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일정한 리듬을 부여한 채 앵글에 담아내면 그대로 홀연한 현상이 되는 것이 일본영화의 특징이다. <공기인형> 역시 그러하다. 고독한 단독자들의 황량한 공간인 도시를 더딘 리듬으로 패닝하고 여기에 비올라로 백뮤직을 깔면 세계가 눈물이 아릴 만큼 아름다워지는 이미지의 마술. 에이미 만의 매혹적 목소리를 깐 <매그놀리아>의 장면에서처럼 고독과 도시와 음악은 잘 어울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공기인형>은 그의 어떠한 전작들보다도 클로즈업을 많이 사용한 영화다. 어떠한 의미에서 이 영화는 노조미(배두나)의 얼굴에 대한 영화기도 하다. 그동안 즐겨 사용한 세미다큐멘터리 방식과 가장 거리가 먼 달콤한 판타지로 촬영되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공기인형은 비록 비닐 외피를 지니고 있지만 이 외피는 공기를 겨우 덮고 있을 뿐인 얇은 막에 불과하다. 노조미는 부재에 부여된 형식이다. 그 안이 텅 비었다는 것, 이것이 아마도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점일 것이다. 순수한 부재(공기인형)야말로 달콤한 도시 동화처럼 보이는 <공기인형>에 날인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고유의 서명이기 때문이다.
‘일본인임’에 그들의 대단한 자기 연민
설정은 이러하다. 섹스를 위해 제작된 노조미는 공기인형이다. 어느 날 노조미는 마음을 갖게 되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비디오 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동네를 오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거식증 환자, 아니메 오타쿠, 애인 잃은 남자, 나이 먹은 여자, 늙은 할아버지 등 노조미가 만나는 사람들은 소통의 부재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노조미는 그들에게 자신들도 실은 텅 비어 있다는 고백을 듣는다. 노조미의 말은 직설적이지만 사람들의 말은 수사적이다. 노조미는 레토릭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영화의 비극 역시 이 레토릭의 소통 부재(공기구멍이라는 은유)에서 온다.
만화다운 설정(실제 원작이 <공기소녀>라는 단편만화다)과 따뜻한 영상은 영화의 메시지가 엔딩에서처럼 희망의 씨앗을 공기로 날려보내는 것에 있음을 보여준다. 피상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각박한 도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품는 따뜻한 이야기다. 동화적이고도 환상적인 분위기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잔혹하게 한번 찢기는데, 결말에서는 비극 속에 희망을 내장해 이를 봉합시켰다. 사람들은 좀처럼 소통하거나 변화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인간과 노조미의 차이다. 노조미는 다가가고, 대화하고, 이해하려 하며 이를 반복하여 학습한다. 그리고 노조미는 오로지 버려질 때에, 마지막 남은 공기를 세상에 불어 꽃씨를 날릴 때에만 일종의 미래에 대한 전조가 될 수 있다.
일본인들이 이른바 ‘고코로’(마음)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묘해서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대체로 일본 대중문화에서 고코로라는 것을 나와 세계의 매개로 해석한다. 나와 마음과 세계, 즉 와타시와 고코로와 세카이가 만드는 폐쇄회로는 일본 대중문화가 지닌 집요한 매혹인 동시에 지루한 폐쇄공간이기도 하다. 도대체 세계라는 것이 너무도 내 마음에 섬세하게 좌우되기 때문에 좀더 넓은 관계나 투명한 세계가 담지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세 가지를 제외하고 어떻게 오늘의 일본 문화를 말할 수 있을까. 20세기 말에 우리는 이와이 순지와 안노 히데아키에게서 지독히 반복되던 이 폐쇄성을 경험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공기인형>의 설정 역시 이 고코로에서 시작한다. 섹스 토이인 공기인형에게 고코로가 생겼다는 것이 이 영화의 설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영화는 잘 봉합된, 적절히 센티멘털하고 적절히 사변적이며 적절히 환상적인 도시 동화이자 20세기 일본 청춘물의 반복적 클리셰에 불과하다.
노조미는 사라짐으로써, 마지막 남겨진 숨을 불어내어 꽃씨를 날림으로써, 사람들에게 희망의 전언을 돌린다. 외롭게 혼자 살아가던 남은 사람들은 마치 노조미를 통해 연관되는 유사가족처럼 보인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일본인임’에 대단한 자기 연민을 보이는 것 같다. 이 영화 역시 그러한 일본적 연민의 나르시시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생은 괴롭고 우리는 쓸쓸하다는 합창을 부르는 듯한 이러한 태도를 보면 한편으로는 가슴이 먹먹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저리 엄살인가 싶다. 일견 이 방식엔 신물이 난다.
유사가족이 낳은 유가족
신물이 나는 것과 다른 의미에서 이 영화는 불편하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꺼림칙했던 것은 등장하는 배우들이 너무도 해맑은 CF 스타 같은 외모를 지녔다는 것이었다. 아침드라마에서처럼 이러한 아이의 죽음은 쉽게 최루성 통속의 덫에 빠질 수 있다. <공기인형> 역시 마찬가지다. 일상의 소소한 서정성을 예쁜 환상으로 포장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다. 표현을 어찌해야 정확할지는 모르겠지만, 리얼리즘이 지닌 실제 현실의 외설성을 유용하지 않기 위하여 역으로 인형의 집과 같은 가공성을 차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감독은 현실의 내밀함을 응시하는 것의 외설성을 인식하고 의도적으로 허구적 재현의 방식을 사용한다. 이는 재현의 윤리에 관한 문제다. 키에슬로프스키가 카메라가 사람들의 내밀함을 응시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에 대해 언급한 표현인 ‘진짜 눈물의 공포’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진짜 눈물보다 거짓 눈물인 글리세린에서 영화의 윤리를 발견했고 그래서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전환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스스로도 다큐멘터리로 영상 작업을 시작한 전력이 있다는 점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이력과 유사한 이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첫 장편영화인 <환상의 빛>에서부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죽음과 부재의 이미지에 집착해왔다. <디스턴스>에서는 죽은 자들의 유가족이 모였고,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죽은 형이 가족들을 모았다. 죽음에 형상을 부여하고 공기를 불어넣은 것이 <공기인형>의 노조미의 경우다. 노조미는 사람들의 고독을 파고들지만 궁극적으로 이 모두를 죽음 뒤에 남겨진 자들인 유족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노년, 중년, 청년층에 고루 분포된 각각의 독신자들은 노조미가 근무한 비디오 가게를 중심으로 한 생활권에서 살아간다. 이들은 노조미의 죽음으로 하나의 희망을 얻지만, 또한 어떠한 절실함을 상실하고 만다. 영화의 표면은 이들을 유사가족이라고 보여주지만, 영화의 무의식에서 이들은 궁극적인 유가족이다.
이것은 인형의 인간 편력이다
장르적으로 판타지인 <공기인형>은 어쩌면 <원더풀 라이프>와 가장 밀접한 영화일 것 같다. 장르적으로도 그렇지만 인간 군상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원더풀 라이프>는 죽은 자들이 임시로 머무는 림보라는 공간에서 일생 동안 가장 행복한 순간을 영화로 찍어주는 것을 모티브로 삼았다. 형식적으로 다큐멘터리에 가장 가까운 영화로 인생과 영화의 존재론적 연관성을 완곡하게 형식화했다. 한편 <공기인형>에서 노조미가 일을 통해 처음 배우는 언어는 ‘필름’이다. 투명한 공기인형인 노조미에게는 사람들의 욕망이 투사된다. 마찬가지로 투명한 필름에 빛을 비추면 관객의 판타지를 투사하는 영화가 된다. 공기로 가득 찬 노조미는 영화의 현현이며, <공기인형>은 영화의 실존에 대한 메타 영화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로라 멀미의 금언, 즉 영화란 1초에 24번의 죽음이라는 표현과 맞닿아 있다. 삶/의미는 죽음의 형식을 빌린 노조미를 딛고 지속된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카사노바>에서 말년의 카사노바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동인형과의 정사를 잊지 못한다. <공기인형>은 펠리니 버전의 네거티브다. 한 남자의 애정 편력이 아니라, 인형의 인간 편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만남의 반복이 궁극적으로 섹스/관계의 불가능성을 의미화한다는 그 형식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