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추모] 소년, 자연으로 돌아가다
2010-05-31
글 : 주성철
주성철 기자, 떠나간 곽지균 감독을 추억하며

“정균아 전화 받아.” 곽지균(본명 곽정균) 감독은 휴대폰도 이메일도 없어 늘 집으로 전화를 드려야 했다. 용건이 있으면 저녁식사 시간 때쯤 전화하면 있을 거라고 했다. 영화가 없을 때는 대전 자택에 머물던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어머니와 함께 지냈고 늘 같이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오십이 다 된 막내아들이 어머니와 단둘이 저녁식사를 하는 풍경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곽지균 감독 사망 기사를 보니 고인의 유골은 그보다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 묘 옆에 안치될 예정이라고 했다. <사랑하니까 괜찮아>(2006) 당시 인터뷰한 이후로는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으니 소식을 모르고 지낸 그 3, 4년의 무심한 시간 동안 어머니도 그도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감정의 성인식을 치르게 해준 그의 영화들

한국영화계에서 작품 제목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이 정의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은 곽지균 감독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만큼 <겨울나그네>와 <젊은 날의 초상> 등 그의 영화는 당대 청춘의 슬픈 자화상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최인호 원작 <겨울나그네>, 김수현 원작 <상처>, 이문열 원작 <젊은 날의 초상> 등 다른 작가의 원작에 기댄 작품들이 많았지만 ‘청춘’의 ‘상처’를 머금은 자기만의 캐릭터와 정서를 불어넣었기에 그 작품들을 ‘곽지균의 영화’라고 말하는 데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실의 그를 쏙 빼닮은 것 같은 남자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말수가 적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늘 머뭇거리며 그렇게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을 자기의 의지대로 붙잡지 못한다. 그의 영화들이 당대 관객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그 젊은 날의 사랑으로 인한 ‘깊은 슬픔’의 정서였다. 성인이 되기 전 극장에서 몰래 그의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 경험에 비춰보자면 ‘저게 바로 대학생의 사랑이고 슬픔이구나’ 하는, 그렇게 지금으로선 다소 부끄러운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말하자면 곽지균의 영화는 감정의 성인식을 치르게 하는 영화들이었다.

곽지균 감독은 <청춘>(2000)의 경주 촬영현장을 방문하고 이후 인터뷰를 하면서 실제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겨울나그네> 이후 내 정서가 가장 많이 투영된 작품”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젊은 날의 초상> 이후 1990년대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감회가 아쉬움이었음을 떠올려보면 그의 표정은 무척 밝아 보였다. 가령 <이혼하지 않은 여자>에 대해서는 “내 나이는 40대지만 늘 20대에 성장이 멈춘 듯한 느낌인데다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없어서 지금 내 나이대의 일상과 정서를 알지 못해 연출이 쉽지 않았다”고 했고, <장미의 나날>에 대해서는 “변화를 위해 미스터리 장르를 시도했지만 체질적으로 영화 속에서 트릭을 만드는 것에 거부감이 있어 내내 동떨어진 작업 같았다”고 고백했으며, <깊은 슬픔>에 대해서는 “시간이 흘러 투자자, 제작자, 배급사가 따로 있는 전혀 다른 시스템으로 작업하다보니 내 스타일이 많이 부서졌다. 내 고집만 부리기 미안해서 수용하려 애쓰다보니 원치 않는 액션장면이 과다하게 들어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그 특유의 순애보는 여전하지만, 우울한 80년대의 공기가 아니라 젊고 싱싱한 동시대 청춘의 이야기와 접속한다는 사실에 무척 들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청춘>은 흥행에서 실패했다.

영화를 만드는 그 순간 소년이 되는 사람

2002년경 다시 연락을 하게 된 건 당시 일하고 있던 월간지에서 감독사전을 발간하기 위한 작업을 하면서였다. 여러 한국 감독들에게 앙케트를 받았는데 휴대폰도 이메일도 없는 감독은 그가 유일했다. 내용을 들은 그는 이내 작성해서 팩스로 보내준다고 했다. 그런데 팩스를 보낼 수 있는 문방구가 집에서 좀 멀다며 시간은 좀 걸릴 거라 했다. 그와 얘기를 나눠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런 얘기 하나하나가 참 소년 같았다. 당시 인상깊었던 답변 중,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로 화가 이중섭을 꼽으며 이렇게 썼다. “예술에 대한 그 치열함과 순수함의 놀라운 공존, 또 그만큼의 파란 많은 생애에 가슴이 시리다. 격동의 세월을 치열한 예술혼으로 버텨온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을 것 같다.” 이중섭은 말년에 일본으로 떠난 처자에 대한 그리움, 혹독한 생활고가 겹쳐 정신분열증세까지 보이다 간염이 악화돼 마흔살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당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쓴다면?’이라는 짓궂은 질문에는 ‘영화로부터 자연으로 돌아가다?’라고만 썼다. 다른 감독들이 어딘가 거창하게 답한 반면 그는 마치 한번도 자신의 죽음을 떠올려보지 못한 것처럼 그렇게 썼다.

이후 ‘판타지멜로’ <하나에>를 준비하다 무산되는 일이 있었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사랑하니까, 괜찮아>를 만든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또 스무살 문턱 이야기’라고 말하며 웃었다. 늘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매너 좋고 사람 좋고 하여간 변함없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80년대 최고 흥행감독 가운데 하나였던 그로서는 가장 오랜 시간 쉬웠을 텐데도 전혀 의기소침한 모습도 없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저 영화를 만드는 그 순간 소년이 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또래 영화감독들과 비교해 그 흔한 ‘교수’ 직함도 가지지 않았다. 그의 개인적인 형편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으면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것도 그것이었다. 너무 오래 영화를 쉬고 경제적 어려움이 있다면 학교로 가면 될 노릇이었다. 경력으로 보건대 그를 ‘교수’로 데려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별로 아는 것도 없는데 사람들 앞에 서기 쑥스럽다”고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영화만을 만든 사람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그런데 6년 만의 신작 <사랑하니까, 괜찮아>는 더 큰 실패를 경험했다. 그로서는 굉장한 상실감에 빠진 듯했다. 진심어린 마음을 담아 장면 하나하나 자기 뜻대로 매만진 영화가 관객으로부터 외면받을 때의 느낌은 무척 가혹한 것이리라. 처음으로 자신이 시대와 동떨어지고 있다는 씁쓸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스쳐지나가는 말로 <비 오는 날의 수채화>(1989)를 만든 곽재용 감독이 <엽기적인 그녀>(2001)를 만든 걸 보고 부럽다고도 했다. “같은 얘기를 하는데도 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 나도 좀 그런 재밌는 걸 해야 젊은 친구들이 좋아할 텐데 도통 재주가 없네”라고 웃으면서 말이다.

돌이켜보니 곽지균의 영화 속에서 죽음은 중요한 이미지였다. 그가 ‘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나와 가까운 분신’이라고 했던 <겨울나그네>의 ‘피리 부는 소년’ 민우(강석우)는 레어 버드의 <Sympathy>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차를 몰고 돌진해서 죽었고, <젊은 날의 초상>에서 두 친구의 자살을 경험하고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를 떠난 영훈은 언제든 죽기 위해 늘 독약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답답한 80년대를 살아가는 그 영화 속 주인공들의 방황은 언제나 죽음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었다. 그를 이겨내는 힘은 사랑이지만 그것은 늘 뜻한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고집스레 멜로영화 10편을 남기고 떠난 곽지균 감독은 그렇게 늘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에 대한 결핍을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 안간힘으로 새 영화를 준비하면서, 더 이상 관객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는 마음으로 보냈을 지난 몇년간을 떠올려보니 너무 마음이 쓰리다. 곽지균 감독의 죽음은 더이상 대규모 자본 안에서 개인적인 영화가 가능하지 않은 시대라는, 그리하여 영화를 둘러싼 우리 시대의 정서도 변했다는 것을 일러주는 거대한 상징적 사건이다.

필모그래피
<겨울나그네>(1986)
<두 여자의 집>(1987)
<상처>(1989)
<그 후로도 오랫동안>(1989)
<젊은 날의 초상>(1991)
<이혼하지 않은 여자>(1992)
<장미의 나날>(1994)
<깊은 슬픔>(1997)
<청춘>(2000)
<사랑하니까, 괜찮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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