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사라졌다 나타난 꿈을 보다
2010-04-08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기괴한 복종의 영화, 신상옥 감독의 <꿈>을 보고

애타게 보고 싶은, 사라진 영화들이 있다. 조선영화, 한국영화, <아리랑>이 그중 첫 번째일 듯. 절대 은밀할 필요없는 나의 노골적 소원은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와 이만희 감독의 <다이알 112를 돌려라> <만추>, 그리고 김기영 감독의 <양산도>에서 누락된 릴(죽은 수동의 무덤이 쩍 갈라진다는)의 출현이다. 아카이브로 날개를 달고 되돌아오는 것이다. 정말 보고 싶다. 이 영화들! 어디 있는 거니?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1958)에 경탄한 뒤 그의 데뷔작인 <악야>가 정말 궁금해졌다. <지옥화>와 마찬가지로 ‘양공주’를 다룬 영화라고 한다.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데뷔작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집 없는 천사>라는 친일영화와 <자유만세>라는 해방영화를 정말 민첩하게 감독한 최인규 감독의 연출부에서 독립한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말이다.

<꿈>, 기별없이 도착하다

신 감독이 미국에도 ‘수출’되었다는 <악야> 이후 <코리아>라는 한국 홍보 영상물을 찍은 다음 만든 것이 <꿈>이다. 올해 5월에 일반 공개 예정인 작품으로 최근 발굴, 복원되었다(관련 기사 <씨네21> 744호). <악야>를 찾았다! 그 정도의 희열 가득한 낭보는 아니더라도 16mm 네거티브가 크게 손상되지 않은 채 1955년 작품이 돌아왔다니 반갑고 반갑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야기해온 바이지만, <아리랑>이나 <임자 없는 나룻배> 같은 조선영화, 한국영화의 정전(canon), 물리적 필름 그 실체 자체가 사라진 상태에서 내 세대와 이후 세대는 한국영화사, 조선영화사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들어와보면 <아리랑>과 같은 정전은 소문으로 떠들고 전설로 공중부양하고 있다. 리얼리즘과 민족주의가 결합된 채. 누구는 이것을 사라진 영웅으로 볼 것이며 또 누군가는 이것을 유령, 망령으로 간주할 것이다.

사라진 경전을 최고의 경전으로 가지고 있는 내셔널한 영화는 이렇게 한편으로는 유령(phantom)에 사로잡히는 일이다. 비판적인 글쓰기는 이 유령의 아우라에서 걸어나와 이렇게 실체가 사라진 채 정전화된 팬텀 시네마를 기억의 장으로 번역해내는 것일 것이다. 기억의 장은 역동의 장이다. 무엇을 기억하고 또 무엇을 망각할 것인가는 역사 기술의 권력의 장이면서 동시에 투쟁의 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팬텀 시네마에서 기억, 메모리 시네마로 나아가는 글쓰기 여정에서 56살 먹은 영화가 우리에게 도착했다. 기별없이 갑작스레. <꿈>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어떤 미열, 미혹 같은 것에 사로잡힌 것으로 보인다. 문학에서는 원작 이광수의 <꿈>이 작가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한 불안을 비치고 있다고 보지만 5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를 그렇게 읽는 것은 가당치 않을 듯싶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보인다. 영화의 이상한 열기는 오히려 이후 신상옥의 <지옥화>에서 감지되는 한국전쟁 이후 욕망과 금기, 금지의 질주와 봉쇄라는 사회적 불균형에서 나오는 것 같다.

목이 날아가는 전율과 각성의 순간

카메라는 순식간에 야반도주에 나선 젊은 그들, 조신(황남)과 달례(최은희) 앞에 놓인 자연을 경이이자 장애물로 파노라믹하게 잡아낸다. 아마도 전쟁 이후 파괴되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은 새로운 영화적 발견의 대상이었을 터, <꿈>에서 카메라가 오히려 탐닉하는 것은 욕망의 장소로서의 여성의 몸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러한 자연이다. 도망간 달례가 선녀같이 옷을 벗어놓고 개울에서 목욕을 즐길 때도 달례 역의 최은희는 거의 반나신 상태로 물에서 나오고, 그것을 엿보고 그녀를 탐하는 남자의 시선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에서 그렇게 큰 몫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품어주는 자연이 전쟁에서도 다치지 않은 풍광과 함께 영화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원작에서는 태백산으로 설정되어 있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조신과 달례의 아이를 그리지 않는 등 더 미니멀하게 구조화한다.

최은희의 반나신과 함께 영화의 급작스러운 선회는 스님 조신의 성격이다. 조신이 주지 스님에게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 달례임을 말하자, 주지 스님은 그에게 처방을 준다. 그 처방이 구성해낸 미장센 안에서 달례는 조신에게 다가와 먼저 고백을 한다. 이후 이들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절벽을 기어오르고 너구리 토굴로 숨어들며 야반도주를 한다. 살림을 차린 곳으로 자신과 같은 절에 있는 동료 승이 찾아오자 조신은 낫을 들어 서슴없이 그를 죽이고 시체를 유기한다. 그는 죄책감도 없으며 오히려 나무라는 달례를 때리기까지 한다. 이어 집에서 기르는 개가 방해가 되자 또 서슴없이 낫을 든다. 동료 승려를 죽이기 전에도 예의 반라로 목욕하고 나오던 달례를 범하려던 남자를 돌멩이를 들어 쳐버렸다. 연쇄살인범 수위의 재현이다.

스님에서 흉포한 성격으로 변하는 조신은 영화 전개상으로는 크게 설득력이 없지만 원형적 욕망의 인물로 보자면 흥미롭다. 반면 달례 역은 지루함을 준다. 그녀는 ‘색, 계’인데 <지옥화>의 아찔한 팜므파탈이 아니다. 먼저 조신을 유혹하고 도망가지만 먼저 죽는다. 영화적 핵은 조신이 달례의 정혼자인 화랑 모례에게 참수당하는 장면이다. 정확한 참수, 거세는 조신이 맞는 정점이다. 화랑과 승려의 대결. 빼앗긴 남자와 빼앗은 남자의 대결. 욕망의 대상인 여자는 이미 옆에 죽어 있다. 조신의 머리가 모례의 칼에 날아가는 이 장면은 죽음이면서 동시에 미몽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나비인가 인간인가라는 호접몽의 경계성과는 달리. 이 영화는 목이 날아가는 순간과 깨닫는 순간을 합치시킨다. 전율과 각성의 순간인 것이다.

흉포한 남자를 길들이는 영화로구나

영화는 시작할 때 석가여래 부처상을 클로즈업하는데, 영화의 압도적인 마스터 시선은 바로 이 부처의 시선이다, 그리고 주지승이 이 시선의 작은 대리자다. 부처가 조망하려는 세계 안에서 조신은 주지승의 재가 아래 꿈을 꾸고 그 꿈에서 세속의 욕정이 가져올 수 있는 쾌락과 재앙이 다발한다. 참수되는 순간 가장 큰 각성, 자각, 깨달음이 온다. 그리고 그 참수/깨달음이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화랑에 의해 집행된다는 데서 <꿈>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예기치 못하게 신분사회의 위계질서 속에 묶는다. 부처와 주지 스님과 화랑과 일개 승려가 위계적인 패러다임을 이루고, 조신은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 처지를 찾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종교적 깨달음을 가면으로 사용한 기괴한 복종의 영화다. 흉포한 남자를 길들이는 영화다. 그런 면에서 문학쪽에서 읽은 대로 제국 일본의 권력을 깨닫고 친일하는 이광수의 무의식이 <꿈>의 구조적 격자를 지탱하고 있다고 우회해서 읽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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