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가부장적 결혼의 권위에 하이킥을
2010-05-06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집 나온 남자들>을 성관계가 나오지 않는 은폐된 퀴어물로 보니

아내가 집 나간 줄도 모르고 장난처럼 이혼을 선언한 남자가 후배와 함께 아내를 찾아다니는 좌충우돌의 코미디 <집 나온 남자들>은 일견 ‘남자들끼리 놀고 자빠진’ 상황을 그린 버디무비이거나 ‘그녀를 하나도 모르고 있었네’를 깨닫는 로드무비 성장담쯤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은 이성애와 결혼의 가치를 부인하는 은폐된 퀴어영화로, 성 정치적 전복성을 지닌 텍스트이다. 이는 문제적 엔딩에 국한된 의미를 침소봉대한 결과가 아니다. 엔딩은 느닷없이 주어진 반전이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의 논리적 귀결이자 거울상이다.

남자와 남자의 곡진한 연대

‘전화 안 받기’ 놀이를 하던 후배가 일년 만의 선배 전화를 받고, 새벽을 달려 강릉까지 함께 간다. 선배는 이혼을 결심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 동행하기” 위해 그를 불렀다. 둘은 바닷가에서 술 마시고, 여자 끼고 놀다 한 침대에서 잠들고, 부부관계 상담하다 며칠씩 같이 마누라를 찾아다닌다. 더구나 한 여자의 옛 애인이자 현재의 남편인 두 남자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친구? 반말하면 때려서 상하 구분하는 선후배? XX동서?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해변의 여인> 등 홍상수 영화나 이를 계승한 <나는 곤경에 빠졌다>에도 선후배이자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두 남자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집 나온 남자들>도 그 아류인가? 아니다. 위 영화의 남자들에 비해 <집 나온 남자들>의 두 남자는 애증과 경쟁의 갈등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아내를 찾는 여정은 그리 절박해 보이지도 않고, 둘은 아내 찾기를 빌미로 모처럼 여행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간에 합류한 처남과의 관계도 정겹다. 후배는 며칠간 동행했을 뿐인 유곽과 헤어질 때 진심으로 서운해한다. 심지어 엔딩 쿠키엔 더이상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이들이 유곽에게 면회를 가서 낄낄거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라디오 스타>나 <즐거운 인생>처럼, 여성을 배제하고 남자들끼리 동성사회적 유토피아를 그린 영화인가? 아니다. 이들은 “꼴리는 대로 가입했다 탈퇴하는” 동호회가 아니다. 한 여자의 옛 애인과 남편과 오빠로, 그녀를 매개로 한 남자들의 관계이다. <집 나온 남자들>은 여성의 교환을 통해 매개된 남성간의 불가사의한 유대를 보여준다. 일찍이 <질투는 나의 힘>이 이성애 삼각관계 안에 은폐된 남성간의 선망과 동일시의 욕망을 응시하며, 애인과 딸 등의 교환을 통해 사적 결속을 다지는 남성 동성사회의 비밀을 묘파한 바 있다. <집 나온 남자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여성을 매개로 한 동성사회적 욕망을 누설하며, 이성애 규범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게일 루빈은 레비-스트로스의 연구를 토대로 근친상간 금기와 ‘여성의 교환’이 사회계약의 원형임을 밝혔다. 누이의 교환을 통해 함께 사냥을 할 처남-매부 관계를 맺고, 족외혼을 통해 집단간 동맹을 맺는 것이다. 나아가 이브 세지윅은 이성애 관계는 동성간 리비도를 가리는 가면이며, 이성애적 사회거래망은 남자간의 동성사회적 연속체임을 밝힌다. 이때 동성사회적 욕망은 동성애적 욕망과 혼동되지 않기 위해 강력한 동성애혐오증을 수반한다. <라디오 스타>의 남자들 역시 동성애로 오인되지 않기 위한 부정의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나 ‘집 나온 남자들’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웃고 즐긴다. 팬티만 입고 한이불 속에서 자고, 팬티를 집어던지며 시시덕대면서도 동성애적 긴장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초딩 트리오’라는 홍보문구처럼, 이들은 초등학생, 그러니까 성적 무관심기로 동성 또래집단을 형성하는 6∼12살의 학동기 소년처럼 행동한다. 흥신소 어깨들은 ‘처남-매부’ 사이라는 말에, 이들을 한패로 보고 때리지만 사실 초면이었다. 그러나 이내 주먹질하고, 함께 경찰서 가고, 술집 가서 여자 꾀고, 같이 도배 일을 하고 나니 ‘절친’이 되고야 만다. 그렇다면 이들 사이를 맺어주는 신비한 매개물인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남성 동성사회적 유대가 강조할수록 여성의 존재는 미미해진다. 그녀들은 자발적인 거래대상이 되거나, 이성애적 거래망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느낀다. 누구의 딸, 누구의 누이, 누구의 아내로 자신을 인식한다. 때로 그녀들은 남성들 사이에 회자되는 존재로만 의미를 지니며, 따라서 남성들에 의한 ‘재현’이거나, ‘증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수많은 재현물에서 여성은 ‘알 수 없는 존재’로 표상된다.

그녀 역시 옛 애인, 남편, 오빠 사이에서 신기루처럼 회자된다. 그러나 여성들 사이에서 실체의 흔적이 감지된다. 마담은 그녀를 ‘착한 루비’라고 부른다. 그녀는 자살 시도 직전에 마담에게 전화할 만큼 내면을 공유했다. 마담은 마침 후배에게 남자를 뺏겨 “여자들이 죽으려는 이유는 모두 남자 때문”이라며 울부짖지만, 어쩐지 이곳의 오리엔탈리즘 인테리어나 아이를 안고 온 여자 손님은 레즈비언적 공간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곳은 밤엔 남자들의 이성애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술집이지만, 낮엔 이성애적 상처를 공유한 여자들이 모인 점집이다. 네트워크 마케팅의 여자는 그녀를 ‘순수한 애’라 말한다. 조직에 끌어들여 대신 빚을 지게 했지만 원망하지 않았다며, 그녀에게 돈을 전해주라 건넨다.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그녀를 찾은 오빠보다 더 신실한 관계로 보인다. 어릴 때부터 친구인 홍금선은 오빠의 처이기도 하지만, 그녀들 사이에 오빠이자 남편의 존재는 지워져 있다. 죽음을 앞둔 홍금선 모녀와 여행을 하며, 그녀의 장례를 치르면서도 오빠에겐 연락하지 않는다. 그녀는 시댁의 돈을 훔치는 행위를 통해 가부장적 결혼의 법을 파괴하며, 친구의 딸을 자신의 딸로 삼음으로써 이성애적 규범을 넘어 ‘레즈비언 연속체’를 구성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야 그녀를 보여준다. 프레임 속에 보이지는 않지만 추론 가능한 공간인 ‘탈공간’에 그녀가 존재했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영화의 묘사는 판타지적인데, 이는 감독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재현한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래 페미니즘 주체가 젠더화되는 공간의 모순성 때문이기도 하다.

모두가 집을 나와 버려진 집

영화의 교훈을 ‘그녀를 하나도 모르고 있었네’쯤으로 여기려면, 적어도 그녀를 안다고 착각할 만한 최소한의 정상성이 확보돼야 한다. 그러나 이혼 선언으로 시작한 영화는 이들이 어떻게 사귀고, 어떻게 결혼했으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추론할 근거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당시 3년간 연애하던 동민은 자살 시도나 네트워크 마케팅 사실을 전혀 몰랐고, 2000년부터 연애하다가 3년간 같이 산 남편은 과거는 고사하고 이혼 선언에 앞서 홍금선과 여행한 며칠간의 부재도 알지 못했다. 남편 역시 선언 이전에 이미 집에 안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두 사람 모두 집을 나온 상태로 이혼 선언이나 마누라 찾기도 명분에 불과한 뒷북이었다. 이로써 이들의 결혼은 풍문처럼 형해화되고, 결혼제도 자체가 껍데기에 불과한 허구임이 폭로된다. 집 나간 여자 찾는 남자들을 그린 영화 제목이 “집 ‘나간’ 여자”도 아니고, “집 ‘나간’ 남자들”도 아니고, “집 ‘나온’ 남자들”임에 유의하자. 여기서 집은 돌아가야 할 근거지가 아니다. 3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 1명의 아이, 그리고 경찰의 아내까지 모두 집을 ‘나온’ 이 영화에서 제 집에 있는 사람은 시부모와 큰아버지뿐이다. 이들은 모두 부모세대이자 재산가이다. 영화에서 집은 부모들의 공간이며, 부모는 유산(遺産)으로 의미화된다.

영화는 연애와 결혼 등 이성애적 관계를 허깨비처럼 대하면서 남녀 모두 동성사회적 관계에서 훨씬 행복하게 그린다. 영화는 여성이 매개된 남성 동성사회적 관계를 동성애적 금기 없이 천진난만하게 보여주며, 이면에 존재하는 여성주체를 그린다. 그녀들은 정신적, 물질적 어려움을 나누며 애도와 보살핌으로 맺어진 ‘레즈비언 연속체’를 형성한다. 영화는 ‘근본없는 여자를 며느리로 들여 무슨 화를 입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기세등등하게 유세를 부리는 아침드라마 속 시어머니의 공포를 실현시킴으로써, 가부장적 결혼의 권위를 ‘엿먹인다’. 영화는 이성애가 자연스러운 본성이 아니라, 여성의 교환을 통해 친족을 구성하고 결혼을 통해 사유재산을 상속시키려는 강제된 이데올로기임을 폭로한다. <집 나온 남자들>은 여성주의적이라기보다 퀴어적이다. 성관계가 나오지 않는 은폐된 퀴어물로, 동성애의 의미를 에로틱한 관계에 국한하거나 정체성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대안적이고 대항적인 삶의 양식으로 확장시키는 전복적인 영화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