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우리, 맨 얼굴의 공포와 대면할 수 있을까
2010-05-20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도덕 안에서 윤리를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는 남녀를 통해 바라본 <하하하>와 홍상수의 윤리

책 한권(<씨네21> 제752)이 모두 홍상수 감독의 세계에 바쳐졌다.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말을 덧붙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하하>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가 홍상수의 전작들 중에서 가장 유쾌하다는 공통된 평을 들려주고 있다. 수도 없이 자문했다. 내가 이상한 걸까? 내게는 슬픈 영화다. <하하하>는 어둡고 슬픈 것에 나쁜 것이 있다고 경고했지만, 어쩔 수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이 웃는다고 나도 같이 웃어야 하는 건 아니다. 물론 그들이 피에로처럼 울음을 감춘 웃음을 짓고 있으니 그 이면을 봐야 한다고 말하는 건 홍상수의 세계에 대한 완벽한 오해일 것이다. 그의 영화는 이면을 드러내기 위해 표면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하하하>의 인물들은 웃고 싶을 때 웃는다. 그게 전부다. 그렇다면 내 감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영화 속 문경(김상경)의 꿈에 등장한 이순신 장군은 “그 눈으로 보아라. 그러면 힘이 저절로 날 것이다. 네 머릿속의 남의 생각으로 보지 말고 네 눈을 믿고 네 눈으로 보라”고 말했다. 용기를 내어 ‘내 눈으로 본 것’을 믿기 위해 이 글을 쓴다.

흑백사진의 존재의 이유는?

이미 알려졌듯, 청계산에서 만난 감독 문경과 평론가 중식(유준상)이 막걸리 한 모금에 지난여름, 통영에서 겪은 기억 한 토막씩 나누기로 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둘은 좋았고 즐거웠던 일만 이야기하자는 데 뜻을 같이 한다. 이제부터 우리가 볼 이야기들은 과거의 일들이며 이 영화는 회상의 구조로 진행된다는 사실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회상의 구조, 즉 서사가 어느 정도 진행된 뒤, 현재 안에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근원을 찾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방식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지만, 홍상수의 영화를 한편이라도 본 사람들은 그런 방식이 홍상수의 것은 아님을 안다. 즉 우리는 그가 플래시백을 즐겨 사용하는 감독이 아니고,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진실을 복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그는 데이비드 보드웰과의 인터뷰에서 “기억은 의문을 남기는 것이어야지, 무엇이 ‘진실’인지를 판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 있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당황스러운 건 홍상수의 영화에 회상의 구조가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아무런 망설임없이 영화의 시작점으로 밀어넣어진 느낌을 받을 때다. 회상을 시작하는 현재의 시점은 흑백 스틸사진으로 멈춰져 있고, 두 남자의 생기있는 목소리에 불려나온 통영의 기억은 컬러로 된 동영상의 세계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영화가 스틸사진이 영화의 앞과 끝을 감싸고 그 안은 과거의 생동감있는 기억으로 채워지는 구조로 이루어질 거라는 예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문경의 기억 한 토막과 중식의 기억 한 토막 사이에 거의 규칙적으로 청계산의 현재(여전히 목소리만 살아 있는 스틸사진)가 끼어들어 불현듯 시간을 멈출 때, 앞의 당혹감은 반복된다. 물론 이건 상당 부분 직감에 근거하는데, 홍상수 영화에서는 직감을 설명하다보면 그것이 늘 영화의 구조(혹은 배열)와 밀착된다는 걸 깨닫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 우선 이 직감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회상의 구조란 아니 그걸 통해 불려나온 기억이란 결국 현재로 돌아와 현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 이 말이 거창하다면 기억은 기본적으로 현재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상하다. 영화의 시작점이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들 사이에 반복 삽입되는 현재가 너무 납작하다. 흑백으로 정지된 사진에서 아무리 생생한 목소리와 술잔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흘러나와도, 그 소리가 사진에 두께를 주는 것 같지는 않다. 그 현재는 차라리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얇다. 과거의 기억을 받아서 풍성해지길 기대하는 현재는 여기 없다. 인물들의 내레이션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는 있지만, 두 시공간이 과거-현재로 이어진다기보다는 아예 각기 다른 차원에 속해 있는 것 같은 인상은 단지 흑백의 정지화면과 컬러의 동영상의 충돌이 주는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뒤이을 기억의 드라마를 감당할 생각이 없는, 아니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납작한 시작점, 혹은 과거가 안착할 수 없을 만큼 얇은 현재. 현재가 이토록 투명한데, 과거가 어디로, 어떻게 돌아올 수 있겠는가. 과거가 돌아올 수 없다면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이들을 과거와 현재라고 부르는 게 온당하기는 한가. 사실, 이런 물음은 <하하하>를 관념적인 영화로 오해하게 만들 것 같아 좀 망설여지는 면이 있다. 혹은 이 의문들은 결국 죽음의 담론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은, 아무리 멋진 표현을 가져다 붙이고, 아무리 두터운 층위를 대어도 삶보다 관념적이다. 죽음은 삶보다 구체적일 수 없다. 정성일은 이 흑백사진들을 “저승에서 들리는 것 같은 울림. 죽음의 시간”이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경유하지 않고 이 투명한 막, 그러나 과거를 흡수하지 않고 튕겨내는 현재-흑백사진의 존재의 이유를 영화에서 찾아내고 싶다.

천진한 연인의 마지막 그림에 대해

넓게 시작했으니 좀 좁게 들어가 보고자 한다. 일단 이 영화의 배열은 느슨하게 펼쳐졌다고 평가된 최근 홍상수의 작품들에 비해 단단해진 느낌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와 별개로 영화 속 현재와 과거 혹은 그 둘 사이를 잇는 기억은 서로 얽히지 않고 따로 흩어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이건 영화 속에서 두 남자의 현재라고 표상되는 스틸사진의 존재, 그리고 그 사진이 위치한 혹은 위치하지 않은 자리에 대해 생각할 때 풀릴 수 있는 문제다. 회상의 구조로 이루어진 영화들을 볼 때, 우리는 줄곧 기억의 주체, 그러니까 중심이 되는 시간의 축을 찾는다. 굳이 애써 찾을 필요도 없이 그 주체와 시간의 축은 현재의 중심에 이미 명확하게 제시되는 게 보통인데, 이 영화 역시 기억의 주체는 스틸사진 속의 문경과 중식이다. 그들이 서로의 과거 속에 서로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한 기억의 주체일지라도, 어쨌든 그들이 기억하는 자라는 점만은 명확하다. 하지만 이들이 기억의 주체라고 해서 이들의 스틸사진이 영화 속 시간의 축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때 문제가 생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영화 속에서 이 정지된 사진들이 구체적인 경험들의 축이 되기에는, 혹은 무언가의 중심의 자리를 감내하기에는 다시 말하지만, 너무 평평하다. 홍상수 식으로 말한다면 구상을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추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 영화의 시간의 축은 어디 있는가? 지금으로서는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무언가 기억이라고 할 만한 사건, 혹은 사건이라고 할 만한 기억들은 분명 있는데, 그것들에 시간성을 부여하기가 어려운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상황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충만함과 그렇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불안감을 동시에 안고 있다.

물론 <하하하>를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과거는 생기로 움직인다. 현재는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과거가 제아무리 살아 있어도 결국 현재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그때 과거의 생생함은 결국은 추억이 될 감정이고 그건 결국 우리에게 거기서 죽음을 보라는 요구다.’ 하지만 점점 홍상수의 영화는 정한석의 말대로 지금, 행복해지기 위해 애쓰자고 말하는 쪽이지, 어차피 감정은 죽음을 내포한다고 말하는 쪽은 아니다. 그럼, 이렇게 묻는 건 어떤가. ‘움직이는 과거와 정지된 현재에서 한쪽은 환상이고 한쪽은 실재가 아닐까. 한쪽은 삶이고 한쪽은 죽음이 아닐까. 이때 어느 쪽이 진짜일까.’ 그러나 홍상수는 여러 평자들이 이미 지적했듯, 위계를 부정한다. 그의 영화에서 꿈과 현실은 늘 동등한 위치에 있다. 답이 정해져 있는 이런 생각을 굳이 언급한 이유는, 그가 아무리 위계를 부정한다고 해도, 하나가 다른 하나를 끌어안을 수는 있지 않을까, 묻고 싶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가, 삶과 죽음이, 이 영화를 두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통영의 움직이는 기억과 청계산의 정지된 사진이, 통영의 중식과 청계산의 중식이, 어떤 식으로든 하나가 다른 하나를 끌어안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만약 영화가 그걸 보여주기만 한다면 거기서 위안을 얻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생각지 못한 울림이 있었다. 물론 그 울림은 위안과는 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연주(예지원)와 중식은 다른 인물들을 모두 통영에 남겨두고 여수행 버스에 오른다. 버스 안에서 중식은 자기가 쓴 시도 읽어주고, 서로의 마음에 대한 온갖 예쁜 말들을 나누고 이렇게 다짐한다. “아무것도 몰라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만 알면 충분해.” 한때의 찬란한 아름다움일 거라고 생각하며 이제 청계산 두 남자의 스틸사진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찰나, 연주와 중식의 모습 위로 두 남자의 마지막 내레이션만 흐르고 영화는 불현듯 끝나버린다. 난감하다. 이 결말은 현재로 향한 걸까, 과거로 향한 걸까. 혹은 어디로 열려지거나 닫힌 걸까. 그것은 <밤과낮>에서 본 폐쇄된 결말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느낀 열려진 결말과도 다르다. 현재라고도, 과거라고도 규정할 수 없는 시간 속에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 그러나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할 때만 그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순간. 이 천진한 연인의 마지막 그림은 다른 존재들이 모두 시간 속으로 흩어지고 사라져도, 오직 서로의 마음에만 기대어 거기서 온전히 버텨내는 인상이 있다. 버텨낸다. 나는 위에서 이 영화의 구조적 배열이 최근의 홍상수 영화에 비해 뭔가 촘촘해진 느낌이 있다고 했고, 그 이유를 서로 다른 시공간적 차원의 반복교차 때문으로만 여겼다. 그러니까 배열의 문제를 표면적이거나 형식적인 차원에 국한해서 생각했던 건데,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서야 알게 되었다. <하하하>의 구조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궁극의 요인은 바로 이 마지막 장면 속에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 장면이 그 자리에 놓여졌다는 데 있다. 시간의 위계도 부정하고 시간의 일관된 축과 질서에도 관심이 없지만, 그 시간을 버티는 인간의 모습만큼은 붙잡는 것. 그건 희망도 아니고, 딱히 어둠과 밝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맨 얼굴(들)을 잊지 못하겠네

사실, 그와 유사한 느낌의 장면을 통영에서도 보았다. 이 역시 연주와 중식의 장면인데, 비바람이 강하게 내리치는 어느 날 두 사람은 한 우산 아래. 서로의 몸을 꼭 끌어안고 바다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위로 흐르는 중식의 내레이션은 대강 이렇다. “아침에 그 사람하고 있는데 너무 짜릿하고 좋더라. 감각이 다 되살아나는 것 같았어.” 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바로 다음에 따라오는 장면을 보고 나면 그 배열의 인상을 잊기 어렵다. 연주와 중식이 함께 비 맞는 장면이 나온 뒤, 지금까지의 영화의 구조를 떠올린다면 청계산 두 남자의 스틸사진이 따라오는 게 맞지만, 영화는 그 과정을 건너뛴다(여기를 기점으로 이 규칙적인 배열의 리듬은 깨진다). 그러니까 아무런 매개의 장면 없이, 성옥(문소리)이 일그러진 얼굴로 커다란 우산을 들고 폭우를 맞는 장면이 갑자기 붙는다. 이 모습을 카메라는 필요 이상으로 길게 쳐다본다. 똑같은 통영의 비, 그러나 연인의 다정한 비와 여인 홀로 견디는 폭우. 홍상수는 분명 이것을 귀여운 느낌에 근거한 우연한 배열이라고 말하겠지만, 두 장면의 충돌, 혹은 연결이 주는 인상은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두 장면의 감흥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까, 아니면 결국 일치한다는 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모습들 중에서도 왜 하필이면 위의 장면들에서 마음이 움직였는지에 대한 이유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 영화 속 중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헛것이 하나도 없는” 맨 얼굴, 그러니까 그걸 특정 장면의 맨 얼굴이라고 해도 좋고, 그 속에 있는 인물의 맨 얼굴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거기서 내가 느끼고 본 맨 얼굴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다만 이상한 건 영화 전체를 돌이켜보아도, 연주와 중식은 둘이 함께 있을 때만 그들의 맨 얼굴이 나오고 그게 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데, 성옥은 그렇게 외롭게 홀로 폭우를 견디는 그 일그러진 장면에서만 맨 얼굴이 돌출하고 그건 그녀가 짝들과 함께한 수많은 장면들에서 좀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연주와 중식 커플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들이 아무리 함께 있어도 서로에게 붙는 느낌이 없고, 문경이 시종일관 다짐하는 것처럼 상대에게서 “좋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 같지만, 뭔가 충분히 애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은 왠지 다치기 전에 물러선다는 표현을 쓰고 싶게 만든다. 여기서 다친다는 건 자기 파괴를 무릅쓴다는 의미와는 다르고 오히려 중식의 말을 다시 끌어오면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아 보인다는 의미에 가깝다. 왜 그렇게 느껴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우리는 한 여인의 뭉클한 맨 얼굴을 대면한 기억이 있다. 고순(고현정)은 세상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사람 같았다. 그건 그녀가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해도, 혹은 그 자리를 잃는다 해도 그 두려움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홍상수 영화의 도덕과 윤리의 구분(도덕이란 선악의 판단 기준이지만, 윤리는 오직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기준으로 작동한다)에 대해 사려 깊게 분석한 정한석의 논지를 끌어와 좀더 밀고 나아가고 싶다. 윤리는 제도나 상투적 관습이 아닌, 개인적인 직관을 믿고 그걸 근거로 좋은 것을 보는 것이며, 그 관점에서라면 고순이야말로 삶의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엄밀하게 생각해보자. 홍상수의 영화에서 누군가의 윤리를 판단하기는 쉬운 일인가. 고순의 윤리가 예쁘게 보였던 이유는, 그녀가 직관에 따라 행동했음을 우리가 잘 알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그것이 그녀의 직관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그녀가 한 남자의 아내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선택했고, 그 결과를 온전히 감내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좀 부박하게 말하면, 영화에서 그녀가 결혼제도 안에 존재하는 유부녀라는 사실은 그녀가 자율적이기 위해 애쓰는 존재라는 사실만큼 중요하다. 그러니까 그녀의 선택을 자율적인 것으로 보이게 해주는 건 그녀가 속한 타율적 울타리다. 이 말이 타율적 울타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나의 행위가 그 어떤 상투성으로부터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확신을 내게, 혹은 상대에게 주는 건 결국 내가 서 있는 도덕적 토대와의 관계에서다. 맨 얼굴이 맨 얼굴로 두드러지는 순간은 그것이 편견과 제도의 탁함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다.

도덕 안에 살고 있으니 윤리가 필요해

홍상수는 맨 얼굴을 보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하지만, 맨 얼굴이 순수한 본질로 존재한다고 여기거나, 인간이 그것에 완전히 밀착하거나 도달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하하하>에는 그걸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정호(김강우)와 중식 커플이 창밖의 걸인을 보면서, 그의 껍데기가 아닌 실체를 볼 수 있는지, 그의 더러움을 다 지워도 여전히 거지라고 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바보 같은 논쟁을 벌인 다음 이어지는 장면은 놀랍다. 실제로 그 걸인이 굉장히 위협적인 모습으로 중식 커플을 쫓아오며 “더러운 년!”이라고 내뱉는 모습인데, 영화 전체의 분위기상 끔찍하고 낯선 얼룩이다. 내 생각에 이 장면에서 홍상수는 단지 타자의 맨 얼굴을 보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하는 걸 넘어서 이렇게 반문하는 것 같다. 문제는 우리가 타자의 맨 얼굴을 대면할 수 있다고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데 있는 건 아닐까. 과연 우리는 이 맨 얼굴의 공포를 대면할 수 있을까.

여기서 윤리와 도덕이 중요해지는 건 윤리가 도덕으로부터 순결하게 분리될 수 있다는 통념과 환상을 지적할 수 있을 때고, 그걸 말하는 이유는, 홍상수의 인물들이 순간의 충만감과 직관을 따를 때, 그것을 단지 좋은 것만 좇는 감상주의, 혹은 일탈에 대한 치기어린 욕망쯤으로 치부하는 일련의 견해들을 경계하고 싶어서다. 우리에게 윤리가 절실한 건 용기가 필요한 건 우리가 도덕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짝짓기를 소중히 여기는 그의 영화에 유독 유부남, 유부녀가 많이 등장하고 그들의 만남이 늘 우연한 여행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제 <하하하>로 돌아가야겠다. 여하튼 무엇이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잘 느껴야 한다. 잘 느끼기 위해서는 투명해져야 하는데, 그 투명함은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멈추지 않고 닦는 것이며, 그건 그 기준을 둘러싼 도덕 혹은 상투적 이미지와 싸우는 것이다. 연주와 중식 커플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에게 내 마음을 주기 힘들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들에게는 좋고 싫음은 있지만, 그걸 판단하고 실행하기 위한 과정, 즉 도덕 안에서 윤리를 쳐다보고 갈망하는 치열함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말을 이렇게 반복해도 될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채우는 ‘하늘의 별’ 같은 남자와 ‘천사새끼’ 같은 여자는 두손을 꼭 잡고 도덕 안에서 윤리를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다. 그 순간이 과거이건, 현재이건, 영원하건, 사라지건 영화는 개의치 않는 것 같다. 다만 두 연인이 거기 버티고 있는 것처럼, 영화 역시 그 장면이 그 자리에 기필코 올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 같다. 그 결단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유쾌하기는커녕 마음이 부서질 정도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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