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로 SF 호러의 신선한 경지를 개척한 캐나다의 천재 SF 주조사 빈센조 나탈리 감독은, 7년 전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한편의 충격적인 코믹 SF물 <지구를 지켜라!>를 연출한 장준환 감독에게 받은 충격을 잊지 않았다. 새 영화 <스플라이스> 홍보차 한국을 찾게 된 그는 짧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장준환 감독과의 만남을 주선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했다. 장준환 감독과의 만남에 대해 그는 전세계에 있는 ‘긍정적으로 정신 나간’ 이들과의 동지적 연대를 만드는 일 중 하나라 설명했다. 여전히 마이너한 장르로 취급받는 SF 장르에 도전하는 일에 대한 두 시간여의 고충 토로기. 두 감독의 SF 연대기는 유쾌하고 또 진지했다.
빈센조 나탈리 몇년 전 토론토영화제의 ‘미드나잇 매드니스’ 섹션에서 당신 작품 <지구를 지켜라!>를 봤다. 영화 보고 질투를 느꼈다. SF와 코미디를 결합하는 건 쉽지 않다. 시도는 있었지만 결과가 좋은 작품은 흔치 않다. 그런데 당신의 영화는 완벽했다.
장준환 그랬나. 그때 영화제 참석하고 워낙 정신이 없어 당신을 눈여겨보지 못했다. 미안하다. (웃음)
빈센조 나탈리 기억을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때 영화제에서 <지구를 지켜라!>는 최고의 화제작이었으니까. 관객 호응이 대단했다. 거의 광적인 반응을 보였으니 정신없었을 거다.
장준환 그렇지만 나는 이전부터 <큐브>로 당신을 알고 있었다. 공포영화로서의 새로운 경지라는 측면에서도 훌륭하지만, 결국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그런 부분들이 맘에 들고 좋았다. 광장공포증을 다룬 코믹SF <낫싱>도 봤다. 한국에서 개봉은 안 했지만,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빈센조 나탈리 <지구를 지켜라!>가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SF와 코미디를 결합했다는 점에서 내 영화 <낫싱>과 <지구를 지켜라!>는 비슷한 구석이 많다. 그런데 <지구를 지켜라!>가 확실히 한수 위다.
우린 미래를 보고 영화를 만드는데
장준환 과찬이다. 사실 오늘 <스플라이스>를 보고 예상은 했지만, 깜짝 놀랐다. <스플라이스>가 전하는 이야기는 나 역시 관심이 있었다. 인간이 생명체를 탄생부터 다룰 수 있다는 소재는 얼마 전 제작 준비하다 보류된 <파트맨>이란 영화에도 담고 싶었던 부분이다. 인류의 기원,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과학과 어떻게 결합되고 드라마화되는지. 장르적으로도 미묘한 선들을 따라 넘어가더라. 무척 흥미로웠다. 어떻게 이 이야기를 착상했나 궁금해졌다.
빈센조 나탈리 너무 오래돼서 왜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웃음) 처음 영화화하겠다고 한 게 12년 전이니까. 시작은 쥐였다. 95년 <BBC>에서 세포실험을 통해 등에 인간의 귀가 이식된 쥐가 탄생했다. 그걸 보면서 이 안에 분명 인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장준환 나도 뉴스에서 봤다. 굉장히 충격적이었라. 요즘은 그런 변종 생명체가 자주 나온다. 얼마 전엔 의학다큐멘터리에서 암 덩어리에 인간의 이가 있는 것도 봤다. <스플라이스>에 나온 초기 생명체랑 비슷한 형태였다. 최근 유전자 조작 기술이 발달해서 상상하지 못했던 변종 생명체가 나온다. 그래서 한편으론 좀 안타깝다. <스플라이스>가 십수년 전 기획했을 때 바로 만들어졌더라면 관객으로선 더 충격적이고 재밌었을 것 같다.
빈센조 나탈리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게 우리가 하는 비즈니스의 아이러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미래를 보고 있는데, 제작사들은 과거를 보고 있다. 결국 영화를 만들 게 되는 시기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소재가 대중에게 일반화된 시점이다. 영화를 제작할 때쯤 되니 바로 직전에 영국에서 동물과 인간의 하이브리드가 합법화되고, 미국에서는 인공 생명체를 만들어서 유전자를 컴퓨터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스플라이스>와 흡사했다. 한발 늦은 거다. 그래도 영화의 이야기가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는 걸 뒷받침해준다는 점에선 긍정적이다.
빈센조 나탈리 궁금한 게 하나 있다. 한국영화산업에서 SF와 코미디를 결합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어떤 도전인가. 할리우드에선 이런 영화에 굉장히 부정적이다. 이른바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영화라고, ‘죽음의 입맞춤’이라는 소리까지 있다.
장준 물론 한국에서도 힘들다. <지구를 지켜라!> 때는 영화만 재밌으면 돼, 내가 재밌고 관객도 재미있어야 할 텐데, 라는 생각으로 별 생각없이 했다. 그런데 관객을 모으는 데 실패했고, 안타깝게도 그 결과 알레르기 같은 게 생겼다. 준비 중이었던 <파트맨>도 SF였는데, 제작자나 투자자들이 보기에는 위험하다고 생각하더라. <지구를 지켜라!>는 잘 만들었다고 인정하지만, 동시에 그것보다 더 장르적이고 안전한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한다. 그러니 어렵다. 그렇지만 새로운 걸 만들어야 희열이 있는 걸 어쩌겠나.
빈센조 나탈리 우리 둘 다 마조히스트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웃음) 내 영화 역시 미국에서 평은 좋았지만, 흥행이 잘된 편은 아니다. 어떤 면으로 보자면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에 힘든 ‘니치’(틈새)영화라고 볼 수 있으니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경기 불황에 사는 것도 힘이 드니 영화도 푸근한 걸 원할 수밖에. 사람들은 ‘드렌’(<스플라이스>의 변종 생명체)을 껴안기보다는 테디베어를 껴안고 싶어 한다. 그러니 갈수록 영화 만들기가 힘들다.
관객에게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해
장준환 이야기 자체가 고갈인 시대다. 스튜디오들이 계속 비슷한 이야기를 막대한 시각효과만으로 사이즈를 늘려서 하고 있다. 제작자들도 이 상황에 많이 피곤하고 지쳐 있고, 한 발짝 나아가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안타깝다. 사실 ‘이 길은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제작한 영화가 엄청난 히트를 하고 돈을 버는 경우도 있지 않나. 상업적인 것과 한발 앞선 영화를 만드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빈센조 나탈리 한편으로는 시장 원리도 이해가 간다. 할리우드영화는 만드는 데 돈도 많이 들고 마케팅비도 엄청나다. <스플라이스>만 봐도 제작비가 2500만달러였는데, 미국 배급을 한 워너에서 마케팅비로 3천만달러를 책정했다. 난 내 영화가 2천달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생각지도 않은 사이 영화의 사이즈가 커지니 거기에 사용된 비용을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스튜디오들이 안전을 외치는 게 이런 이유일 거다.
장준환 야구를 좋아해서 야구로 비유를 해보자면 이렇다. 스튜디오들은 삼진을 많이 당해도 홈런 한방을 치는 선수를 원하는 게 아니라 계속 일루, 일루 조금씩 나가는 선수를 원하는 것 같다. 당신은 <큐브> 이후 할리우드쪽 제안도 많았는데도 진출하지 않고 그 자리를 고수했다. 스튜디오 시스템에 연연해하지 않았다고나 할까.
빈센조 나탈리 난 좀 바보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다. 왜 돈 벌 기회를 다 마다했을까. (웃음) 아무래도 드라마 때문인 거 같다. 난 드라마 자체를 끝없이 고민한다. 그런데 할리우드에서 보내는 시나리오의 80%는 리메이크 아니면 속편이다. 그런 시나리오를 보면 나 스스로 흥분하기 힘들다. 물론, 제작비를 넉넉히 쓸 수 있는 건 흥미롭긴 하다. <스플라이스>의 제작비도 나에겐 굉장히 큰돈이었지만, 사실 이런 크리처물을 만들기엔 적은 돈이다. 그러니 요즘엔 유혹도 느껴볼까 싶다. (웃음)
장준환 나도 예산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드는 사람에게 그건 절실하다. 어떤 흥미로운 부분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충분한 예산이 있을 때는 제작이 수월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과연 흥미로울 수 있냐는 거다. 다른 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감독이라면 관객에게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 이 영화를 끝까지 만들었을 때 만나게 될 짜릿함. 그게 뭔지 모르지만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빈센조 나탈리 맞다. 만드는 입장에선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 그 영화를 계속 반복해서 봐야 하니 사랑하지 않으면 미치는 거다. (웃음) 그런 면에서 <지구를 지켜라!>는 독특하고 완성도도 높고, 연기도 좋았으니 반복해서 보더라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겠다. (웃음)
장준환 <지구를 지켜라!>를 만들면서 길을 잃고 헤맨 경우도 많다. 너무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다행히 완성할 때까지 어떤 장면을 보더라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그랬다. 끝까지 내가 만들고 싶은 걸 쫓아가는 재미 말이다. 당신도 <큐브>라는 영화를 머릿속에 그렸을 때 얼마나 재밌었을까 싶다. 그 비전을 그냥 머릿속에 담아두고 흘려보내는 건 아깝다. <스플라이스>를 십년 넘게 포기하지 않고 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을 것 같다.
빈센조 나탈리 맞다. <큐브>를 극장에서 상영할 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폐쇄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화면에 보여주는 쾌감이 엄청나더라. <스플라이스>의 경우 인간과 유전자 변이체의 정사장면이 만든 감독으로서 가장 기대되는 장면이었다. 내가 보고 싶은 걸 만들고, 결국 관객과 볼 수 있는 게 긴 고뇌와 시간을 참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도에 대해 칭찬보다 비판을 하지만 막상 화면으로 내가 이룬 걸 볼 때의 쾌감은 그런 비난도 다 견딜 수 있게 한다.
SF 또한 기본바탕은 리얼리티다
빈센조 나탈리 지금 작업하는 옴니버스영화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SF 러브스토리라고 들었는데 사실 나도 그런 영화를 준비 중이다. 가상공간의 개념을 처음 정립한 SF작가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 로맨서>를 영화화한다. 사이버 펑크다. 당신 영화도 내 영화랑 비슷한 면이 있을 것 같다.
장준환 부산영화제 프로젝트인 옴니버스영화 <카멜리아> 프로젝트 중 한편인 <러브 포 세일>을 준비 중이다. 어떻게 보면 <스플라이스>와 연결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머릿속에 기억과 감정을 저장, 출력하는 융기(hippocampus)가 있다고 한다. 거기서 사랑의 감정과 기억을 빼내 저장할 수 있다. 근미래에 부유한 사람들이 남의 감정을 사서 가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럼 피부도 좋아지고 활력도 얻게 되는 거다. 일종의 마약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악용되고 사회혼란이 야기된다.
빈센조 나탈리 진행은 잘되고 있는가.
장준환 판타지는 가능하지만, 제대로 SF를 만드는 건 어렵다. 이번에 준비하다보니 왜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웃음) 사실 SF도 리얼리티가 필요하다. 아, 미래에는 저런 세계가 있구나 하는 기본바탕 말이다. 그 기본을 확보하는 데 드는 돈과 시간이 엄청나다. 일단 준비를 철저히 해서 제작비와 맞추든지 아니면 제작비에 맞게 스토리를 만들든지 결정이 필요하다.
빈센조 나탈리 우리 세대가 SF를 만들 때 힘든 게 그거다. 어릴 때 본 미래 과학적인 것들은 벌써 현실화된 것들이 많다. 당신이 근미래라고 말하는 건 결국 앞으로도 가능하다는 걸 내포하고 있다. <스플라이스>의 공간을 창조할 때도, 실질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에 영화적인 상상력을 부여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이 당신과 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세계 자체가 빠른 변화와 역동성을 보여주니, 그런 것들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SF에 미래가 있는 거다. 판타지의 렌즈를 통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준환 동감이다. SF나 판타지 같은 장르가 미래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하자는 것이 아니다. 결국 현실을 아주 재밌게 바라볼 수 있는 틀이다. 우화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틀, 거울 같은 게 아닐까. 판타스틱하고 과학적인 이야기 안에서 우리의 욕망과 현실을 더 재밌게 혹은 축약해서 혹은 강조해서 바라 볼 수 있는 거다. SF의 고전이 된 <블레이드 러너>만 봐도 로봇 이야기를 통해 인간성을 생각한다. 그게 SF를 만드는 재미다.
빈센조 나탈리 전적으로 동의한다. SF, 판타지, 공포를 저급한 장르로 보는 시각이 여전하다. 오스카 시상식에도 호러영화 부문은 없다. 물론 그런 부문이 없어서 오히려 더 좋다. 이런 영화들은 인간의 내면이나 사회적 이슈들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관객은 전혀 그런 의도를 가지지 않은 채 영화를 보러 가지만 결국은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이 장르들이 재밌는 거다.
논쟁을 부르더라도 결말은 충격적이어야
장준환 그래서 이 장르의 결론은 논쟁을 부르기도 하지만 중요하다. <지구를 지켜라!> 경우에도 처음부터 지구가 폭발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이 영화가 태어나면서부터 꼭 가져야 되는 거였다. 내가 뭔데, 아무리 내 영화지만 지구를 폭파시킬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끝까지 가져 간 이유는 어차피 이 영화가 외계인 영화 같지만 사실은 지구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플라이스> 역시 끝까지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왕 할 거면 더 치열하게 하는 게 맞다고 본다.
빈센조 나탈리 어떤 영화를 만들던 간에 자기가 만드는 장르를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리처물을 보는 관객의 기대치도 마찬가지로 존중해야 한다. 너무 빗나가면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장르 안에서는 충격적이어야 한다. <스플라이스>의 결론을 <E.T.>같이 아름답게 끝낼까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관객의 배신감이 컸을 거다. 이런 장르라면 충격적인 결말에서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우리도 모르지만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 그걸 영화관이라는 공동의 공간에서 내뿜는 것이다. 그런 작업을 또 곧 해야 하지 않을까. 당 신의 계획은 어떤가.
장준환 난 영화를 너무 오래 안 만들었지만(웃음), 천천히 가더라도 그 길을 가고 싶다. 일단 언급했던 다음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러브 포 세일>을 준비하다보니 단편으로 만들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장편으로 해볼까도 생각 중이다. SF가 아닌 드라마를 만들 생각도 있다. 어쨌든 계획을 말하려니 머리가 멍해진다. (웃음) 당신이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일 수 있는 기회나 운 같은 게 많이 생겨 한길을 갔으면 싶다. 이젠 돈도 좀 벌고. (웃음)
빈센조 나탈리 내가 구상하고 있는 생각들이 실현이 될지 안될지 모르겠다. 전세계를 다니면서 당신 같은 생각을 하는 다른 감독들을 또 만나고 싶다. 긍정적으로 정신 나간 감독들 말이다. (웃음) 그런 감독들을 만나면 힘과 희망을 얻는다. 일종의 형제애 같은 것 말이다. 할리우드라는 기업화된 영화시장에서 위기를 함께 느끼는 그런 동지를 많이 만나고 싶다. 오늘 대화 정말 즐거웠다. 다음 영화 때 또 만나서 이런 고충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