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8년이라 한다. 멜 깁슨이 배우로 카메라 앞에 서지 않은 시간 말이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2002년 M. 나이트 샤말란의 <싸인>에 출연하며 멜 깁슨은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더이상 배우이기를 원치 않아요. 이제 시나리오가 뛰어나게 훌륭하지 않는 한,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다룬 논쟁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마야 원주민들의 사투를 그린 <아포칼립토>의 연출에 매진했다. 영화들은 깁슨의 얼굴 없이도 흥행에 성공했다. 할리우드는 외모와 이름값을 지워도 평단으로부터 호의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후계자로 멜 깁슨을 조심스레 점지했다. 하긴 이미 10여년 전 연출과 출연을 겸한 시대극 <브레이브 하트>(1994)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깁슨은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이쯤에서 의문 하나. 멜 깁슨의 물리적인 공백만큼이나 우리는 그를 자주 보지 못했나? 그건 아니다. 배우로서의 업을 중단했던 8년의 시간 동안 멜 깁슨의 얼굴은 스크린 대신 TV에서 자주 보였다. 출연한 건 뉴스였는데 들리는 소식은 막장드라마였다. 2004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만들며 호모포비아, 반유대주의 논란에 시달렸던 그는 2006년 만취한 상태로 도로를 질주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으로 재활 시설까지 들어갔다 나온 깁슨을 할리우드는 이렇게 맞이했다. “솔직히, 저는 제 다음에 나올 분만큼 술을 좋아합니다. 제 다음 사람이 멜 깁슨만 아니라면요.”(2010년 골든글로브 시상식, <오피스>의 작가 리키 저베이스) 그날 밤 한 중년의 남자배우가 레드 카펫 행사와 파티를 취소하고 집으로 처연히 돌아갔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돌기 시작했다.
<엣지 오브 다크니스>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이 작품은 삶의 지옥을 맛본 멜 깁슨의 가장 이른 선택이었다. 또한 가장 익숙한 선택이기도 하다. <엣지 오브 다크니스>에서 깁슨이 연기하는 형사 토마스 크레이븐은 등장하자마자 괴한의 총탄에 딸을 잃는다.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의 폭주. 혈육을 상실한 아버지는 망설임없이 악인들을 처단하고, 스크린을 피로 물들인다. 이 모습은 폭주족을 (표현 그대로)깔아뭉갰던 <매드맥스>의 ‘매드 맥스’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똥 같았던 <리쎌 웨폰>의 다혈질 경사 마틴 릭스 캐릭터 등 깁슨이 1990년대 맡았던 캐릭터들과 겹친다. 한마디로 말해 멜 깁슨을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던, 인정사정 볼 것 없는 형사 이미지의 재현이란 뜻이다.
가장 사랑받았던 직업으로, 가장 잘하는 역할로 돌아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글쎄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 분노는 도처에 존재합니다. <베오울프>에도, 자코뱅에게도, 심지어 개에게도 분노의 감정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고 그걸 바로잡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시대와 개인을 넘어선 거대한 주제이니까요.” 깁슨은 에둘러 대답하지만, 그의 이러한 선택에 대중의 냉정한 시선을 돌려보려는 마음 또한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문제로 공공연한 비난을 들어왔던 멜 깁슨은 평소 가장 큰 두려움이 “대중 앞에서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문제들이 국제적으로 이슈화된다면 더하겠죠. 그게 바로 몇년간 내가 겪은 일입니다. 무엇이 저를 강하게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정말 간단한 문제입니다.” 인생의 바닥에서 한때 자살까지 생각했던 사람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영광을 꿈꾸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멜 깁슨의 <엣지 오브 다크니스> 출연은 그렇게 읽힌다.
물론 변화도 엿볼 수 있다. 단지 깁슨의 얼굴에 깊이 아로새겨진 주름이나 푹 꺼진 볼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토마스 크레이븐은 깁슨이 그동안 맡았던 형사 캐릭터들과 비교했을 때 덜 다급하고, 더 감성적인 인물이다. 오합지졸이 아니라 두뇌들을 상대하고, 전작에선 볼 수 없던 망자(딸)의 유령을 자주 목격하는 탓이다. “크레이븐은 내향적인 캐릭터입니다. 얼굴 표정이나 몸짓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는데, 그건 매우 낯선 느낌이었어요.” 깁슨에겐 도전이었으나 덕분에 우리는 딸의 유골을 안고 중심이 부재하는 눈빛으로 수평선을 바라보는 멜 깁슨의 표정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영화 자체로는 아쉬움이 남지만, 액션과 더불어 드라마 또한 놓치지 않는 멜 깁슨의 연기만큼은 일품이다. 실제로 일곱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아이가 인생에서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다행히도 토마스 같은 경험은 없지만, 쌍둥이 아들이 21개월 되던 때에 차도에 내려가려던 적이 있어요. 전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요. 그때 손에 있는 걸 다 내팽개치고 주변 사람들을 밀어 넘어뜨리면서까지 달려가서 아이를 끌어안았어요. 아마 부모라면 누구나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겁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므로 <엣지 오브 다크니스>에서 멜 깁슨이 보여주는 건 모두 연기가 아니라 진짜다. 세상의 중심을 잃어버린, 진짜 아버지의 모습이다.
<엣지 오브 다크니스>로 평단의 호의를 이끌어내고 절친한 친구 조디 포스터가 연출한 코미디 <비버> 출연으로 몸풀기에 성공한 멜 깁슨의 차기작은 <바이킹>이다. <디파티드>의 프로듀서 그레이엄 킹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합류한 이 영화에서 깁슨은 다시금 연출을 맡는다. 물론 깁슨이 다루려는 바이킹족이 <아스테릭스>풍의 귀엽고 친근한 작자들이 아니라는 건 예측 가능하다. “사람들을 정말로 무섭게 하는 영화로 만들 겁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저음의 독일어를 중얼거리는 소름끼치는 바이킹족을 보여주고 싶어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아포칼립토>를 잇는 흥건한 피의 잔치를 준비하며 멜 깁슨은 암흑의 핵심으로부터 벗어나는 중이다. (다시 한번) 가장 자신있는 방법으로, 가장 익숙한 주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