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다.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의 말갛고 수줍음 많던 배우가 어느덧 박중훈이라는 대선배와 이웃사촌이 됐다. 짝사랑하는 선배 앞에서 한마디 하지 못하고 카메라만 만지작거리던 소녀가 이제 취기가 오른 벌건 얼굴로 선뜻 “우리 잘까요?”라고 말한다. <사랑니>(2005)와 <가족의 탄생>(2006)을 거치며 조금씩 성장하는 것 같던 배우가 마치 점프컷을 한 것 같은 속도로 우리 앞에 섰다. 무엇보다 <내 깡패 같은 애인>의 박중훈과 정유미는 잘 어울린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국민배우와 아직 뚜렷한 흥행작으로 기억되지 않는 젊은 배우의 만남.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절묘한 호흡부터 생동감을 뿜어낸다. 그 첫만남은 어땠을까. “촬영 전 고사 지내는 날까지도 스탭들이 반신반의하더라고요.(웃음) 과연 우리 두 사람이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그런데 생뚱맞게 서 있기만 했는데도 느낌이 오더라구요. 박중훈이라면 아직도 나에게는 ‘연예인’인데 지금 내 옆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하긴 <차우> 때 윤제문 선배와 내가 어울릴 거라 생각한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조금 더 가까이
정유미는 지난 2년간 무척 바빴다. <차우> 다음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찍고 다시 홍상수 감독과 <첩첩산중>을 찍었고, <까페 느와르>와 <10억>을 촬영한 다음 <내 깡패 같은 애인>에 들어갔다.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김종관 감독과 다시 만난 <조금만 더 가까이>는 <내 깡패 같은 애인>을 촬영하던 중에 출연한 작품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가까이>는 정말 궁금했다. 자신의 첫 번째 감독과 다시 만난 기분이 어떤지, 게다가 다른 영화 촬영 중에 살짝 빠져나와 촬영한 기분이 또 어떨는지. “<내 깡패 같은 애인>을 찍으면서 창피하게도 참 많이 징징거렸어요. 그동안 쌓인 것도 많고, 사람들 사이에서 지치기도 했나봐요. 김종관 감독님하고 다시 하고 싶었지만 스케줄상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죠.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겹치기 출연을 하며 두 영화에 피해를 끼칠 순 없잖아요. 그렇게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운명처럼 2주간 촬영이 비게 됐고 양해를 구하고는 <조금만 더 가까이>에 출연하게 됐어요. 김광식 감독님, 박중훈 선배님 모두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하셨고, 정말 고마웠어요.”
게다가 <조금만 더 가까이>는 <내 깡패 같은 애인>에 말 그대로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 줬다. 옛 감독을 만나 겹치기 출연을 하고 빠듯하게 밤도 새우면서 초심을 찾는 계기가 됐다고나 할까. “분명 몸이 힘들어야 할 텐데 <내 깡패 같은 애인>에 더 집중하게 해줬어요. 그때부터 감독님 말씀도 무조건 잘 따랐죠.”(웃음) 그건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느낀 미세한 변화도 큰 역할을 했어요. 영화 속 제 캐릭터를 보고는 김종관 감독님께 따졌죠.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그녀가 왜 이렇게 망가졌어요? 짝사랑만 하다보니 미친 거 아니에요?(웃음) 세상 그대로인 건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렇게 자연스레 변화를 몸에 배게 했다고나 할까요?”라는 게 그녀의 깨달음이다.
배움의 시간
대배우 박중훈과 함께한 느낌이 궁금했다. 남자건 여자건 그와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 무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박중훈 원톱영화’가 절대 아닌 <내 깡패 같은 애인>은 무엇보다 두 사람의 절묘한 균형감이 중요한 영화다. ‘삼류 건달’ 남자와 ‘88만원 세대’ 여자가 조화로운 긴장감을 이뤄야 하는 이 영화에서 자칫 무게중심을 잃는 건 영화를 망칠 수도 있다. 일단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난 아직도 영화 속에서 다른 배우를 보면 ‘연예인’ 만나는 기분이에요. 박중훈 선배님은 그 느낌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죠. 촬영 중에는 모르겠는데 중간에 쉴 때 옆을 보면 박중훈 선배님이 있고 ‘아니, 저분이 여기 왜 있지?’하는 생경한 기분이 드는 거 있죠?(웃음) 게다가 지금껏 박중훈 선배님과 함께했던 쟁쟁한 여배우 명단을 떠올려봤어요. 내가 거기 낀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어요. 일단 완벽하게 보이려고 하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대선배님이 보시기에 제가 뭘 해도 얼마나 어설프겠어요. 지적당할 때 당하더라도 솔직하게 접근하려 했죠.”
물론 영화 속에서 속 썩일 때도 많지만 동철(박중훈)이 세진(정유미)을 물심양면 도와주는 것처럼, 현실에서 박중훈의 도움은 큰 힘이 됐다. 선배가 보기에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걸 쉽게 해내지 못할 때 조바심이 나기도 했고, 매순간 부족하다는 생각하면서 머리가 하얘질 때도 있었다. “내가 늘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굉장히 나약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도 <내 깡패 같은 애인>이었다”고 말한다. 덧붙여 “아마도 영화 전체의 정서를 끌고 가는 ‘리딩’ 배우로서의 역할이나 능력에 대해 많이 배운 것 같다”는 게 그녀의 얘기다. 그만큼 박중훈과의 앙상블은 영화 몇 편을 더 한 것 같은 배움의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것이지만 시사회장에서 울음을 터트린 것도 마치 영화에서처럼 ‘또 동철이 나를 도와주는구나’하는 생각에 울컥 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정유미가 그런 모습을 보인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이제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제가 몇 번씩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깔끔하지 못한 상황을 만든 거잖아요?(웃음) 그런데 어떡해요. 사람이 ‘뿅!’하고 바뀌는 게 아니니까. 그럴 때마다 연기를 잘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연기를 잘 하면 그 정도 일쯤이야 웃어 넘겨주시지 않겠어요?”
배우의 행복
늘 완벽하고 싶다고 말하는, 연기를 잘 하고 싶다고 말하는 정유미는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많다. 남들이 보기에 평범하게 느껴지는 장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장면 하나라도 자신의 의도대로 담기지 않으면 불안하다. 가령 이런 일화가 있다. 절대 키스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동철과의 뽀뽀신이 있는 날, 세진은 동철과 함께 기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온다. 그때 두 사람의 마음은 어떤 단계였을까. “그 날 밤 바닷가에서 뽀뽀신으로 이어지는 정서를 얘기하면서, 감독님이 이미 고향에 내려올 때부터 세진이 동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저는 그런 기분으로 기차에서 얘기하거나 내리거나 하지 않았거든요.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기차에서 대화하고 내리는 장면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좀 납득이 안 됐어요. 그래서 나중에 조감독님이 동철의 어깨를 대신 만들어주셔서 그 장면을 재촬영했어요.” 그리고 그 장면은 <가족의 탄생>에서 정유미가 봉태규와 기차 속에서 나누는 대화와 비교해보면 그 정서와 마음을 알 거란다.
그리고 면접관 앞에서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여고괴담4: 목소리>(2005) 오디션을 볼 때가 생각났다. 자기는 배우 면접이 아닌데 왜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갔지만 친구와 통화하면서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친구가 “회사 면접 때도 노래건 춤이건 시키는 대로 다 해야 돼!”라고 했기 때문. 배우나 회사원들이나 참 세상 살기 힘들다고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또 한번 깨달았다. “역시 연기를 잘 해야 돼!”
아직 정유미를 모르는 사람은 많다. <오이시맨>(2008)과 <그녀들의 방>(2009), <잘 알지도 못 하면서>(2009)은 이른바 와이드 릴리즈를 한 영화가 아니었고 나름 대중적 성공을 기대했던 <10억>(2009)과 <차우>(2009)도 그리 좋은 결과를 안겨주지 못했다. 여러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까페 느와르>(2009) 역시 개봉 전이다. 어쩌면 <내 깡패 같은 애인>이 그녀의 최고 흥행작이 될지도 모를 거란 조심스런 기대를 가져볼 만하다. 영화를 둘러싼 입소문도 좋고, 그녀 스스로 확실한 주연역할을 해냈다는 뿌듯함도 있다.
영화의 흥행성공이 배우가 꿈꾸는 모든 것은 아니지만 그로부터 얻고 싶은 건 분명 있다. “배우로서 최대한 많은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는 게 중요한 자질이라면 대중적 성공은 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만든 사람만 좋은 게 아니라 그를 보는 사람들 모두 함께 즐거워하는 영화를 하는 건 배우의 중요한 행복 중 하나일 것이다. 정유미는 지금껏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행복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더불어 ‘반팔’을 입을 수 있는 계절이 돌아온 것도 마음을 설레게 한다. 신고 걷기만 해도 S라인으로 만들어준다는 러닝화를 당장 사서 동네를 걸으며 모처럼의 여유를 즐겨보고 싶단다. 일단 다음 계획은 좀 천천히 바람 쐬고 걸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