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나는 이 지면에서 배두나에 관해 극찬을 한 적이 있다. 이번에 다시 한번 배두나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감독이 여러 번 가위질을 한데다가 배급사쪽에서도 수차례 미뤄왔던 <공기인형>이 드디어 6월 프랑스 극장가에서 선보이게 된 이 시점에 말이다.
배두나와 나, 우리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쉽게 잊어도 좋을 만한 영화에 결코 쉽게 잊혀지지 않는 장면 하나가 있었다. 젊은 여배우가 레코드 가게에서 달콤한 음악을 들으며 한 젊은 남자 배우를 뚫어져라 주시하는 장면이다. 내가 그 배두나를 극찬한 지 6년이 흘렀고, 그 뒤 나는 각종 지면에 100여개 이상의 칼럼을 썼지만, 배두나는 여전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여배우로 남아 있다. 배두나가 한국의 가장 위대한 여배우라는 말이 아니다. 포상이나 트로피, 뭐 그런 얘기는 VIP 심사위원들 소관이라 해두자. 내가 보기에 한국에는 배두나만큼 독특한 활동 경력을 가진 배우가 없다. 형태가 단단하고 까다로우면서도 아주 독창적인 그녀의 출연작품 목록이 거의 예술작품 수준에 이른다는 점, 바로 이 점에서 나는 배두나가 유일한 배우라는 거다. 그녀의 목록에는 좋은 작품만 들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실패작도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리스트에서 한몫을 하고 있다. 최근 3년간 배두나는 일본영화 두편에 출연했다. <린다 린다 린다>에서는 일본 대학 캠퍼스에서 방황하는 한국 학생으로, <공기인형>에서는 고무풍선 인형으로 나온다. 그건 배두나가 동해 건너편 나라에서 대사가 한정된 역할들을 만났다는 말이 된다. 배두나는 이렇게 도쿄 여행을 통해 그녀가 수년 전부터 몰두하던 ‘기교표현 수단으로서의 몸’이라는 문제에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2000년대 초 배두나는 마치 무용수와 같이 화면을 완전히 점령하는 ‘움직임의 배우’로 군림했다. 그녀가 소화하는 연기 하나하나는 무엇보다 마임을 연상케 했다. 첫 작품 <링 바이러스>에서 그랬고, 그 뒤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배구선수, <괴물>에서 양궁선수 등 운동선수 역할을 맡았을 때도 그랬고, <플란다스의 개> <튜브> <고양이를 부탁해> 등 발로 뛰어 추격하는 장면이 나오는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기인형>은 배두나를 위해 쓴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배두나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는 있다.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가 안나 카리나를 위한 작품이었듯 말이다. 도쿄의 피노키오 배두나는 기적처럼 영혼을 소유한 플라스틱으로 된 존재를 연기하는데, 작품은 어떻게 인물이 외부세계와 사랑과 죽음과 섹스를 발견하는지를 그리고 있다. 현대판 동화 <공기인형>은 또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직 일본 사람만이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에로물이다. 이 작품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적어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 이후 한번도 본 적 없는, 영화사상 획기적이랄 수 있는 섹스장면을 만들어낸다. 파트너에게서 공기를 완전히 빼낸 뒤, 작은 밸브를 이용해 다시 공기를 팽팽하게 넣어주는, 절대적 오르가슴을 그린 장면이다.
나는 그 기가 막히고 절묘한 장면을 주의를 기울여 관찰한다. 마치 한 뭉텅이의 더러운 빨래 더미가 된 듯 침대 위의 배두나는 완전히 구겨지고 형체조차 없는 플라스틱 덩어리로 변한다. 그런 모습을 한 배두나의 배 위에서 남자가 공기를 불어넣어주자,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그녀의 몸은 생기를 되찾고, 그녀의 얼굴은 진짜로 발갛게 달아오른다. 이 장면이 바로 배우 배두나를 말해주는 장면이다. 숨을 거듭할수록, 역할을 맡을수록, 그리고 해가 갈수록 자신의 모양새를 만들어나가는 배우 배두나. 맞다, 배두나는 바로 그렇다. 자신의 몸으로 기가 막힌 연주를 하는 트럼페티스트. 배두나는 바로 한국영화의 디지 길레스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