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정률] 전세계 무술의 뉘앙스까지 파고들었다
2010-08-20
글 : 김용언
사진 : 최성열
<아저씨>의 박정률 무술감독

두고두고 이야기될 것이다. 막다른 상황에 몰린 한 남자가 목숨을 걸고 심신을 모두 내던지는 이야기, 그 이야기의 사이사이 포진한 날카롭고 정교한 액션. 스토리의 전개에 따라 주인공 태식이 느끼는 분노와 절망의 크기에 따라 점점 증폭되는 액션 감정은 놀라운 진폭을 보여주었다. 이제 <아저씨> 이후에 나오는 한국 액션영화들은 언제나 <아저씨>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생결단> <사랑> 등을 거쳐 <아저씨>의 놀라운 액션을 책임진 박정률 무술감독을 만났다.

-액션연기쪽에 몸담은 지 얼마나 됐나.
=신재명 무술감독님 사단에 들어간 건 5, 6년 전쯤이지만 액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17년 전부터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시작했다.

-원래부터 무술에 관심이 있었나.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어릴 때부터 축구를 시작으로 합기도, 유도, 복싱 등을 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장차 뭘 할지, 내가 남들보다 잘하는 게 뭔지 고민했을 때도 답은 운동밖에 없었다. 액션영화도 워낙 좋아했고, TV에서 나오는 액션장면을 보다보면 ‘내가 해도 저거보다는 잘하겠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당시는 스턴트라는 단어도 모를 때고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우연히 보라매공원에 있는 액션스쿨을 발견하고, 거기서 막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을 만나고(웃음), 그 사람들을 통해 전문 스턴트맨들이 종로 YMCA 체조부에 모여 있다는 걸 들었다.

-종로 YMCA라니! 당시엔 전문적인 시설이 없어서 그랬던 건가.
=그땐 대한민국에서 체조를 배울 수 있는 사설공간이 거기밖에 없었다. 매트리스고 뭐고 전부 낡아서 너덜너덜했지만 그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입이 쩍 벌어졌다. 사람들이 날아다니더라. (웃음) 나도 운동을 꽤 오래 배웠지만 완전히 다른 분야니까 초보자 코스부터 시작했다. 몇 개월 동안 지켜보다 최고로 잘하는 분을 점찍고 우격다짐으로 “나 좀 가르쳐주쇼”라고 담판을 지었다. 그분 밑에서 기본기부터 배웠다. 군대 가서도 운동 생각밖엔 없었다. 휴가 나오면 그동안 구상했던 동작을 바탕으로 친구들과 함께 16mm 단편을 찍었다.

-그때가 90년대 초·중반일 텐데, 사실 한국영화나 드라마가 액션 장르에 취약했을 시절이 아닌가.
=군대 있을 때 김영빈 감독님의 <테러리스트>가 개봉해서 뭔가 좀 분위기가 만들어지나 싶었다. 그러다 지존파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영화에서 잔인한 액션장면은 전부 들어내거나 모자이크 처리되더라. 제대만 하면 내 세상일 줄 알았는데 고생 좀 했다. (웃음) 군대 가기 전까지는 그나마 상업액션영화는 나오지도 않았고, 주로 아동용 비디오영화거나 국방부 홍보영화가 전부였다. 한국적인 액션이랄 것도 없이, 홍금보나 성룡 무술을 따라하는 게 고작이었다.

-한국의 액션을 얘기할 때 두 가지 큰 ‘파’가 있지 않나. 화려한 액션파와 리얼액션파.
=그 얘기 나올 줄 알았다. (웃음)

-사실 본인들 입장에선 이런 분류가 내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웃음) 그래도 신재명 무술감독님 사단에서 리얼액션을 제대로 구현한 당사자로서 리얼액션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홍콩영화에서 많은 무술연기를 배워온 세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사람이 하는 액션과 저 사람이 하는 액션이 전부 똑같아졌는데 이젠 홍콩영화 카피에서 벗어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다. 우리만의 액션을 만들어야 한다는 컨셉으로 출발했다. 리얼액션에 포함되는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이를테면 일반 사람이 점프할 때 최대치의 높이를 산출한 다음, 와이어의 도움으로 그것보다 아주 살짝 높이 점프하면 관객의 눈에 새롭게 보인다. 선을 너무 넘기면 바로 판타지가 되지만, 일반적인 점프 높이를 아주 살짝만 넘기면 리얼하면서도 남다르게 느껴진다. 우리가 다른 팀보다 와이어를 적게 쓰는 건 사실이지만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웃음) 무술연기는 팀 특성상 대표작이 생기면 그쪽으로 계속 풀리게 되니까, 아무래도 리얼액션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하게 되는 것뿐이다.

-<아저씨>로 넘어가보자. 시나리오에서부터 액션 연기에 대한 설정이 자세하게 결정되어 있었나.
=이정범 감독님이 이미 칼로 베고 찌르고 하는 부분을 다 써놨더라. (웃음) 그만큼 액션에 애정이 있었던 거지. 시나리오를 토대로 액션장면을 계속 수정하고 보완하며 만들었다. 어떤 장면은 거의 10가지 버전 끝에 완성됐다. 감독님은 한번도 없었던 걸 해보자고, 그러면서 얘기하는 단어 자체는 추상적이었다. 잔인하고 예리한 액션이라니…. (웃음) 뭔진 모르겠지만 해볼게요 하고 나와서 그때부터 생각을 시작한다. 말로 들을 때보다 그림 보면서 얘기하면 훨씬 이해가 빠르니까, 구상한 장면을 직접 촬영해보고 감독님과 그 동영상을 보면서 거듭 의논하고 살을 붙여나갔다.

-보통 영화 속 액션장면은 일대 다수로 싸울 때 한명씩 차례로 싸운다. 때릴 때도 그냥 기절할 정도로만 주먹을 날리고. 그런데 <아저씨>는 달랐다. 정말 일대 다수로 맞붙고, 내가 죽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 액션을 구사한다. 그 차이가 놀라우면서도 현실적이라 납득이 가더라.
=처음부터 컨셉이 그랬다. 진짜여야 한다, 합을 맞추면 안된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그럼 마지막 1 대 17 액션신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까? 일단 실제로 붙어봐야 알 것 같았다. 무술팀 애들한테 나무칼 들고 무조건 다 덤비라고 했다. 죽도록 맞았지. (웃음) 안되더라고. 무술 지도하는 사범한테도 시켜봤다. 죽도록 맞더라. “안되겠냐?” “형님, 어떻게 혼자서 17명을 이겨요?” 이 많은 사람의 감정을 나한테 집중시키지 말고 흐트러트리면 가능하지 않을까? 인질을 잡아서 다른 사람 앞에서 잔인하게 목을 긋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상대방이 겁먹고 흥분하게 상황을 만들어가니 가능하더라. 극중 태식 정도의 월등한 무술 실력을 갖췄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 감독님한테 그렇게 애기했다. 직접 싸워보니까 도망가지 않으면 이 사람들을 이길 수 없다고. 때리고 도망가고, 베고 도망가고, 등지고 싸우고 방패막을 만들며 도망가고. 그냥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기어다니며 처절하게 도망쳐야 한다고. 라스트 액션의 지금 버전은 좀 누른 편이다. 원래는 더 잔혹했다. 짐승이 먹이를 물고 다니는 것처럼 사람을 거의 피칠갑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원빈이 연습할 때도 실제로 싸움을 붙였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가르쳐준 많은 기술로 합을 정교하게 짠 다음 연습해도 좋겠지만, 한번 야성적인 감을 키워보자고 했다. 서너명이 한꺼번에 나무칼을 들고 원빈에게 덤볐다. 본인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랐는데, 막 찌르고 잡고 꺾고 베게 된다. 아, 원빈은 저런 느낌으로 베는구나, 저런 손놀림을 쓰는구나를 눈여겨봤다. 그가 주인공이니까 그에게 맞춰줘야 한다. 다치기도 많이 다쳤지만, 야성적인 것, 사실적인 것을 그렇게 많이 찾아냈다. 결론적으로, 라스트신은 거의 사실이라고 보면 된다.

-동남아시아 무술을 많이 응용했다고 들었다. 합기도나 태권도, 유도 등에 비해 그쪽 무술의 다른 점이라면 뭔가.
=형태는 좀 다르지만 원리 자체는 비슷하다. 칼리나 실라트 같은 동남 아시아 무술을 소스로 가져온 건 사실이지만 생각보다 많이 쓰진 못했다. 동남아 무술에서 쓰는 기술은 단초다. 한방에 끝난다. 얘가 찔러도 죽고 쟤가 찔러도 죽는다. 그걸 몇분 동안 주고받고 이어갈 수 있는 걸 말이 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 무술을 그대로 쓸 순 없는 거다. 그래서 동남아 무술을 연구하다가, 전세계 다른 나라 무술들을 다 섭렵했다. 각 무술들의 기본 원리를 파악하고, 조금씩 가져와서 뉘앙스를 재해석하고, 또 원빈에게 맞게 고치고 깎고 다듬고, 그걸 본인이 자기 몸에 맞게 소화하고… 대한민국에 없던 액션이라고 봐준다면 감사한 일이다. 감독님과 배우들과 무술팀 모두가 같이 노력하고 연구해서 만들어냈다.

-직접 작업한 입장에서 <아저씨>의 무수한 액션 중 자신있게 새롭다고 꼽을 수 있는 장면이라면 뭘까.
=새로운 액션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도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텐데, 원빈이 개미굴 복도에서 달리다가 창문을 깨고 떨어지는 장면이다. 대개 대역을 쓰거나 컷을 나눠서 촬영하는데, 여기선 원빈과 촬영감독이 같이 직접 뛰어내리면서 촬영했다. 또 보통 이런 장면에선 슈거 글라스를 쓴다. 깨져도 다치지 않는 대신 투명하게 안 나오고 유리창의 결이 잘 살아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이번엔 외국에서 새로운 유리창을 공수해왔다. 깨진 유리의 날이 아주 사실적으로 살아 있다. (웃음) 결국 노력이다. 영화 속 액션이 가짜라는 건 동네 꼬마들도 다 알지만, 진짜처럼 보이게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시도 자체가 좋은 거다. 그게 쌓여서 한국영화의 액션이 풍부해진다.

-그럼 지금까지 왜 그 유리를 안 썼던 걸까.
=영어도 잘 안 되고(웃음), 어디서 사는지를 다들 몰랐다. 이번에 외국 사이트 다 뒤져서 업체 찾아내서 사이즈 맞춰 공수했다. 앞으로는 한국영화에서 그 유리가 많이 나올 것 같다.

-<아저씨>를 봐버렸기 때문에 예전같이 손쉽게 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건가. (웃음)
=발전 좀 해야지! (웃음)

-아무리 액션의 합을 잘 짜도, 그걸 구현해주는 그릇으로서 배우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점에서 <아저씨>에서 원빈은 어땠나.
=아예 처음부터 시작했다. 기본기, 기본기, 기본기 얘기만 했다. 촬영 들어가기 3개월 전부터 일반 운동선수들처럼 아침 먹고 운동하고 점심 먹고 운동하고 저녁 먹고 운동하는 생활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원빈은 이걸 왜 해야 하냐고 묻지 않고 묵묵히 따라와줬다. 그렇게 3개월 연습하니 어느 순간 확 올라오더라. 그 이후 촬영장에서도 눈만 마주치면 계속 훈련했다. 내가 하자고 한 것도 있지만 배우 본인이 알아서 했다. 원빈이 참 대단한 게 힘들다거나 쉬고 싶다고 투덜거린 적이 한번도 없다. 그냥 했다. 운동 잘하는 배우, 액션 잘하는 배우 다 필요없다. 와서 열심히 할 수 있는 배우가 좋은 배우다. 원빈은… 정말 소 같다고 해야 하나. (웃음) 처음부터 끝을 보고 갔던 것 같다. 포기하지 않고, 나 꼭 저기까지 간다는. 나 역시 포기하지 않고 이 사람을 거기까지 데려가겠다는 생각이 있었으니 서로가 같이 독려한 셈이다. 처음에 만났을 때와 지금의 원빈은 하늘과 땅 차이다. 정말 잘해줬다.

-무술감독 입장에서 배우에게 요구하는 자세는 어떤 건가. 설령 액션 훈련을 처음 받는다 하더라도 큰 문제가 안되는 걸까.
=액션 연기도 결국 연기다. 이번에 이런 액션 연기를 했으면 다음엔 저런 액션 연기를 하는 거다. “저 어디서 운동했어요, 저 이런 작품 했어요”라고 자랑할 필요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전작 얘기다. 이 작품에선 이 작품에 집중해야지. 그냥 파묻혀서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럼 어떤 액션 연기가 와도 다 표현할 수 있다.

-마지막 질문. 사실 영화 속 근사한 액션장면들을 현실에서 직접 목격하기란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일 것이다. 무술감독은 영화마다 그런 판타지를 직접 살지 않나. 그 기분이 어떤가. (웃음)
=어휴, 영화 찍을 땐 그림 만들고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느라 긴장해서 그런 생각 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술 먹고 놀 때가 재밌다. 무술하는 사람들은 술마시면서 여기서 돌고 저기서 날고 뛰고 그러거든. 노래방에서도 마이크 잡은 채 벽 차고 날아다닌다. (웃음)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