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인형>에 대해 가장 동의할 수 있는 평론은 송효정이 썼다.(749호, 영화의 실존을 공기인형에 담아). 송효정은 <공기인형>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일반적인 평과 달리 이 영화에서 불편한 요소들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나는 다만 송효정이 글의 끄트머리에 제기한 <공기인형>의 메타 영화적 성격에 대해, 그러니까 “공기로 가득 찬 노조미(배두나)는 영화의 현현”임을 지적한 것에 대해 좀더 부연하고 싶다. 내가 <공기인형>에서 가장 흥미롭게 느꼈던 것 역시 (송효정과는 다른 맥락에서) 영화의 메타포로서 노조미의 존재성이다. 그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중 <공기인형>이 가장 앙상한 영화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와 연관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난 많은 평자들의 지적만큼 이 영화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의 충만함이 부재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인물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남겨지곤 한다’. 그것이 어떠한 사건이었든 간에, 그의 인물들은 늘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부재를 경험한다. 상처받기 쉬운 인물들. 애써 태연한 척한다 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인물들은 늘 상처와 함께 남겨지고, 그것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며 살아간다. 그의 영화적 관심은 죽음(또는 누군가의 부재)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남긴 상처를 떠안고 살아가는 남겨진 자들의 분투기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묻혀있던 그 상처가 갑작스럽게 돌출될 때이다. 그의 데뷔작이었던 <환상의 빛>에서 죽은 남편을 잊고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던 부인이 계단을 걸레질하다 갑자기 그 동작이 응고되는 정지의 순간에, 그리고 <걸어도 걸어도>에서 인자한 웃음 대신 매정하게 복수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차갑고도 음산한 뒷모습 속에, 그 상처는 불현듯 솟아오른다.
하지만 <공기인형>에는 이러한 순간이 부재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텅 빈 인간’의 물질적 알레고리로서 노조미를 제시한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의 영화에서는 상처로 얼룩진 인간의 마음은 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영화가 적게 보여주고 적게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늘 풍성한 영화적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그 상처’로 인해 카메라와 대상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보이지 않는 괴물과 싸우며 영화를 풍성하게 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매력은, 그리고 <걸어도 걸어도>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정점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둘러쳐진 풍성한 영화의 분위기 말이다.
<공기인형>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노조미의 형상을 통해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규정해왔던 것을 가시적 영역의 물질적 재현으로 이끌어냈고, 그것은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공기인형>이 공기인형의 눈에 비친 인간 세상에 대한 영화임을 상기해보자. 늙는 것이 두려운 노처녀, 홀로 어린 딸을 키우는 젊은 아빠, 세상을 거부하는 거식증 환자, 공원 벤치에서 하루를 보내는 할아버지 등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타인과 관계 맺기가 두려워 차라리 외로움을 선택한 자들이다. 노조미의 눈에 그들은 연민의 대상으로 머물 뿐, 그 어떤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영화에서 제시하듯이, 그들이 텅 비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텅 빈 마음에 반응하며 해야 할 일을 노조미가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작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상처와 싸워나간다. 그들은 애써 태연한 척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저주하고 상처주기도 하며, 슬픔을 폭발하기도 했지만, <공기인형>의 인물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시적 영역에서) ‘그들을 대신하는’ 노조미가 그렇게 할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듯이, <공기인형>이 인간이 되어가는 노조미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노조미는 인간을 대신하는 완전한 대체물이 되어갈 뿐이다. 그럴수록 인간은….
영화가 현실을 대체하는구나
노조미가 인간의 완전한 대체물이 되어갈수록 인간은 더욱 텅 비어간다, 라고 말한다면, 혹자는 <공기인형>의 엔딩을 근거로 이를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엔딩이야말로 노조미가 그 이름처럼 하나의 ‘희망’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냐고. 실제로 노조미의 몸에서 빠져나간 공기는 꽃씨를 날려 한번도 만난 적 없던 한 여인을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한다. 그녀는 세상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것은 노조미의 첫 대사이기도 했다. <공기인형>은 그렇게 ‘전이된 환상’을 구축한다.
영화가 반쯤 접힐 때쯤 매력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DVD 대여점에서 일하던 노조미는 사고로 상처가 나고 몸에서 공기가 빠져나간다. 그런 노조미를 발견한 준이치(아라타)는 상처 부위에 테이프를 붙인 뒤 그녀의 몸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준이치의 숨결과 함께 축 처져 있던 노조미의 고무 몸이 조금씩 부풀어오르고, 그녀의 하반신을 비추던 카메라는 오른쪽에 위치한 노조미의 얼굴로 천천히 이동한다. 노조미의 얼굴에 에로스적 충만감이 감돌 무렵 영화는 ‘커팅’해 그녀의 하반신쪽으로 다시 관객의 시선을 옮긴다. 이때 화면에 보이는 것은 인형에서 인간으로 변화된 노조미의 몸인데, 즉 이 편집은 단순히 ‘두숏-필름’의 물리적 결합이 아닌, 고무 몸을 인간의 몸으로 변형하는 영화적 마술 그 자체다. 텅 빈 채 죽어 있던 한 여인에게 삶의 생기를 불어넣는 <공기인형>의 엔딩은 이러한 영화적 마술이 영화 자체에 머물지 않고 영화와 관객간의 관계 속에서 이뤄졌으면 하는 희망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공기인형>이 영화에 대한 영화로서 읽힐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노조미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알아간다. 그녀에게 영화는 자신이 모르는 세상을 비추는 요술 거울이다. DVD 대여점이 극장의 대체물인 것처럼, 소녀가 선물로 받는 케이크가 엄마의 대체물인 것처럼, 무엇보다 노조미가 남성의 성적 욕구를 위한 여성의 대체물인 것처럼, 영화는 현실의 대체물이다. 물론 앙드레 바쟁은 영화와 현실의 존재론적 등가성을 주장했고 그것이 영화적 발전의 최종 목표지점인 양 말했지만, 영화는 현실의 시뮬라크르이자 대체물에 가깝다. 여기서 영화가 현실의 대체물이라는 것은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현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함으로써, 현실의 의무를 덜어주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마치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의 과장된 박수와 웃음이 웃어야 하는 우리를 대신해주는 것처럼…, 내 비디오테크가 한국영화 걸작선을 매주 녹화하며 나보다 더 많은 영화를 시청하는 것처럼…, 노조미가 인간을 대신해 자신의 마음을 채워나가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와 현실간의 비대칭적 관계를 잘 알고 있다. 노조미가 자신이 경험했던 에로스적 충만감을 준이치에게 되돌려주려 했을 때, 그 결과는 준이치의 죽음이다. 순수한 감정이 초래한 불행. 그것이 대체물로서의 영화가 갖는 한계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해결책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와 현실간의 전이된 환상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노조미가 메타영화로서 위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조미-영화’가 현실의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대체하는 ‘전이된 환상’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이다(송효정의 표현을 빌린다면, 노조미를 둘러싼 자들을 유사가족이 아닌 여전히 유가족으로 남겨두는 사태). 그것이 <아무도 모른다>와 같은 (연민이 아닌) 윤리적 태도 대신 사족 같은 엔딩이 필요한 이유이고, <공기인형>이 현실에 대한 페티시즘적 대체물에 머무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되는 마지막 질문. ‘우리 앞에 놓인 현재의 영화들’은 충분히 그런 전이된 환상으로서 기능하고 있지 않은가? 혹은 우리는 그렇게 영화를 즐기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