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원빈] 완벽하게 강력해진 이 남자의 아우라
2010-08-09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아저씨>의 배우 원빈

왜 굳이 원빈이어야 했을까. <아저씨>를 보기 전, 원빈의 캐스팅은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액션을 따지자면, 그는 크게 검증되지 않은 배우이며, 누군가를 지켜내기보단 보호받아야 할 감성적인 캐릭터에 어울렸다. 그를 캐스팅한 이정범 감독 역시, “처음에는 원빈의 액션 연기에 우려를 표했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아저씨>는 이 모든 기우를 뒤집는 배우 원빈의 반론이다. 섣부른 변신은 필요없었다. 배우 본연의 강점을 충분히 숙지하고 활용하는 것만으로, 최상의 결과는 내포되어 있었다.

호칭이 사람을 규정한다면, ‘아저씨’만큼 원빈을 규정하는 데서 벗어나는 단어도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은 숱한 이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아저씨로 불린다. 그는 옆집 소녀 소미(김새론)가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괜찮은 아저씨’이며, 소녀의 엄마가 한번 연애질해도 좋겠다고 대놓고 농을 거는 ‘얼굴 반반한 아저씨’다. 마약을 빼돌린 엄마 때문에 마약 조직에 납치된 소미를 구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사투. 태식을 연기하는 원빈은 자기보다 더 아저씨 같은 깡패 조직의 똘마니에게도 ‘정체불명의 아저씨’로 지칭되고, 그의 신고를 접수한 114 직원에게도 ‘정신 나간 소리나 해대는 불량 아저씨’로 치부된다. 그리고 자신을 추궁하는 조직의 보스에게 스스로를 정의한다. “옆집 아저씨”라고. 자연인으로서 서른넷의 나이. 30대 중반의 원빈은 말한다. “이상하단 생각은 안 했다. 나도 이제 충분히 그런 호칭으로 불릴 수 있는 나이다. 새론이가 현장에서 처음 아저씨라 부를 땐 좀 생소했지만, 그것도 금방 적응이 되더라.” 그의 대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태식은 비록 지금, 허름한 동네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며 살고 있지만, ‘시범을 보던 국회의원이 기절’했을 정도로 고도의 무술을 연마한 전직 정보사 특작부대 요원이다. 서투른 말이나 웃음 따위 결코 흘리지 않는 차갑고 잔인하며 어두운 심연의 캐릭터가 태식이다. 그러니 적어도 우리가 인지하는 아저씨라는 범주 안에서 원빈의 역할을 해석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쯤 되면 아저씨가 아닌 그의 상대배우들에게 더 동정이 간다. 대체 그들은 말쑥하게 차려입은 검은 슈트, 한쪽 눈을 뒤덮을 정도로 잔뜩 늘어뜨린 긴 머리, 사연을 백만 가지쯤 담은 우수에 찬 눈빛의 이 남자를 두고 어떻게 감히 아저씨라 칭했을까.

결국 영화 속 태식의 존재를 이해하자면, 관객 역시 간단한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할지 모른다. 신체 장기 매매, 어린이 갈취, 그물망처럼 얽힌 마약 조직의 실태라는 리얼한 영화적 세계의 밑그림. 여기에 이 진흙탕 속, 소녀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반자동 권총을 빼들고 뛰어든 영웅을 오려붙이면 완성이다. 밑그림 속 인물들이 육두문자와 실없는 농담을 뒤섞어가며 아옹다옹 현재를 말할 때, 태식은 의연하게 대꾸한다. “내일을 보고 사는 놈들은 오늘만 보고 사는 놈을 당해내지 못한다”고. 비장함과 홀연함으로 한껏 치장된 태식의 언어는 차라리 판타지에 가깝다. 그런데 결코 섞이지 않을 두종의 언어가 어우러지는 모습이 꽤 흥미롭다. 이 이상 화음이야말로 <아저씨>를 구성하는 기묘한 핵이다.

영화 속 태식과 닮은 진실화법

태식은 <마더>의 좀 모자란 ‘도준’을 연기한 후, 원빈이 마음을 움직여 연기한 캐릭터다. 경력 13년차 배우에게 ‘도전’과 ‘변신’이란 수식을 안겨주었던 <마더>의 참여 이후, 주변의 호평을 채 누리기도 전 그는 선뜻 <아저씨>를 선택했다. 작년 10월부터, 그는 촬영에 앞서 특수 무술을 구가하는 태식에 다가가기 위해 동남아 무술을 연마하며 합이 정확히 들어맞는 정교하고 수위 높은 영화의 액션장면을 준비했다. 거의 단 한 장면에도 빠지지 않는 등장, 몸을 쓰는 액션과 칼과 총까지 동원한 복잡한 액션은 총 80회의 지난한 촬영을 요구했고, 5개월간 그를 이 영화에 매어놓았다. 환산된 결과는 자못 만족스럽다. 몸은 물론 단도에 권총까지 불사하며 다양한 액션을 몸에 맞춘 듯 구사하는 스크린 속 원빈은 한국영화에서 지금껏 쉽게 보지 못했던 고독한 영웅의 아우라를 한껏 내뿜는다. 조각 같은 외모 때문에 자신을 한계짓던 틀을 거부하려 애쓰는 대신, 또 연기에 급급해 자신을 숨기고 치장하는 대신, 영화 속 원빈은 자신의 강점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는 데 거리낌없다. 그 모습이 그의 어떤 전작에서보다 생기있고 자연스럽다. 비범한 마스크, 고독과 우수로 구성된 ‘원빈’이라는 코드의 강점을 제대로 활용한 점에서 보자면, 이정범 감독의 공로 역시 크다.

물론 이같은 평가가 그와 대화하는 데 도움을 주진 못한다. 원빈에게 액션배우로서의 고생담을 다그쳐 물어봤자, 공헌을 치하해봤자 늘 그렇듯, 돌아오는 건 “몸이 힘든 거야 뭐 대수인가”하는 무뚝뚝한 대답이 전부일 테니(그리고 정말 그게 전부였다). 대신 그는 자신의 진짜 각오를 덧붙이고 싶어 한다. “난 이 영화를 액션영화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내가 반응한 것도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고, 그 상처 때문에 세상에 마음을 닫은 태식이라는 남자의 심리였다.” 안다, 조금 식상한 답변이다. 그렇지만 겉치레를 하는 데는 도통 관심이 없는, 재치나 말주변을 기대하는 건 과거나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힘든 원빈식 화법에서 나온 말이라면 이 이상의 진심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태도는 마치 영화 속 캐릭터가 원빈을 차용한 건지, 원빈의 모습이 태식을 닮아가는 건지 모를 만큼 높은 싱크로율을 보인다.

멜로 배우로 귀환할까

남은 건 온전히 그를 내보인 이후, 관객의 선택이다. “굳이 태식의 그림자에서 벗어난다거나 그런 노력을 부러 하지는 않는다.” 군 제대 뒤 <마더> 이후 이번 영화까지 줄곧 쉬지 않고 내달린 그에게 “자신에게 시간을 선사한다면?”하고 묻자, “시간이 있다면 항상 원하는 건 한 가지다. 배낭 메고 세계여행을 해보고 싶다. 일 때문에 해외에 간 거 말고는 한번도 혼자 여행을 한 적이 없다”며 바람을 피력한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다. 다음 작품의 행보를 결정하기까지 유독 조심스럽고 긴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가 택하는 물리적 과정은 생각처럼 복잡하지 않다. “아직 미정”이라는 단순한 대답 뒤로 그가 멜로 장르에도 뜻을 내비친다. “<가을동화>를 하고 나서 다시 멜로를 하면 같은 패턴을 반복하게 될 것 같았다. 비슷한 역할에 사용된다는 불안 말이다. 그래서 부러 멜로를 피해온 것도 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다시 멜로를 하고 싶어졌다. 30대가 표현할 수 있는 20대와 다른 멜로라면 지금쯤 도전하고 싶다.” 그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나리오를 택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니 다음 선택을 멜로로의 귀환이라는 뜻으로도 읽어도 어쩌면 무방할지 모르겠다.

스타일리스트 강은수, 메이크업 이현아, 헤어 이혜영(아베다), 의상협찬 앤 드뮐미스터, 슈즈 소다옴므, 장소협찬 나오스 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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