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박희순] 동티모르에서 희망을 건지다
2010-06-24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최성열
<맨발의 꿈>의 박희순

“원 데이, 원 타임, 원 달러.” 이 남자, 참 못났다. 사업이란 사업은 다 말아먹고 남의 나라 와서는 순진한 아이들을 상대로 축구화 할부 장사를 하려 한다. <맨발의 꿈>의 전직 축구선수 김원광 얘기다. 이 비호감 캐릭터에 정 많고 순수한 어른 아이의 모습을 덧붙이는 건 온전히 배우 박희순의 몫이다. 한국어-인도네시아어-영어가 뒤섞인 현란한 말투로 아이들의 혼을 쏙 빼놓다가도 어느 순간엔 외려 그들의 진심에 매료돼 눈물 짓는 김원광을, 박희순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그 이상의 대안은 찾기가 힘들 정도로. 그러나 힘 하나 들이지 않은 듯한 그의 ‘생활 연기’는, 사실 무수히 많은 ‘처음’을 견뎌냈기에 가능했다. 외국 배우들과 함께한 첫 영화, 원톱으로 나선 첫 영화,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첫 영화, 동티모르에서 촬영한 첫 한국영화라는 타이틀을 거치며 박희순은 배우로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경험을 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맨발의 꿈>은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으나 얻은 것도 많은 작품이다.

맨땅에 헤딩

박희순은 축구를 잘 모른다. 기아 팬이라 야구는 곧잘 보지만, 축구의 경우 국가대표전이나 박지성 선수의 경기가 있을 때에만 반짝 관심을 보이는 정도다. 그런 그가 축구용어를 줄줄 읊고 전술까지 꿰고 있어야 하는 동티모르의 유소년축구단 한국인 코치에 관심을 보인 건 캐릭터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그럴 만도 하다. <가족>의 악랄한 깡패 창원부터 <귀여워>의 순박한 건달 ‘막내’, <얼렁뚱땅 흥신소>의 사연있는 건달 백민철과 <작전>의 기업형 조폭까지, 박희순이라는 이름 옆에는 늘 ‘센’ 캐릭터가 따라붙었다. 일부러 그런 역할만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러브 토크>나 <우리집에 왜왔니>로 변화도 시도해봤으나 대중은 그가 강렬한 역할로 등장할 때에만 눈길을 주었다. <맨발의 꿈>은 이러한 시점에 박희순이 새롭게 찾은 돌파구였다. “사람냄새 나는 작품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작전>이나 <10억>처럼 세지 않은, 풀어진 모습과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줄 지점이 있는 작품.” 작품 경력의 전환점을 애타게 기다리던 배우는 그렇게 동티모르에서 희망을 찾았다.

하지만 먼 곳에서 엿본 희망의 대가는 꽤 컸다. 먼저 더위가 문제였다. 현지 사람들도 하던 일을 멈춘다는 정오의 불볕더위에 촬영을 감행하느라 머리가 노랗게 탈색됐다. 소통의 문제도 있었다. 현지 아이들을 배우로 쓴 탓에 카메라는 늘 멀찍이서 이들을 비췄다. 긴장을 풀기 위함이었다. “촬영 중이니 통역이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와 아이들뿐이었는데, 아이들은 1, 2회 정도 찍으니 장난치기 시작하고요. 한두명이면 통제할 수 있겠는데 열댓명이 동시에 그러니까…. (웃음)” 아이를 다뤄본 경험이 없는 남자와 미운 일곱살들의 전쟁. 승자는 불 보듯 뻔하다. 패자가 감내해야 할 시간은 “섬에 갇힌 듯 외로웠다”.

준비된 애드리브

낯선 타지에서 감당했어야 할 여러 가지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속에서만큼 박희순은 승자다. 무엇보다 ‘준비된 애드리브’의 활약이 눈부시다. “랑숭랑숭 사떡같이 패스를 해야지 왜 밍기적거리고 있어!”처럼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 영어가 절묘하게 뒤섞인 김원광의 말투는 100% 애드리브의 산물이다. “<맨발의 꿈>의 실제 모델인 김신환 감독님이 아이들 지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요, 그런 말투를 쓰시더라고요. 당장 인도네시아어 대본, 영어 대본을 구해서 재미있는 단어를 뽑아 재구성했죠.” 그러나 대사를 맛깔나게 소화하는 비결은 애드리브의 창의력보다 체화된 운율에서 나온다. 영화배우로 데뷔하기 전, 극단 목화에서 12년간 내공을 다진 박희순은 대사를 칠 때에도 3-4조, 4-4조의 호흡을 강조하던 오태석 연출가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선생님께선 일상적인 말이나 정형화된 대사에서도 운율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셨어요. 그게 몸에 체화되다 보니 애드리브를 할 때에도 그런 부분을 가지고 가나 봅니다. 그런데 ‘랑숭랑숭’이란 단어, 한국말의 ‘얄리얄리얄랑셩’과 비슷하지 않나요?” 배우 박희순의 장점이 왜 대사에 있는지를 이제야 알겠다.

한편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든 아이들과 깊은 교감을 나눈 건 이번 영화의 수확이다. 특히 영화의 유일한 홍일점이었던 소녀 조세핀을 보며 처음으로 ‘언젠가 저런 딸을 낳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동티모르의 할렘가에서 정글도와 짱돌을 든 건달들과 마주쳤을 때도, 가장 먼저 챙긴 사람은 조세핀이었다. “제 인생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건 처음이었는데, 그때도 조세핀이 먼저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애부터 안고 도망갔죠. 그 뒤로 조세핀이 제 곁을 떠나지 않더라고요.” 촬영을 마치고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건넨 뒤 며칠간은 우울하기까지 했다. 이 지극정성을 보아하건대 어쩌면 몇년 뒤엔 조세핀을 닮은 박희순의 예쁜 딸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관객의 소리

배우로서는 후회없이 당당하게 찍은 작품이지만, <맨발의 꿈>의 개봉을 앞둔 지금 박희순의 고민은 관객의 평가에 머물러 있다. 좋게 보든 신랄하게 비판을 하든 한명이라도 더 많은 관객이 봐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븐 데이즈>를 찍으며 행복했던 이유는 흥행이 잘된 것도 있지만 그 영화를 보신 분들이 제 전작들까지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셨기 때문이에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관객이 못 받아들이는 지점이 무엇인지 알아야 다시는 그 오류를 범하지 않잖아요. 전 다 찾아봐요. 블로그, 카페 들어가서 제가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다 찾아봅니다.”

이토록 소통의 창구를 활짝 열어놓고 자기 성찰의 끈을 놓지 않는 배우의 차기작은 박훈정 감독의 <혈투>다. 청나라 군사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는 패잔병 역할이다. 링거만 네번 맞으며 찍었다는 첫 사극의 촬영담을 풀어놓으며, 박희순의 눈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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