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그 울림은 슬픔에서 비롯됐다
2010-07-22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범작으로 보이던 <하얀리본>의 한 장면에서 안도를 느낀 이유

영화가 시작하자, 암전된 화면 위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완전히 사실인지는 모른다. 일부는 전해 들은 이야기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많은 것들이 애매하고 질문은 남아 있다.” 주의 깊게 생각할 단어는 ‘애매함’이다. 그건 또한 감독 미카엘 하네케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는 “급진적으로 해답을 부정할 때, 관객은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나설 것”(<씨네21> 760호)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평들도 그 점을 미덕으로 꼽는다. 알려진 대로 스릴러의 외투를 빌리고 있지만, 누가 사건의 범인인지에 대한 답을 밝히지 않는 설정에 대해 충분히 납득한다는 견해들이다. 낯설지 않다. 하네케는 자신의 서사 안에서 ‘누가 그랬는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혹은 그것을 회피하거나 중시하지 않아야 된다는 일종의 원칙이 있는 감독이다. 그는 그것이 역사와 현실 속에서 영화를 만들 때, 감독으로서의 윤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전작인 <히든>에서도 부르주아 중산층 가정을 공포로 균열하는 비디오테이프를 도대체 누가 보냈는지는 끝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네케 역시 그것이 의도였다고 밝힌 바 있다. 정말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은가? 물론 그의 의도가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의 장르적 쾌감에 대한 거부이고, 관객 스스로의 사유를 위한 선택이라면 어느 정도는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히든>에 대한 우호적인 평들, 특히 최근 <하얀 리본>에 대한 한결같은 극찬이 하네케의 위와 같은 의도를 거리낌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려 할 때 어떤 불편함이 있다.

물론 <히든>과 <하얀 리본>은 다른 영화다. 나는 <히든>이 평론가 허문영의 지적처럼 하네케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누가’ 악몽의 비디오테이프를 부르주아 가정에 보냈는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한 영화라는 데 동의한다(<씨네21> 547호). 그 질문을 영화를 지탱하는 텅 빈 질문으로 여길 때, 달리 말해, 그 질문의 강력함에 시종일관 몸서리치면서도 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을 애초 불가능성 안에 가둬버릴 때, 여기에는 결국 체념만 남게 된다. 세상이 명확한 인과관계로 이루어지고 모든 문제에 답이 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 시대에 그걸 믿는 영화는 오히려 위선에 가까워진다. <히든>의 태도를 지지할 수 없는 건 영화가 세상 안으로 질문을 안고 들어올 때, 답도 함께 안고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끝내 자신의 질문을 무화시키고 말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러니까 <히든>이 결과적으로 답을 구하는 과정을 하찮게 여겼다는 점은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공동체의 부도덕

<하얀 리본>의 경우는 좀 다른 맥락에 놓인다. 하네케의 말처럼 이 영화는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추리하는 데 목적을 둔 이야기가 아니며 이에 수긍할 만하다. 의사의 낙마사고가 일어나고, 소작농의 아내가 추락사하고, 남작의 아들과 산파의 장애를 가진 아들이 집단 폭행을 당했어도, 이 사건들의 배후를 파헤치는 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우선 영화가 추리 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영화 속 마을 사람들 또한 사건의 강도에 비해 사건의 배후를 탐문할 생각이 없으며(경찰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단지 의례적인 수사만 할 뿐이고, 영화 후반에 내레이션의 주체자인 마을의 학교 교사가 학생들을 갑작스럽게 추궁하지만 그 과정이 치밀하지 못할뿐더러 끈질기지도 않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 역시 범인의 존재가 중요하게 여겨지거나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 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말대로 “나쁜 일들은 때때로 아무런 이유 없이도 벌어진다. 우주는 인간의 규범을 비웃고 자기 의지대로 행한다”는 식으로 설명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하얀 리본>은 사건의 원인이 도처에 꽉 차 있지만, 정작 범인은 없는 상황과 마주하는 영화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그 원인은 비교적 명확하다. 공동체 내부의 거짓, 이기심, 폭력, 의심, 기만, 억압, 분노 혹은 계급적 적대 등이 하얀 리본이 상징하는 순결함 속에서 은폐되고 통합된다. 사건의 결과는 있지만 범인을 찾을 수 없는 영화는 많이 봤어도, 추정할 수 있는 원인들과 끔찍한 결과는 목격해도 그 범인은 없는, 아니, 분명 눈앞에 있는 존재들 중 하나지만, 아무도 그걸 찾으려고 하지 않는 상황은 흔하지 않다. 그 누구라도 위반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더이상 존속할 수 없을 만큼 원인들로 팽창한 공동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반을 저지른 자를 모른 체하며 유지되는 공동체. 이것이 공동체의 악순환이다. 하네케가 그런 공동체의 악순환을 보여주면서 자신 역시 범인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물론 다른 데 있다. 그는 사건들이 특정 인물의 악행으로 소급되는 것을 경계한다. 억압적인 도덕에서 시작된 사건일지라도 이 사건을 개인의 도덕 안에만 한정짓는 건 그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가 이 영화를 “테러리즘의 기원, 악의 기원, 급진주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굳이 첨언하는 것도 그런 맥락 위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당신에게 찬탄할 만큼 충격적으로 새로운가? 그렇다면 당신은 세상에 대해 그동안 무지했거나 모른 체한 것이다. 1913년의 이야기가 2010년의 현실에 겹쳐진다는 건 분명 끔찍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이야기 혹은 결론에서 대단한 각성을 얻은 것처럼 대하는 반응이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끝내 범인이 안개 속에 남게 하는 영화의 의도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비평 중에서도 그게 왜 중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글 또한 아직 보지 못했다. 한 가지 전제만은 공통되는데, 영화가 직접 제시하지는 않아도 마을 아이들을 사건의 배후로 암시하고 있고 그 안에서 다음 세대의 파국의 근원을 보고 있다는 견해다. 영화가 아이들의 범죄 행각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폭압적인 집에서는 기계처럼 복종하고 밖에서는 집단적으로 유령처럼 떠다니는, 그러면서 때때로 잔혹성을 분출하는(새를 죽이는 소녀!) 모습이 정황상 그런 전제를 제공한다는 데에는 이견을 달 생각이 없다. 이 영화의 궁극적인 메시지- 하네케의 말을 빌리면 “이 영화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 대한 영화다”와 같은 영화의 현재성에 대한 강조- 를 지지하는 일련의 반응들이 위의 전제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하얀 리본>을 현실정치 안으로 불러들이고, 그런 차원에서 영화의 위치를 격상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편의 영화로서 <하얀 리본>을 매혹적으로 만드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구세대 괴물의 전이가 시작되는 1914년

이 영화가 어쨌든 스릴러의 구조 안에서 결국 누가 범인인지의 문제를 애매하게 처리하는 것, 그러니까 결론을 열어두는 것이 앞서 말했듯 메시지를 전면화하려는 하네케의 의도 때문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스스로를 애매하다고 칭한 내레이션의 내용처럼 이 영화의 이야기도 모호한가? 달리 말해 여러 방향으로 열려 있는가? 아닌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하네케의 의도와는 별개로) 범인의 존재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던 이유는 각 장면 혹은 각 가족의 에피소드가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뭔가 구멍이 난 채로 비밀을 감싸며 내러티브를 만들어간다는 인상이 적었기 때문이다. 각 장면들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덮여 있고 이들의 연결에서 어떤 긴장이 느껴진다기보다는 장면 내의 알레고리, 상징, 징후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 지극히 명료하거나 때로는 관습적으로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하네케가 해답이 아닌 퍼즐에 능한 감독이라고 할 때, <하얀 리본>이 퍼즐이라면 그건 영화가 결과적으로 범인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럴 뿐이지, 각 장면의 미장센 혹은 각 가족의 에피소드의 함의가 모호함을 품고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이들은 자체적으로 별다른 잉여없이 충분히 의미화되고 있고 정서적으로도 정돈된 느낌이다. 장면들 사이의 해소되지 않는 틈을 결정적인 순간마다 설명을 통해 이어주는 내레이션의 회상도 어딘지 규정적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라는 점에 양해를 구한다면 개인적으로는 그런 면에서 <하얀 리본>의 영화적 흥미로움이 반감된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면들은 무시무시하게 낯설었고 해석을 기다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순간들에 대해 말할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엄격한 목사 아버지를 둔 소년은 사소한 일로 체벌을 당한 뒤 팔에 순수를 상징하는 하얀 리본이 묶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다시 등장할 때 그는 높은 다리 위의 난간을 위태롭게 걷고 있다. 이 모습을 우연히 본 교사가 쫓아가 말리자 소년은 대답한다. “저를 죽일 기회를 주는 거예요.” 담담한 소년의 표정이 무섭다. 교사가 “누구에게?”라고 묻자 소년은 “신에게”라고 답한다. 왜 신이 그런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침묵하던 소년에게 교사가 아버지를 들먹이자, 소년은 갑자기 두려운 얼굴로 아버지에게 말하지 말라고 애원한다. 이 마을에 이미 두번의 사고가 지나간 뒤다. 아이는 정말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에게 복수하고자 한 것일까? 그 행위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하다. 내게 주어진 힌트는 이 영화의 배경이 1913년이라는 것, 영화도 나중에 말하듯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며 이 시골 공동체는 그 전면적인 변화를 앞두고 과거의 관습과 가치를 붙들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애쓰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어쨌든 이 시기가 중요하다.

에릭 홉스봄은 “1914년 이전에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1914년 이전과 이후가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과거와의 어떠한 연속성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평화는 1914년 이전을 의미했고 1914년 이후에는 더이상 평화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며 1914년 이후를 파국의 시대라고 일컬었다. <하얀 리본>은 단지 구세대와 새로운 세대의 대치가 아니라, 19세기 문명의 붕괴와 20세기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 위태롭고 불균형적으로 공존하는 순간을 본다. 영화가 그 둘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말하는 대신, 구세대의 괴물이 어떻게 새로운 세대의 괴물로 전이되는지 말하고 있다는 건 다시 지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영화가 위치한 1913년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굳이 참조하지 않더라도, 기독교적 윤리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고수하는 이 공동체의 모습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신이 이미 죽은 시대를 증명하는 풍경처럼 보인다. 신에게 죽일 기회를 준다고 말하는 소년의 기이한 발상과 행동에서 나는 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불안한 제스처를 본다. 그 제스처에 이미 신의 무응답, 혹은 신의 무능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 무력함을 안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신의 죽음을 은폐하는 초자아로서의 아버지가 들어선다.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죄는 모른 채, 아니, 정확히 말해 죄가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이미 항상’ 죄인인 자들이고 구원의 신은 오래전 죽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어찌 구원할 수 있을까. 이 장면을 짓누르는 절망과 어쩔 수 없이 예견되는 미래의 불길한 무게를 잊기 어렵다.

부재하는 신이 마련한 슬픔

신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영화의 후반, 산파의 아들이 폭행당한 채 나무에 묶여 있는 걸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 그 옆에 아마도 범인이 남기고 간 듯한 쪽지가 있다. 그 쪽지의 글귀가 섬뜩하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이 아이가 죄를 갚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아이가 누구의 죄를 대신 갚았다는 걸까? 그 죄는 어떤 죄일까? 누구도 묻지 않는 죄의 내용. 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의식이 중요하고 사후적으로 죄를 만드는 희생제의가 중요하다. 쪽지를 쓴 자, 그러니까 범인이 마을의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이 잔혹한 희생제의는 출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어둠으로 치달은 마을이 애타게 신을 부르는, 그러나 도리어 신의 부재를 증명하고 마는 절박하고 기만적인 의례다. 비약을 무릅쓰고 만약 이 쪽지의 주인이 그야말로 신 그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신은 그저 대가를 바라는 악의 신일 따름이다. 카메라가 두눈에서 피를 흘리는 아이의 얼굴을 비출 때, 우리가 기다리는 신은 그곳에 없다.

그런데 이 모든 폭력과 불신의 사건들이 지나간 뒤, 놀랍게도 순간의 빛을 보았다. 그 빛이 어떤 의미인지, 거기에 기대도 될지 아직까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가 세계의 그 어떤 가능성도 남겨두지 않고 밀고 가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생각하는 듯 보일 때, 마음이 움직인다. 목사의 어린 아들이 어느 날 다친 새를 들고 찾아와 키워도 되는지 허락을 받는다. 목사는 그 새에게 정을 주지 말고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얼마 뒤, 목사가 키우던 새장의 새가 그에게 반감을 가진 딸에게 살해된다. 며칠이 지나고 어린 아들은 자신이 소중히 돌보던 새를 새장 속에 넣어 가져온다. 왜 그걸 가져왔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아이는 “죽은 새 대신이에요. 슬플 것 같아서요”라고 말하며 방을 나간다. 그때 더없이 완고했던 목사의 표정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감정의 일렁임을 꾹 참고 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증오도, 무관심도 아닌 슬픔이 밴 장면이다. 슬픔, 그것은 타자에 대한 공감이며 온건한 감정이지만 이 장면의 슬픔은 순간 영화를 얼어붙게 한다. 이 장면이 신에게 구할 수 없는 구원의 가능성을 인간에게서 보고 있다고 말하는 건 지나친 해석일 것이다. 다만 신이 죽은 시대의 길목에 막혀 괴물이 되어가는 이 가련한 아이들에게 루머와 의심, 죽음의 주체가 아니라 슬픔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리를 잠시라도 마련했다는 사실에 이상하게도 안도를 느낀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네케의 냉정한 날카로움에 경탄해도, 나는 거기서 별다른 울림을 받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 내게 <하얀 리본>의 질문과 답은 여기, 이 슬픔의 자리에 있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