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유준상] 올바른 남자, 연기 잘하는 배우
2010-05-13
글 : 김성훈
사진 : 오계옥
<하하하>의 배우 유준상

긴 여행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일까. 인터뷰 장소에 들어오자마자 유준상은 <씨네21> 홍상수 에디션에 실린 자신의 <하하하> 현장일지를 꼼꼼하게 살펴본다. <하하하>를 찍는 동안 그는 일상의 사소한 풍경부터 지극히 사적인 고민까지, 자신의 생각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씨네21> 752호 참조). “시 <여름동네>는 날씨가 정말 맑았을 때 쓴 거예요. 다른 사람의 촬영을 구경하러 갔다가 여름동네가 너무 예뻐서…. (새벽의 어둠 속에 홀로 있는 배 사진을 가리키며) 이건 새벽에 잠을 안 자고 통영의 (숙소에서 보이는 포구가 아닌) 다른 쪽에서 찍은 건데, 며칠째 움직이지 않는 배가 너무 좋았어요.” 온몸의 신경을 일상을 향해 열어놓은 듯 그의 관찰은 섬세했다. “그냥, 나이 먹었나 싶어요. 요즘은 일상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져요. 절실함이랄까요. 20, 30대 때도 절실함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지금은 시간이 아깝고 오래 버티고 싶고. (웃음)”

일상이라. 이는 최근 그의 연기를 보고 받은 인상이기도 하다. 늦은 아침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로 거실에 나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가 하면(<로니를 찾아서>(2009)),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술에 떡이 되어 잠을 자기도 한다(<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 그간 <가위>(2000), <쇼쇼쇼>(2003), <리턴>(2007) 등 장르영화에서 목적이 분명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한 것에 비하면 거의 모든 장면이 일상인 <하하하>의 그는 큰 변화다. 유준상은 <로니를 찾아서>부터 일상 연기에 공을 많이 들인다고 했다. “일상이니까. 그런 풍경들은 인물을 반영한다. 그래서 더 일상처럼 느껴지도록 많은 생각을 하고 연기를 해요.” 어쩌면 홍상수 감독은 캐스팅 전부터 그의 절실함과 변화를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몸으로 느껴야 진짜 아는 것

절실한 만큼 얻은 게 분명 있었다. <하하하>에서 그는 통영에 여행 온 영화평론가 중식을 연기한다. 중식은 여자친구(예지원)를 사랑하지만 동거하기는 싫고, 그녀가 간절하게 원해도 먹기 싫은 순대는 끝까지 먹지 않으려고 한다(물론 억지로 먹게 된다). 하지만 여자친구를 향한 마음만은 진심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그렇듯 유준상 역시 이 캐릭터를 감독과 함께 만들어갔다. 매일 아침 감독의 대본을 기다리면서. 이 과정이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물론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짧게 경험한 적은 있지만 <하하하>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이 생각보다 컸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도 잠시. 어느 순간이 지나면서 그는 연기의 재미를 알기 시작했다. 내일은 뭐가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고, 일부러 대본을 쓰고 있는 감독 앞을 서성거리며 “뭐 좋은 거 떠올랐나요?”라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그날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감독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또 그만큼 치열하게 연습하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보고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닌 몸으로 직접 느끼면서 아는 것 말이다. 유준상은 “그게 중요하다”고 한다. 그가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치기 전이었다. “피아노 가게에 갔는데 사장님이 쇼팽의 곡을 치시더라고요. 옆에서 보면서 ‘저 사람이 칠 수 있으면 나도 칠 수 있겠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아, 진작 봤더라면 더 일찍 피아노를 칠 수 있었을 텐데, 그걸 이제 알아서 언제 하나. 당장 피아노를 사고, 사장님의 악보를 빌려서 오른손 한달, 왼손 한달, 양손 한달 연습해서 그 곡을 마스터했어요.”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몰랐다. 시간 날 때마다 연습한 덕분에 지금은 제법 피아노를 잘 치게 됐다. “촬영 전, 한번은 감독님 사무실에 갔더니 피아노를 한번 쳐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즉흥곡을 쳤지. 치고 나니 잘 친 것 같은 거야. 그래서 감독님께 ‘이거 다시 치라면 못 치겠는데? 아까 녹음해야 했는데’라고 말했죠. (웃음)” 아직까지 피아노 코드를 완전히 익히지 못했지만 유준상은 마음 내키는 대로 친다. “사실 착각인 거죠. 그러나 자유롭게 즐기다보면 더 잘 치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진짜 연기 잘한다’고 착각하면서 힘을 내는 거죠. 어느 순간 착각의 힘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에피소드를 홍상수 감독은 놓치지 않았다. <하하하>에서 중식이 시 모임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으로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다. 피아노를 치는 중식(유준상)을 가리키며 정호(김강우)가 성옥(문소리)에게 하는 한마디가 인상 깊다. “저 형은 자기가 피아노 잘 친다는 생각만 안 하면 참 좋을 텐데.”

연기하는 걸 기억 못하면 좋은 것

연기 역시 앎이 중요하다. 배우는 자신을 벗어나 캐릭터에 완전히 들어간 순간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순간을 그는 <하하하>를 통해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홍상수 감독과 배우들이 대본을 맞춰보다가 감독이 원하는 느낌이 안 나올 때 그랬다. “감독님께서 우리를 따로 방으로 데려가서는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멍하게 만드세요. 그렇게 맞추고 슛 들어가면 연기한 것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캐릭터에 빠지더라고요. ‘내가 나이를 먹어서 기억을 못하는 건가’ 그런 기분이었는데 정말 행복했어요.”

이런 연습은 곧 개봉을 앞둔 강우석 감독의 <이끼>를 작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이끼>에서 유준상은 유해국을 증오하고, 동정하고, 그리고 도와주는 박 검사 역을 맡았다. 한마디로 복합적인 인물이다. 단순히 캐릭터를 분석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그는 <하하하>에서 했던 것처럼 박 검사를 몸이 느끼는 대로 연기했다. “어쩌면 배우가 몰입하는 순간 연출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감독님들의 스타일이 각기 다를 수 있죠. 하지만 제게는 연기를 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모두 같아요. 그게 연기의 본질인가봐요.” 원작 만화와 어떻게 다른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작의 박 검사와 유준상이 연기하는 박 검사는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직접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알기 위해서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느껴야 한다. 또 봐야지 어떤 게 좋은지 알 수 있다. 홍상수 감독의 이 말은 배우 유준상의 과제이다. “내 주위의 모든 것을 흡수해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 때로는 연기가 아쉬운 대로 남을 때가 더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준상은 단호하다. “그 아쉬움이 내게는 안타까움이에요. 어제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복기해보면 아쉬워요. 그게 저를 계속 발전시키는 것 같아요. 와이프는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고 그러더라고요. (웃음)” 무엇보다 그는 “올바르게 살고 싶다”고 한다. 어떤 것이 올바른 삶일까.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만이 올바른 삶은 아닐 것이다.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은 어려운 것 같아요. 정답도 없는 것 같고요. 배짱, 겸손함, 열정, 솔직함 등을 모두 갖춰야겠죠. 그런 것들이 연기하는 데 그리고 살아가는 데 분명 힘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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