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지독한 사랑이다. 그 시절.CF와 잡지를 도배했던 ‘하이틴 스타’에서 동네 아줌마들의 사랑을 흠뻑 받던 브라운관의 히로인으로, 첫사랑의 두근거림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고, 노란손수건 속에 연하청년의 사랑을 받아들이던 스크린의 연인으로. 수많은 스타들이 소리없이 피고 졌던 긴 세월 동안 김혜수(31)는 그렇게 오래고도 지독한 사랑을 받아왔다.
한번도 스타덤의 외곽으로 내몰리지 않았던 그에게 연기는 벌써 인생의 절반 동안 해온 습관 같은 일. “연기란 인생을 아는 만큼 나온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연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안 하고 그냥 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엔 어려워요. 왜? 연기하지 않는 순간에도 늘 인간적으로 잘살아야 좋은 연기가 나오니까, 결국 잘살아간다는 게 어려운 거니까….”
특유의 건강함과 활발함에는 감량이 없어보였지만 김혜수는 요사이 자칫 예민해 보일 만큼 살이 내렸
다. “한번 크게 아프고 나니까 살이 빠지더라구요. 내 참, 옛날엔 빼려고 해도 안 빠지더니만.” 100회나 진행했던 토크쇼 <김혜수 플러스유>의 종영을 앞두고 그는 많이 앓았다. 물론 아직 미성숙 단계인 토크문화 속에 홀로 토크쇼를 진행한다는 것에 한계를 느꼈기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타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법을 배웠고, 무엇보다 어느 부분 닫혀 있었던 나를 많이 열어보이는 계기가 되었던” 쇼를 떠나보내기엔 적지 않은 아픔이 있었던 것. 하지만 “한번 결정한 걸 재고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지난해 가을, 김혜수는 쇼의 종영에 맞춰 절친한 초등학교 여자친구와 함께 1달간의 영국여행을 떠났다. 별다른 계획도 없이 따라나선 배낭여행이었지만 “너무, 너무 행복했던 순간이었다”며 거듭 회상하는 그의 눈은 어느덧 에든버러의 초원 어디쯤. “마음같아선 돈벌면 여행가고 돈떨어지면 돌아와서 또 여행자금 벌고…, 뭐 그렇게 살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겠죠?” 자신이 학생인지, 연예인지도 모르는 생면불식의 외국인들과 가식없는 대화를 나누고, 맨발로 몇 시간이고 뛰어다니고,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떠나고 싶으면 떠났던 여행. 이는 다소 우울한 마음으로 떠났던 그의 마음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었다. “여행중 공연하는 친구들을 많이 많났거든요. 처음 보면 전혀 배우 같지 않은 사람들인데 무대에 올라서면 너무 달라지더라구요. 그리고 이 친구들은 배우가 되기 위해 5년 이상의 긴 세월을 투자해요. 기본적으로 탭댄스에 마임, 춤, 노래 등 못하는 게 없고 모든 걸 스스로 연출해요. 연출자는 지시하는 사람이라기보다 함께 상의해나가는 사람 정도? 그러다 문득 나를 봤어요. 어린 시절 우연히 배우가 되었고 모두 그렇듯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공부하고, 또 자연스럽게 연기자로 살아가고. 사실 그런 게 ‘진짜배우’는 아닌데 말이죠.” 잠시 바쁘게 내달았던 폐달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비로소 자신이 보였다. “결국 얼마나 오래 연기할 수 있는가는 얼마나 오래 순도와 감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인 것 같아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할 순 없지만 노력할거구요.”
<신라의 달밤>은 <닥터K> 이후 3년 만에 선택한 영화다. 여행 중 단숨에 읽어내린 재미있는 시나리오 때문에 김혜수는 “오직 메뉴가 라면뿐인” 라면집 사장 민주란이 되기로 결심했다. 민주란은 소심한 모범생에서 깡패가 된 영준(이성재)과 고교‘짱’에서 순진한 체육교사가 된 기동(차승원) 사이에서 묘한 사랑의 트라이앵글을 만들어가는 솔직하고 따뜻한 평범한 여자. <신라의 달밤> 촬영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모두 이루어질 예정이라 오는 25일부터 보름간은 수학여행 아닌 ‘촬영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또한 “연기에 임하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차승원과 “보여지지 않는 상황조차 철저히 분석하려고 드는 성실한” 이성재 덕분에 “자극도 많이 받고 재미도 있을 것 같다”며 김혜수는 앞선 촬영에 대해 잔뜩 기대를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