은 흉측한 벌레가 되어버린 그의 외모이다. 삶에서 단 한 가지의 조건이 바뀌었을 뿐인데, 전부가 바뀌었다. 혹은 전부를 알게 된다. 이는 마치 과학자들의 실험 방식과도 같다. 각기 다른 컨디션을 통해 목표한 결과를 유추해낸다. 이 직접적이고 기괴한 작품을 통해 카프카는 인간사 부조리와 가려진 허위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한편 <시리어스 맨>의 주인공인 물리학자 래리는 수업시간에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칠판에 그리는데, 이 실험에서 고양이는 강철상자에 갇혀 있다. 그 녀석이 독극물에 오염되지 않고 살아남을 확률은 반반이다. 결과를 알기 전에 실험자는 상자 안의 상황을 볼 수 없다. 그가 알게 될 것은 오직 결과뿐이다. 이 실험을 통해 슈뢰딩거는 미시세계의 불확실함으로 인해 거시세계 역시도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고 한다. 이 경우 실험의 컨디션은 상자가 철로 되어 있을 것, 즉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숫자상의 확률은 1/2이지만, 우리는 마침내 1 혹은 0을 목격한다.

만약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이후 <시리어스 맨>을 보면서 스크린 속의 ‘사건’(고양이의 죽음 여부)을 ‘과정’(철상자 안에서 일어났을 법한 일)과 분리해서 보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3분의 1쯤 영화가 진행된 뒤에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단순히 보이는 사건 자체로 평가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 코언 형제는 마치 과학자가 된 듯 일정한 컨디션이 부과된 개별 사건을 차례로 보여주는데, 마지막에는 해답을 가린 채 문제를 출제하고 사라진다. 멀리서 거대한 허리케인이 불어온다. 과연 이 마을은 어떻게 될까? 의사에게 종합검사 결과가 나왔으니 당장 만나야 한다는 전갈이 온다. 왜 하필 당장이지? 평소라면 부정적 우려가 쏟아질 질문들이지만 섣불리 답할 수 없다. 지금까지 보아온 실험의 결과가 평소 예측한 패턴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

믿었던 진실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산타나의 2집 <Abraxas>가 6월의 명곡이 되던 어느 해의 일이다. 대니는 히브리어 수업시간에 몰래 이어폰을 꽂고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음악을 듣고 있다. 이 장면에서 감독이 대니의 외도를 설명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크게 보아 <시리어스 맨>의 공간은 카메라가 관찰하는 곳과 그러지 않는 곳으로 나뉘는데, 시작부의 껌껌한 귓속이 대표적이다. 그 이후부터 영화는 종종 사운드만으로 정보를 제공한 채 내부공간의 공개를 꺼리는데, 이런 경향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쭉 이어진다. 싸이의 죽음을 전해들은 쥬디스를 설명할 때 카메라는 방이 아니라 복도를 비추고, 아서가 화장실에서 종기를 짤 때도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오직 밖으로 삐져나온 기계장치뿐이다. 래리가 보지 못한 세 번째 랍비의 방 안도 포커스 아웃된 이미지로 소개된다. 성인식을 치른 다음 대니가 그곳에 들어가지만 그가 목격한 것은 이를 비롯한 인체장기 모양의 소품들, 인간의 귓속처럼 미장센화된 그곳에서 랍비는 아이에게 묻는다. “믿었던 진실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어떻게 할까?” 이어서 그는 현답한다. 노래를 통해 안식과 커뮤니케이션의 길을 터준 <Somebody to Love>를 부른 에어플레인 멤버 각자의 이름을 통해. 샘스키 부인의 시야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래리가 현관을 두드리기 전 그녀는 그가 온 것을 인지하는데 그녀의 인식법은 랍비의 것과 동일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어폰을 통해 음악을 듣던 때를 상기하자. 카메라는 서서히 대니의 귓속에서 외부에 도달했다. 이 부분의 카메라 관찰은 또 다른 영역을 제시하는데, 바로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분리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음악이 침투하는 영역과 그렇지 못한 곳, 그리고 (어쩌면 ‘원인’이라 불러야 할) 보이지 않는 사건과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의 차이. 세상의 부조리는 그 간극에 의해 일어나곤 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간극이 덧붙여진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영역과 ‘독해 가능한 언어’의 영역이다. 특이하게도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되기 전에 삽입된 작은 일화는 전체가 이디시어로 구성된다. 사건 자체가 가지는 의미도 있겠지만 여기엔 감춰진 코드가 있다. 뒤에 벌어지는 사건들에서 발췌되는 제3국의 언어를 통해 이는 점차 구체화되는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히브리어가 들리고 그 독특한 음감 때문에 이는 음악처럼도 느껴진다. 수업시간 내내 영어로 된 노래를 듣는 대니는 히브리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군을 대변한다. 중반 이후 그가 노래를 통해 히브리어를 처음 뱉는 대목은 그래서 눈여겨보아야 하는데, 이를 통해 코언은 언어의 간극을 잇는 통로가 음악(혹은 예술)이라고 제시한다(래리가 모텔에 들고 가는 가전도 전축이 유일하게 노출된다).

이어서 한국어 억양, 클라이브의 아버지는 래리를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문화 충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부분은 주제적 접근을 위해서도 다시 들춰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같은 언어로 소통함에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원언어간의 차이가 결국 문화의 차이로 확대되고, 이를 수긍하는 것이 래리의 상황 모면을 위한 실마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교수실로 찾아온 클라이브 박에게 래리는 ‘수학’ 없이는 ‘물리’를 이해할 수 없으니 자신이 내린 성적은 정당하다 말한다. 이에 클라이브는 자신이 ‘죽은 고양이’를 이해했으니 그래도 F는 부당하다고 호소하고. 이때 언급된 수학과 물리의 관계는 ‘철상자 안의 상황과 고양이의 죽음’으로 비유되며 영화 전체에 완곡하게 되풀이된다. 결론에 이르러 이 둘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은 따라서 이 영화의 주제일 것이다. 랍비와 대립되는 일상적 수학의 몰이해자 래리는 결국 자신이 일상(즉, 수학)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실토하는데, 그러니 클라이브에게 준 C 마이너스는 어쩌면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성적이란 것을 언젠가 래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며 각자 자신의 묘사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희화화했다.

마음먹은 대로 진지하게 살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수학과 물리의 비유에 관한 또 다른 에피소드가 영화 속에 숨어 있다. 바로 아서의 경우가 그렇다. 클라이브가 수학을 못하지만 물리를 이해하는 군상 중 하나라면 동생 아서는 그 반대다. 수학을 뛰어나게 잘하지만 그는 물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멘타쿨루스를 완성하지만 그는 이를 도박을 위해서만 사용할 뿐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고, 따라서 돈이 목적이 된 행위가 아니지만 사람들에겐 그렇다고 오인된다. 그러니 그를 유대교적 올람하바가 아닌 (호수로 입구에 쓰인) 캐나다로 보내려고 한 래리의 환상이 총성으로 끝난 것은 당연하다. 영화 전체를 통해 올람하바에 도달한 것은 오직 죽음에 달한 싸이뿐인데, 래리는 싸이에 대해서도 그릇된 인식을 가진다. 두 번째로 만난 랍비 앞에서 그는 싸이와 자신을 동일화해서 이야기하는데, 이는 겉의 결과일 뿐임을 그는 영화에서 끝내 깨닫지 못한다. 때문에 랍비는 그에게 이에 새겨진 문구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는데, 이 이야기의 본질은 현상과 과정의 분리를 깨닫는 데 있다.

노먼 주이슨의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는 유대인의 삶이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된다. 같은 유대인 문화를 다룬 영화이기도 하지만 굳이 이 영화가 떠오른 데는 다른 원인도 있다. 바로 제목이다. 안테나를 고치러 지붕에 오른 래리는 그곳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를 찬찬히 내려다보는데, 그 순간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그가 유일하게 거시적으로 세계를 본 시간이다. 하지만 이 관찰은 길지 않다. 샘스키 부인의 나체를 발견하자마자 그는 곧장 관찰을 멈춘다. 그를 나무랄 수 없다. 우리 역시 극장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관찰하지 않았던가. 마치 이비인후과 의사가 전등으로 보이지 않는 귓속을 관찰하듯 우리는 그녀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개인이 진지하게 삶을 살려고 해도 결국 ‘인식의 문제’에 부딪히는 법이다. 바람이 불자 성조기 때문에 깃대가 나가겠다고 걱정하는 것은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런 걱정은 늘 우리가 하는 생각들이다. 인식의 패턴, 이것이 과연 쉽게 바뀔까? 회의적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불안하지도 않다. 예측하지 못하더라도 결과는 어차피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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