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러셀 크로에게 ‘이번 로빈후드는 타이츠를 신나요?’ 따위의 질문은 하지 마시라. “300년 전에 타이츠가 있을 리 없지 않냐”는 핀잔 정도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 평소 다혈질로 알려진 크로에게 잘못하면 된통 혼날지도 모를 일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과의 다섯 번째 협업. 새롭게 각색된 <로빈후드>는 기존 민담을 깡그리 무시한 신개념 버전이다. 크로의 도전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러셀 크로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로빈후드’로 낙점됐을 때 반응은 한결같았다. ‘악당 역이라면 모를까, 로빈후드가 웬 말이냐!’ 이 비아냥에 관한 한 괜한 트집 잡는다며 러셀을 옹호해줄 사람이 선뜻 나서줄 것 같진 않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로빈후드는 부자라는 권력에 맞서 가난한 자를 돕는 의적임에 분명하다. 즉, 로빈후드를 연기하자면 연기력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덕목은 필수라는 얘기다. 비위에 안 맞으면 호텔 종업원에게 전화기나 집어던지고, 보디가드 귀를 물어뜯는 악행을 행사하는 배우에겐 아니될 말이다. 알다시피 케빈 코스트너가 <로빈 훗>(1991)에 돌입했을 때는 그가 <늑대와 춤을>로 인디언뿐 아니라 대중의 호응까지 업었던 시절이었으며, 숀 코너리가 <로빈과 마리안>(1976)에서 사랑에 빠진 로빈후드를 연기한 때는, 그가 007의 본드로 자유세계 수호라는 막중한 임무를 완수한 뒤였다. 46살, 로빈후드를 연기하기엔 비교적 늦은 크로의 나이도 역시 질타의 대상이 됐다. 앞서 그가 아무리 프로방스에서 개과천선하는 <어느 멋진 순간>의 펀드 매니저를 연기했다고 해도 의적을 맡기기엔 무리가 따라 보였다.
의적인 척하는 악당, 로빈후드
스콧 감독의 생각은 좀 달랐다. 스콧 감독은 남들이 모두 함께 작업하기 꺼려하는 크로의 ‘괴팍한’ 성격을 두고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이라며, 장점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파트너였다. <글래디에이터>를 시작으로 <어느 멋진 순간> <아메리칸 갱스터> <바디 오브 라이즈>까지 4편의 작업을 함께해온 그는 크로를 두고 “가장 완벽한 로빈후드의 현현”이라고 수식했다. 물론 현대에 와서 거의 고착화되다시피 선량한 로빈후드를 떠올리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발언이다. 그보다 아마도 가장 오래된 영어 소설임에 분명한 <로빈후드>가 실체를 알 수 없다는 데서 이 캐스팅의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누구의 해석이냐에 따라 사뭇 달라질 수 있는 민담. 스콧 감독은 기존 로빈후드의 무수한 주석에서 한참 벗어난 새로운 인물로 로빈후드를 재창조한다. 옳지 않은 방법으로 영웅이 된 로빈후드에게 애초 자비를 베푸는 아량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빈후드를 부의 재분배를 위한 선량한 약탈자로 칭하는 대신, 의적인 척하는 악당으로 규정하고 복잡다단한 실체를 공개하는 게 그의 시나리오다. 기존의 로빈후드보다는 <글래디에이터>에서 크로가 연기한 분노에 찬 노예 막시무스를 떠올리는 게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비슷한 예가 될지 모르겠다. 어둡고 폭력적인 아드레날린으로 점철된 <로빈후드>에 대한 크로의 변은 이렇다. “이건 당신 아버지가 보던 로빈후드가 아니다. 더 괜찮은 버전을 만들 생각이 없다면 괜히 시간 투자하고 고생하면서 다시 만들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겠나?”
각오는 남달랐고, 과정은 혹독했다. 그가 벗어던져야 할 것은 기존 로빈후드의 전형적인 차림새로 인식된 타이츠만이 아니었다. 늙다리 로빈후드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다이어트에 돌입한 게 첫 번째 과제였다. 결국 막시무스를 연상시키는 짧은 스포츠 머리로 결정됐지만, 초반엔 머리를 기르는 수고도 감내했다. <바디 오브 라이즈>나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의 가발을 쓰던 때와는 사뭇 달라진 자세다. 로빈후드의 기본기인 궁술 연마도 병행했다. 하루에 화살 200대를 쏜 적도 있는데 이 정도 연습량은 올림픽 선수들의 훈련량에 맞먹는 수준이라고 한다. 전사로 분한 <글래디에이터> 때부터 <신데렐라>의 복서에 이르기까지 늘 완벽한 캐릭터를 위해 몸과의 사투를 해왔던 터였지만, 크로는 스스로 이번 훈련만큼은 더 지독했다고 말한다. “로빈후드가 되기 위해 정말 엄청나게 나를 밀어붙였다. 지금은 한 20년은 젊어진 기분이다.”
<글래디에이터>의 영광을 뛰어넘기 위한 숙제
몸 나이를 떠나 그가 <로빈후드>를 통해 적어도 10년의 간극을 좁히려 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글래디에이터> 한편으로 스콧 감독과 그는 전세계적인 흥행과 명성을 모두 이루어낸 전적이 있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꾸준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간 크로가 막시무스의 명성을 뛰어넘진 못한 건 사실이다. “다들 <로빈후드>를 <글래디에이터>와 비교하느라 바쁘다. 상관없다. 여전히 <글래디에이터>는 프라임 시간대에 TV에서 방송되는 인기 영화다. 배우로서 일생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한 행운이 아니고 뭐겠나.” 말은 그렇지만, 가장 큰 영광이 가장 큰 숙제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로빈후드>는 <글래디에이터>의 영광을 언제고 다시 재현하고 싶은 크로의 가장 현실적인 도전이 될 것이다. <글래디에이터>만 같은 <로빈후드>라면, 그 도전을 받아들이길 꺼려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