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은 꼭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찍어주세요.” 배우 양은용을 만나기 전, 사진기자에게 간곡하게 요청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특별히 예뻐 보여서가 아니다. 웃는 표정만 따로 소장하려는 목적은 더욱 아니다. 세상에 흩날려 있는 그녀의 사진 중에서‘밝은 미소’가 담긴 사진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그녀가 맡은 역할 역시 그렇다. 과거의 고통과 남자에게 상처를 받은 시나리오작가(<라라 선샤인>), 옛 남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내부순환선>), 의도치 않게 두 남자에게 얽히는 여자(<팔월의 일요일들>) 등, 다수의 독립영화에서 양은용이 연기한 캐릭터는 늘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막상 어쩌지는 못하는 여성들이었다. 한마디로 외로운 여자였다. 이것이 양은용에 대한 첫인상이다.
동시에 우리가 그녀를 만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배우 양은용 하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독립영화의 심은하’, ‘탤런트 출신의 독립영화 배우’, ‘매니저 없이 혼자서 일처리하는 배우’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 정작 어떤 배우인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인터뷰와 다르게 묻고 싶었다. 당신과 함께 작업했던 감독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당신으로부터 불명확하고, 어두운 면을 끄집어냈다.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당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연기, 현실을 벗어나는 수단
<경>에서 양은용이 연기한 정경은 그간 양은용이 맡은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극중 정경은 집을 나간 동생 정후경을 찾아 길을 떠돈다. 마치 물속을 부유하듯 타자로서만 존재하는 휴게소를 돌아다니며. 언어로서 표현하지는 않지만 정경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동생은 어디로 갔을까’, ‘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돌아다녀야 할까’ 등. 언어나 표정 하나없이 양은용은 불안하고, 슬프고, 금방이라도 깨질 것만 같은 균열들을 그냥 보여준다. 그것이 연기라기보다는 본연의 모습 중 일부분이 드러나는 묘한 순간이랄까.
극중에서 수시로 질문하는 정경과 달리 양은용은 현장에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느낀 것은 정경은 절실한 여자라는 거다. 이런 인물은 그냥 느끼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는 성격상 캐릭터를 완전히 분석하고 연기에 임하는 그녀에게 큰 변화였다. 완벽하게 하려고 할수록 스스로를 가둬놓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감독이라는 큰 흐름에 몸을 맡기고 나머지는 촬영, 편집 등 기술적인 부분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경>을 통해 깨달았다. 연기가 약간 어색해도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오랫동안 몸으로 익힌 연기 방법만 바뀐 게 아니다. <경>은 그간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사실 정신병적으로 동생을 쫓아다니는 정경은 배우 양은용의 삶과 맞닿아 있었다. “드라마, 영화, 연극 등, 한편 할 때마다 의미를 부여했다. 살면서 하는 행동 모두 그랬다. 안 그러면 헛 산 것 같고. 그래야 걸어갈 길이 생긴다고 믿었으니까. 그만큼 허덕이며 살아왔다.”
양은용의 삶은 늘 혼자였다.“집안이 불우했다. 화장실이 몇 십 미터 밖의 산 위에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다보니 식구들이 서로를 챙길 수가 없었다. 자기 몫은 알아서 살아야 했다.” 삶이 고될수록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강렬했다. 어린 시절 책에 빠져 살았던 것도 그래서다. “당시 헤세, 카뮈, 카프카의 소설들에 파묻혀 살았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그냥 읽었다. 책을 읽으면 그 순간이나마 현실을 잊고 책 속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어서 좋았기 때문이다. 책이 아니었다면 속세를 떠났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연기를 선택한 것은 예정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인물에 몰입하는 순간의 희열감은 다른 배우들의 성취감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잠깐이나마 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인 셈이다. “성격상 연기가 맞지 않는” 그녀가 아이러니하게도 배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녀만의 밝은 미래
<경>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는 달리 양은용은 여전히 바쁘게 살고 있다. <비밀애>에서 편집장을 연기했고, 여러 단편영화에 출연했다. 또 연극 워크숍에서 연출자로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개인 교습으로 학생들에게 연기도 가르치고 있다. 혹시 스스로를 혹사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삶을 더 넓은 시선으로 보게 됐다.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아직까지 보여준 모습보다 그렇지 않은 모습이 더 많기에, 언젠가는 그녀의 밝은 미소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