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스릴러를 표방한 <베스트셀러>는 꽤 영리하게 장르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영화다. 익숙한 장르의 규칙을 따르는 듯하다가도 예측 가능한 지점들을 교묘하게 피해가기도 하면서 감정을 쌓아나간다. 엄정화는 물론 그녀를 압박하는 여러 남자 캐릭터들에 이르기까지 노련한 배우들의 호흡도 좋다. <령>(2004)과 <흡혈형사 나도열>(2006), 그리고 정윤철 감독의 <좋지 아니한가>(2007)와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던 이정호 감독은 인상적인 데뷔작을 들고 지금 막 관객과 만날 채비를 하고 있다.
-언제부터 준비한 작품인가.
=2006년 겨울 하반기에 쓰기 시작해서 <좋지 아니한가> 끝나고 좀더 정리했다. 그러다 정윤철 감독님과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를 한편 더 하고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원래부터 스릴러, 호러 장르를 좋아했다.
-데뷔작을 만드는 각오나 태도는 어떠했나.
=기자시사회 이틀 전날 밤까지 편집 더 하면 안되냐고 버티고, 계속 DI실로 전화까지 해서 미친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들었다. (웃음) 요즘 여느 신인감독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 만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크게 생각했던 건 두 가지다. 먼저 ‘표절’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거기에 함몰되면 안되지만, 반드시 거기에 책임도 져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관련 자료나 사례도 꼼꼼히 챙기면서 이야기를 구상했다. 두 번째로는 너무 힘을 주지 말자는 거였다. 그토록 갈구하던 데뷔작이라 호러영화적인 느낌으로 괜히 분위기도 잡고 싶고, 별장 공간을 무대로 멋진 촬영기법을 구사해보고 싶은 생각도 굴뚝같았지만 이야기를 물 흐르듯이 흘러가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봤다. 괜한 욕심을 버리자는 생각이었다.
-이 장르의 마니아라면 좋아하는 감독이나 작품, 작가가 누군가.
=추리소설을 무척 좋아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나 딘 쿤츠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영화는 고전으로 가자면 이 장르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히치콕의 <현기증>(1958)을 최고로 생각하고 <싸이코>(1960)도 좋아한다. 존 프랑켄하이머의 <세컨즈>(1966)도 좋고. <베스트셀러>를 만들며 참고가 된 작품들이라면 로버트 저메키스의 <왓 라이즈 비니스>(2000)나 <시크릿 윈도우>(2004), <숨바꼭질>(2005) 같은 영화들이다. 구성 면에서 <왓 라이즈 비니스>를 가장 많이 떠올린 것 같은데 전반부에 맥거핀 활용이 많고 장르의 법칙에서 벗어난 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면서도 꽤 색다른 시도가 엿보인다.
=장르를 ‘실험’했다고 얘기한 분도 계셨는데 그러려면 한참 먼 것 같고(웃음), 나로서는 ‘모험’을 걸어보고 싶었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굵직하게 나뉘는 것도 제법 지적을 받았는데, 일반적인 구조를 피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게 더 간결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난 그게 별로 재미가 없었다. 스릴러, 호러 장르를 만들면서 10분 정도만 보면 다 파악되는 그런 방식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친절한 드라마투르기가 아닐지라도 그렇게 내부적으로 ‘갭’이 존재하는 게 매력적일 수도 있다고 봤다.
-주·조연배우들의 연기 호흡이 좋다. 특별히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결과인가.
=나는 마당에서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윤곽만 그려놓고 배우들이 그 속에서 알아서 논 거다. 엄정화씨는 물론 남자배우들까지 정말 본능적으로 자신의 연기를 뽑아내는 선수들이다. 촬영 전에 정윤철 감독님하고 통화한 적이 있는데 ‘감독은 성가대 지휘자와 같은 것이어서 각자 목소리의 장점을 조율할 수는 있으되, 도저히 안 나오는 소리를 강제로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거’라 하셨다. 색다른 설정과 상황을 만들되 그게 무리하거나 지나치지 않게 보여야 했는데 그 경계를 잘 탄 것 같고, 신인감독으로서 정말 행복하게 즐긴 경우다.
-앞으로 계획 중인 작품이나 이야기가 있다면.
=M. 나이트 샤말란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열렬한 팬인데 초자연적인 현상에 관심이 많다. 기억의 오류라든가 자신이 믿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틀어지는 상황 같은 것들을 좋아한다. 앞으로도 계속 호러, 스릴러 장르로 파고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