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추락뿐인 계단 위에서 냉소하다 [2]
2010-06-17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임상수의 <하녀>가 진정으로 다루고 있는 계급의 문제는 무엇인가

사라진 계급을 되살리려는 제스처

<하녀>를 계급에 관한 영화라 부를 때 왠지 불편한 것은 이것이 과연 계급간의 갈등과 대립을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에 의문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두개의 계단을 통해 계급 이동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단순한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중산층에 막 진입한 가족을 중심으로 했던 원작과 달리, 임상수가 상위 1%에 해당하는 최상류층을 영화 속에 끌어들였을 때, 하녀의 계급 역시 더이상 과거와 동일할 수 없다. <하녀>와 원작에 등장하는 하녀간의 가장 큰 차이는, 원작의 하녀가 신분과 계급이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면 <하녀>의 경우는 그렇지 않는다는 점이다. 훈에게는 은이와 해라가 동일한 하녀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계급까지 동일할 수는 없다. 이는 단지 해라와 은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학을 중퇴하고 평택에 조그만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은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들을 검사로 둔 여자마저 하녀로 지칭될 때, 그들이 배운 것도 없고 아파트도 없이 밑바닥의 하녀로 살아가는 여자와 계급적으로 동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중산층을 최상류층으로 끌어올리면서 하녀의 신분을 업그레이드하고 그 범위를 확장할 때, 정작 <하녀>가 잃은 것은 ‘계급으로서의 하녀’다.

오해는 말라. 나는 지금 훈을 중심으로 나머지 인물을 그에 기생하는 하녀로 그려낸 임상수의 의도에 딴죽을 거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어느 정도는 모두가 하녀인 시대라는, 또는 모두가 하녀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시대라는 임상수의 관점에 동의한다. 내가 문제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영화적 관점을 갑작스럽게 벗어나는 영화의 엔딩, 그러니까 은이가 보여주는 ‘자살의 몸짓’에 대해서다. <하녀>는 은이의 낙태 이후, 갑작스럽게 하녀를 ‘특정 계급’으로 위치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녀>가 그려낸 하녀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위치시킬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계급이란 특정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적대’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이다. 즉 일반적으로 우리는 계급이 먼저 있고 그 계급간에 적대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어떤 적대가 먼저 있고 난 연후에, 그렇게 적대할 수밖에 없는 세력(집단)에 대해 각각의 계급적 명칭이 부여된다. 적대가 없다면 어떤 계급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상기해야 하는 것은 냉소적 주체가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대표하는 주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계급 같은 거대 담론이 설 자리를 잃었을 때, 사회의 적대가 더이상 계급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할 때 냉소적 주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은이와 전태일의 차이점

은이가 병식의 뺨을 때리고 복수를 다짐할 때, 은이는 자신의 계급을 주장하고 냉소적 주체를 벌한다. 은이가 ‘불친절한 세상’에 ‘찍소리’라도 내야겠다고 말하는 순간은 병식의 태도와 상반되는 것으로,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자각했을 때만 가능한 태도다. 은이의 계급적 각성 이전까지, <하녀>의 현실인식은 계급이나 이를 파생시킨 사회적 적대보다는, 어떻게 하녀는 냉소적 주체가 되었는지, 혹은 되어가는지를 묘사하는 것이었다. 결국 은이의 자살이 급작스럽게 느껴진 이유는 그것이 인물의 성격 변화를 넘어, 이전까지 지워졌던 ‘계급으로서의 하녀’를 ‘비약’적으로 돌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은이의 분신에 대해 남다은은 그 갑작스럽게 출현과 함께, 그 행위의 극단적 형식을 채울 만한 내용물이 그 안에 없어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756호). 황진미 역시 그 죽음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욕망에 귀기울이지 않고 무차별적인 자기 조롱 속에 폐절된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며 그에 대해 좀더 사연이 드러났어야 함을 지적한다(755호). 황진미의 의견처럼 사연을 좀더 부연했다면, 은이의 자살은 좀더 친절하고 설득력있게 느껴졌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죽음은 여전히 비약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어떠한 방식으로든 ‘행위’(act)로서의 자살이란 은이의 선택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지젝에 따르면, 행위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림으로써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상징적 현실 세계의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시간적 단절과 균열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이는 진정으로 행위의 주체인가?

이는 은이가 하층계급의 상징적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숭고한 행위를 떠맡기에 적절한 주체가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은이는 전태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그것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라 해도). 그녀가 자신의 계급을 주장할 때 그것이 비약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허망한 제스처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 행위(공적인 순종을 벗어나 아니오! 라고 외치는 행위)를 보여주는 순간에도 상징적 현실은 변할 수 없다고,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은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냉소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이는 ‘냉소적 주체’의 자리에서 관객에게 ‘계급’에 관한 질문을 던지려 한다. 질문을 던지는 위치와 질문간의 간극을 감추기 위한, 그리고 그 갑작스러운 비약을 감추기 위한 잔혹의 스펙터클. 은이는 처음으로 훈과 해라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기회를 얻지만 그것이 주는 계급적 역전의 쾌감은 스펙터클과 함께 연소된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은이의 분신은 가장 온전한 의미에서의 냉소적 행위이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한다’에 가장 적절히 부합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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