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한국영화 속 북한, ‘실재’가 없네
2010-07-08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포화속으로>가 드러내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편집증적 진실

<포화속으로>를 보며 난 초등학생 때 읽었던 만화책 한권이 떠올랐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충성>이라는 제목의 만화였는데, 한 어린 학도병이 북한 탱크에 수류탄을 던져놓고 함께 전사할 때가 그 하이라이트였다. 그리고 아들의 편지가 어머니에게 전달되는 장면이 에필로그로 덧붙여 있었던 것 같다. <포화속으로>는 마치 25년 전의 그 만화책을 다시 꺼내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려줘 고맙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영화가 낡고 구태의연하다는 뜻이다. <포화속으로>의 낡은 가치관과 그 표현 방식에 관객이 쉽게 동화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차라리 스펙터클만 소비하는 편이 훨씬 건전한 관람법이다). 그럼에도 <포화속으로>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는 영화 자체보다는 한국전쟁과 분단 소재의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이라는 국가와 북한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이후 등장할 ‘유사품’에 대한 올바른 감상법을 위해서라도.

질문하지 않는 자동기계

한국전쟁을 소재로 할 때 한국전쟁에 얽힌 역사를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역사영화는 선지식의 형태로 이미 구성된 역사적 사실에 의존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가 구체적으로 다루는 특정 전투나 상황, 인물의 개별성 정도를 일반적 지식에 적절히 녹여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포화속으로>는 그 개별성을 확보하는 데 너무도 게으르다. <포화속으로>가 자신이 소재로 한 사건을 극적으로 구성하는 데 무관심한 이러한 태도는 한국전쟁에 얽힌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갈등을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포화속으로>가 알지 못했던 것은 이데올로기를 회피하려는 태도 자체가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사실이다. <포화속으로>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대립과 갈등을 삭제한 채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어간 학도병들을 애도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반대로 역사를 재현하는 현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영화로 완성되고 말았다.

과거의 역사란 스스로 발화하지 못하는 벙어리, 그러니까 언제나 현재의 입을 빌려서만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다. 역사서술이 궁극적으로 ‘현재가 바라보는 역사’인 것은 이 때문이다.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흔적을 지운다고 해서 현재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오히려 그 태도가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학도병이라는 <포화속으로>의 소재와 그 내러티브 전개 과정은 2000년대 초반 등장했던 일련의 향수 영화를 상기시킨다. 이들 영화는 소년을 극의 중심에 둔 뒤 1970, 1980년대의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서사를 구축함으로써 군사정권으로 얼룩졌던 사회적 문제를 일정 정도 피해가려 했다. <포화속으로> 역시 아이도 어른도 아닌,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학도병을 극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당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대한 영화적 개입을 피해가려 한다. 그런데 그 죽음의 원인에 눈감는 이러한 행위는 애도의 대상을 오히려 무의미한 자동기계로 전락시키고 만다. 자신에게 특정한 행동을 요구하는 국가에 대해 아무런 질문과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자동기계.

<포화속으로>의 학도병에게 한국이라는 국가는 어떤 질문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하는 대상이다. <포화속으로>는 애초에 학도병이었거나 학도병으로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이들을 극의 중심에 세우지만, 그들이 왜 죽음을 감내하면서까지 국가를 지키려 하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영화는 애초에 국가를 위해 행동하기로 결정된 자동기계로서 그들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대타자(국가)에 대한 질문과 의문이 사라졌을 때, 주체는 주체로서의 자리를 상실한다. 주체성 자체가 히스테리적이라고 한다면, 즉 주체성이 타자에 대한 의문 속에서 출현하는 것이라면, <포화속으로>는 ‘도착적인 탈주체’에 대한 묘사에 가깝다. 영화 속 학도병은 국가라는 대타자의 의지를 위한 도구로 스스로를 위치시킴으로써 국가(대타자)에 질문 속에 구성될 수 있는 주체성을 박탈당한다. 주체가 스스로를 상실한 대가로 국가를 얻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 그만큼 위험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주체를 지워버린 국가는 파시즘적이거나 전체주의적인 국가에 불과하다(천안함 사태에 대해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질문의 능력이 거세된 채로 국가에 종속된 자들은 한명의 인격적 주체로 행동하지 못한다. 영화 후반부 북한과 학도병의 전쟁 시퀀스, 특히 한 학도병이 수류탄을 들고 북한의 탱크 속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에 드러나는 죽음의 스펙터클이 (강병진의 지적처럼)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 희생”(<씨네21> 758호)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국가를 위해, 그리고 스펙터클을 위해 무비판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전시하는 자동기계. 학도병을 철저하게 탈주체화한 대가로 그 자리에 국가를 앉히는 것만큼 이데올로기적인 행위가 또 어디 있겠는가?

‘북한만 제거된다면…’이라는 판타지

학도병 중대장인 오장범(최승현, 또는 T.O.P)은 영화 곳곳에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지만, 그 편지는 어머니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끝을 맺는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편지는 가장 이상적인 수신자인 관객에게 전달된다. 오장범의 편지의 ‘진짜’ 내용은 쓰여진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쓰는 그 행위 속에, 더 정확하게는 그 편지가 어머니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역설적으로 편지의 전달을 불가능하게 한 장애물이 편지를 가장 이상적인 수신자에게 배달하도록 한다. 물론 그 장애물은 전쟁이고, 그 원인인 북한이다. 한국영화에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타자 중 하나인 북한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다양한 모습을 띠면서 우리 앞에 등장한다. 그것이 현재의 북한을 재현하는가, 한국전쟁 속의 북한을 재현하는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한국영화에서 북한이라는 소재는 영화적 상상력의 화수분이다.

그런데 이처럼 한국전쟁이나 분단 소재 영화에서 북한이 스크린에 소환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장애물로서 자리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에서 재현된 북한은 어디까지나 ‘상상된 타자’다. 특히 남한사회를 위협하는 타자로서 북한을 상상할 때, 이는 실재로서의 북한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남한사회 내부의 문제를 전이시킴으로써 이뤄진다는 것, 즉 한국영화 속 북한은 그에 대한 남한의 공포나 불안이 투영된 것이라기보다는 남한사회 자체가 갖는 불안과 공포를 북한에 떠안긴 결과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기원을 연 <쉬리>(1999)다. <쉬리>에서 한쪽은 소비의 천국인데 다른 한쪽은 생존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쉬리>는 이러한 남북의 대립 속에 박무영(최민식)의 분노를 새겨놓았다. 그런데 이러한 분노가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경제적 위기와 무관한 것일까? 그러니까 박무영의 분노가 자신들이 박탈당한 향유를 특정 계급만이 여전히 쾌락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에 대한 남한사회의 계급적 상실감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포화속으로>는 남한과 북한을 통합과 분열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남한은 계급과 세대의 통합을 일군다. 마치 학원물 영화를 상기시키는 듯한 학도병 내부에서의 분열은 계급적 분열에 가깝다. 가난해서 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한 구갑조(권상우)를 오장범과 대치시킬 때, 학도병 내부의 서사는 계급의 분열을 넘어선 통합의 서사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그 결과는 계급간의 통합이다. 또 다른 분열의 통합은 세대간의 대립 속에서 이뤄진다. 어떤 면에서 <포화속으로>는 버림받은 소년들에 대한 영화다. 강석대(김승우)를 비롯한 군인들이 학도병만을 포항에 남겨두고 떠날 때, 소년들은 홀로 서는 법을 배우도록 종용받는다. 물론 그 결과는 죽음이지만, 이는 국가를 위한 죽음으로 포장된다. 현재적 관점에서 봤을 때, <포화속으로>는 희생자에게 또 다른 희생을 강요하는 영화다. 이는 기성 세대와 청년 세대간의 갈등에서 88만원 세대로 지칭되는 청년 세대에 다시 한번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과 유사하다. ‘어떤 질문도 없는’ 탈주체화된 그들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그 희생을 자신의 것으로 묵묵히 수용한다. 그럼으로써 분열된 사회는 또다시 통합되고…. <포화속으로>의 남한사회가 통합의 서사로 나아간다면, 북한은 분열의 서사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통합의 대척점에 있는 분열의 위협을 북한 위로 새겨넣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수령 동지의 말만을 추종하는 박무랑(차승원)과 당의 명령을 추종하는 리안남(라경덕)의 대립은 끝내 화해되지 못하고, 자멸의 길을 걷는다.

모든 분단 소재 영화를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로 많은 영화가 남한사회 ‘내부’의 적대, 대립, 갈등을 남한사회와 그 외부의 북한간의 문제로 전치하고, 그럼으로써 북한을 상상된 타자로 완성시킨다. 즉, 내부의 문제가 내부와 외부의 대립으로 전환되는 메커니즘이 작동할 때, 북한은 남한사회가 통합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위해, 또는 통합되어 있다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 내부의 분열, 적대, 대립 등을 그 외부에서 떠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영화가 주는 궁극적인 판타지는 이런 거다. 북한만 제거된다면… 이라는 가정 속에서 이뤄지는 통합의 판타지. 하지만 이는 외부의 적이 사라진다고 해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부의 적대가 외부의 대상으로 전이된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한국영화에 있어 북한은 남한사회 내부의 적대적 분열을 가려주는 스크린이자 영원한 우방인 셈이다. 결국 반공 이데올로기의 편집증적 태도의 진실은 간단하다. 편집증의 진실은 그것이 맞서 싸우고 있는 위협이자 파괴적 음모 자체에 있다. 달리 말해, <포화속으로> 같은 반공영화에서 우리가 북한과 싸운다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과, 그 내부의 적대에 눈감은 채로 그것을 통합의 판타지로 은닉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의미이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편집증적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감상적인 짓’의 문턱

그렇다고 우리가 북한을 위협적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에 대해 ‘대립하는 국가로서의 증오’와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감’이라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천안함 사태 이후 북한에 분노하던 이들이 월드컵 축구를 보며 북한을 응원하는 것을 상기해보라). 가령 <의형제>에서 드러난 그림자(전국환)와 송지원(강동원)간의 분열은 우리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에 가까우며, 그림자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서로에 대한 이해는 ‘감상적인 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감상적 태도는 무조건적이지 않다. 즉, 상상된 타자인 북한에 대해 우리가 포용할 수 있는 폭은 어디까지일까, 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포화속으로>에는 학도병의 총구가 북한군 앞에서 망설이는 장면이 두번 등장한다. 죽어가면서 어머니를 부르는 북한 군인을 마주하는 장면과 학도병에게 총을 겨눈 북한군 병사가 어린 소년임이 밝혀졌을 때가 그것이다. 북한에 대한 호의적 태도는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휴머니즘적 관점과 그들이 남한사회보다 열등하며 동정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관점하에서 가능하다(사실 이 둘은 동일한 것이지만 난 후자쪽에 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이 ‘감상적인 짓’의 한계다. 우리는 북한을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 우리가 호혜를 베풀 수 있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일 때 연민과 공감, 응원의 대상으로 ‘감상적인 짓’을 한다. 만약 그들이 우리와 동일한 어른으로 느껴진다면, 과연 그 감상적 태도를 동일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에서 재현된 북한은 계속적으로 변화해왔지만, 이제 다시 한번 넘어서야 할 문턱을 만난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바라봄으로써 감상의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태도 말이다. 그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북한은 실재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상상한 타자로 여전히 머물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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