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이클립스>가 개봉한다. <씨네21>은 <트와일라잇>과 <뉴문> 개봉 당시 이 영화에 관한 뜨거운 팬덤 현상에 관해 입체적으로 기사화한 바 있다. 세 번째 시리즈 <이클립스>는 좀더 친밀하고 유머러스해졌다. 그러나 기본적인 감성은 변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관한 소녀들의 이례적인 열광에 관해 단상을 붙일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인기와 매력을 어떻게 볼까.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아저씨의 눈으로 보면 신선하지 않을까?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연관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는 게 곧 밝혀졌다. “이 시리즈는 소녀 취향이다”라고 누군가 단언하자 다들 동의했다. 그러자 누군가 이어 말했다. “그것에 관해서는 많이 써왔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영화와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필자가 써서 의외성을 주면 어떻겠나. 가령 아저씨가 보는 길티 플레저로서의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어떠한가.” 화살의 방향은 이제 엉뚱하게 바뀌었다. 소녀들과 가장 어울려 보이지 않을 사람은 누구인가, 아저씨 중의 아저씨는 누구인가, 그 오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피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당첨됐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소녀들에게 미안하다. 키다리 아저씨는커녕 키 작은 아저씨가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관한 어설픈 단상을 풀어놓게 된 사연은 이렇게나 순식간이었다. 그러니까 회의시간에는 딴생각을 하면 안된다.
다행히도 <트와일라잇>과 <뉴문>이 싫지 않았다. 환호까진 아니었어도 관심 가는 부분들이 없지 않았다. 텔레비전으로 뒤늦게 <트와일라잇>을 보았을 때 어떤 매력을 느꼈고 “애들이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네” 하고 뭔가 아는 척 혼잣말을 했던 기억도 있다. <뉴문>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저 멀리 서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자신의 할머니인 줄 알고 좋아하던 여주인공 벨라가 가까이 다가온 노인을 보고 미래의 나이든 자기 자신의 모습임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은 인상 깊이 남아 있다. 1편 <트와일라잇>이 장르적 균형감각과 하이틴물의 자극에 민감했다면 2편 격인 <뉴문>은 원작이 지닌 분위기를 좀더 숭배함으로써 오히려 실패작으로 취급받은 것 같다. 솔직히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재미를 말할 때는 만듦새의 편차를 논하기보다 원작에서 시작된 소녀들의 환호성이 어떻게 영화에서도 이어지는지 그 속내를 궁금해하는 편이 더 흥미롭겠다는 생각이다. 무엇이 소녀들의 환호성을 끌어내는가. 끝내 알지 못한다 해도 자리가 이렇게 되었으니 한마디 거들고 싶은 게 이 아저씨의 솔직한 심정이다.
뒤늦게 TV로 본 <트와일라잇>의 매력
먼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 출중한 외모의 남자 배우 로버트 패틴슨 때문인가. 일단 그런 것 같다. 개인적으로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크리스토퍼 워컨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청년의 외모는 창백하고 차갑지만 이성적인데다 연민까지 끌어내는 면모가 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뱀파이어 주인공에 제격이다. 게다가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의 행위는 관능적 성행위로 은유되어온 것이 사실인데 이 친구가 낮은 목소리로 대사를 던질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거절하기 힘든 구애의 행위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원작자 스테파니 메이어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조차 읽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알려진 것처럼 거의 모든 화제가 로맨스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벨라의 사랑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벨라에게 투영된 소녀들 자신의 사랑에 관한 어떤 욕망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어떤 관객은 여기에 관해 온라인상에 귀여니의 소설식으로 평해 놓았다. “다들 나만 좋아해. 그리고 내 속은 아무도 몰라.” 그 말은 적절하다. 혹은 툭하면 얼굴이 상기되고 거르지 않은 짜증을 내고 다니던 <미쓰 홍당무>의 여주인공 양미숙이라면 벨라를 보고 다른 식으로 심하게 말할 것이다. “네가 무슨 캔디냐. 다 너만 좋아하게.” 그것은 사실이다. 모두가 벨라를 좋아한다. 그것이 소녀들이 벨라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존재한다는 것이 더 흥미롭다. 모두가 벨라 때문에 곤경을 겪는다. 벨라가 뱀파이어 에드워드를 사랑하게 되고, 그들이 그것을 숙명으로 여기자, <뉴문>부터는 늑대의 혈족인 제이콥과의 삼각관계가 강력하게 형성되고 <이클립스>에 이르면 그 삼각관계는 정점에 이르게 된다. 꾸준히 이어지는 삼각의 릴레이. 그런데 삼각관계와 숙명적 사랑에 관해 말할 때 벨라가 사랑하지만 정작 사랑하는지조차 모르는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이제는 더 중요해 보인다.
너무 뻔해 보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벨라를 사랑의 열병으로 몰아넣은 대상인 에드워드와 제이콥에 관해 말할 때 잘 묘사되지 않는 인상 하나가 있다. <뉴문>에서 에드워드의 가족이 벨라의 깜짝 생일파티를 해주기 위해 모여 서 있을 때 혹은 <이클립스>에서 외부인을 기다리며 에드워드 가족들이 무리지어 서 있을 때, 그들의 자태와 패션 등이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나는 그들이 서 있을 때 어딘지 모르게 뉴욕 최상류층의 이야기를 다루는 <가십걸>의 포스터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에 비한다면 제이콥과 그의 가족은 인디언의 혈족이며 오두막에 가까운 허름한 집에 살고 있으며 웃통은 벗고 다니고 성격은 거칠고 투박하다. 세련되고 부유한 상류층 화이트칼라와 거칠고 투박한 블루칼라라는 대립구도가 <트와일라잇> 시리즈 안에 있다는 것이 때묻은 아저씨의 눈에는 중요해 보인다.
해선 안 되는 것에 대한 소녀들의 환상
오해가 없으면 좋겠다. 이건 벨라의 로맨스가 은연중 상류층 출세기로 점철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지금 이 말의 핵심에서 벗어난다. 그보다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중요한, 벨라와 에드워드와 제이콥의 삼각관계가 그녀를 사랑받고 사랑하게 만드는 모종의 대립구도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가령 하이틴 대 어른, 사람 대 뱀파이어, 늑대 대 뱀파이어, 나쁜 뱀파이어 대 착한 뱀파이어, 높은 지위의 뱀파이어 대 낮은 지위의 뱀파이어라는 식으로 겹겹이 대립 국면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문제의 원인이 된 벨라는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위반하고 뛰어넘어야 한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는 일관되게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것’이 대치하고 있으며 그것이 교차할 때 긴장감이 증폭한다. 특히나 벨라는 마치 그 규약들을 무너뜨리고 위험에 빠뜨리는,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새로 세우는, 일촉즉발의 사태 그 자체다. 그것이 벨라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식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벨라의 사랑을 그냥 사랑이 아니라 더 낭만적이며 더 숙명적인 것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벨라의 선택 때문이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을 완전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벨라 때문이다. 벨라는 에드워드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제이콥의 만류에도, 심지어 에드워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뱀파이어가 되기를 희망한다. 하이틴 문화에 대한 관습적 이해도의 차이에 따라 한국 소녀들과 미국 소녀들의 환호성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벨라의 사랑의 정체는 ‘무엇을 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을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그걸 하고 싶다’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이 <트와일라잇>의 로맨스를 영원하게 한다. 벨라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에드워드인지는 모르겠으나, 벨라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독자와 관객의 환상은 벨라와 에드워드를 둘러싼 그 장벽과 금지가 아닐는지. 그러니 벨라가 숙명이라고 말하는 것에 관해, 이 시리즈를 사랑하는 소녀들이 그렇게 믿는 것에 관해, 정작 사랑의 마음을 불러온 건 강력한 금지와 장벽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 것인가.
<트와일라잇>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판타지는 그것을 숙명에 대한 실현으로 뒤집어 읽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고전적 사랑에의 낭만성으로 대표되는 작품들. 로미오와 줄리엣 사이에 놓인 기나긴 밤 그러나 곧 오게 될 헤어짐의 새벽. 엘리자베스 베넷과 미스터 다아시 사이에 놓인 오해의 소용돌이(<오만과 편견>). 히스클리프와 캐시의 사이에 놓인 증오에 가까운 사랑(<폭풍의 언덕>). 당신이 남자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그와 당신 사이에 장애를 설치해야만 한다는 대중연애지침서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당하는 그것이 미국 소도시의 평범한 10대 소녀 벨라와 109살 먹은 뱀파이어 에드워드의 사랑으로 옮겨왔다.
아저씨도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좋다
<트와일라잇>의 원작자 스테파니 메이어는 소녀와 뱀파이어가 사랑에 빠지는 ‘꿈’을 꾼 다음 이 작품을 쓰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19세기에 꿈을 포함하여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을 분석하기를 즐겨했던 그 유명한 아저씨는 참고할 만한 말을 이미 해두었던 것 같다. “리비도를 최고조로 부풀리기 위해서는 어떤 장애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역사의 모든 시기에서, 만족을 가로막는 자연적 장벽이 충분치 않았던 어떤 곳에서건 인류는 사랑을 즐기기 위해서 인습적 장벽을 세웠다.” 어쨌거나 원작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의식의 세계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써내려간 식이니 우리는 그 아저씨의 말을 참고할 만하다.
물론 여주인공 벨라와 <트와일라잇>의 소녀들은 다르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뉴문>에서 벨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침대에 두고 잔다. 영화에는 제외되었지만 원작 <이클립스>에서 벨라는 <폭풍의 언덕>의 한 구절을 마치 경전처럼 읽는다. “만약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가 남는다면 나는 여전히 살아갈 거야. 하지만 다른 모든 게 남고 그만이 소멸한다면 이 우주는 아주 낯설어지겠지.” 벨라의 그 말을 믿고 싶다. 그 말은 아름답다. <이클립스>를 극장에서 본 날 벨라는 에드워드의 프러포즈를 마침내 받아들였고 극장을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된, 그러니까 미스터 다아시가 되고 싶었으나 남산 밑의 아저씨 중의 아저씨로 뽑힌 키 작은 아저씨는 잠깐 딴생각을 해보았다. 그나저나 이유는 모르겠는데 생각해보니 아저씨도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