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아저씨라는 호명의 숨은 뜻
2010-08-26
글 : 오세형 (영화평론가)
한국사회에서 어른이 되려는 원빈의 안간힘, <아저씨>

(스포일러 약간 있습니다.)
원빈에게 아버지는 없다. 물론 영화에서다. <태극기 휘날리며>부터 <아저씨>까지 그가 주연을 한 네편의 영화에서 그의 아버지는 모두 사라져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인공은 아버지 없는 형제이며, <우리형>은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처리된다. <마더>는 제목조차 아버지에 관심이 없다. <아저씨>에서 태식(원빈)은 아예 태생 불명이다. 감독 모두 원빈에게서 ‘아버지 부재’라는 동일한 상을 보고 방향을 설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그게 확실한 것은 <마더>뿐이다). 이 정도 우연은 있을 수 있고, 발생한 일을 두고 확률적 크기를 따질 필요도 없다. 그러나 원빈의 얼굴 이미지가 갖는 속성을 경유하면 이것이 그저 우연으로 지나칠 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성숙한 남근, 거세된 고환

그려보자. 네편의 영화 모두 원빈이 ‘집에서 밥을 먹는’ 장면이 있다. 그와 밥상을 공유하는 것은 항상 엄마이거나 (원빈이 낳지 않은) 아이들이다. 당연히 아버지가 그 상에 함께 앉는 일은 없다. 덧붙여 그 밥상에는 원빈의 섹스 상대방으로서의 여자가 초대되는 일도 결코 없다. 즉 ‘꽃미남’인 그가 여자를 품을 수 있는 ‘남자’로서 밥상에 앉은 적은 없다는 것이다. <아저씨>에서 소미의 엄마는 태식에게 성적 관심을 보내지만, 그가 집에서 소미와 밥상을 공유할 때 그녀는 (마약은 하면서 주거침입은 하지 않기 위해) 밥상에 접근하지 못하고 문 앞에 서 있다. 여기엔 어떤 미성숙으로의 퇴행이 있다. ‘밥상’이라는 모성적 퇴행의 공간, 그곳에 초대받는 ‘엄마-아이’/그곳에 부재한 ‘아버지-여자’, 이는 남근의 미성숙/성숙의 경계가 그대로 밥상에 옮겨진 것이다. 곧 남근 미성숙(혹은 결핍)으로 그 질서와 왠지 거리를 두고 있다는 느낌이 원빈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이를 거창하게 ‘원빈의 밥상 법칙’이라고까지 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필모그래피의 반복을 토대로 귀납적으로 구축된 것도 아니다. 이는 그의 태생적 이미지이며 이미 다수가 동의한 것이다. 실제로 저마다 여러 수사를 만든다. 보호받는 아들, 영원한 동생, 미성숙, 피터팬, 비현실성, 은둔 등. 그러나 같은 말들이다. 그 말들은 아버지를 통해 세상의 질서를 내면화하지 못한, 곧 남근 미성숙을 각자 방식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 이미지가 한국사회에 놓여 있으면서 원빈이 골상(骨相)적으로 한국인의 외모 콤플렉스가 극복된 최댓값이기 때문에 거기에 이방인적 속성이 더해진다. 이방인은 이쪽 세상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점에서 남근 미성숙의 다른 표현이다. 이러한 속성들은 그것들이 원인-결과의 쌍으로 묶이기보다 순서를 바꿔가며 그의 안쪽에서 순환하기 때문에, 그의 이미지를 매우 두꺼운 것으로 만든다.

또한 트렌드와 달리 비음이 섞이지 않은 그의 중저음은 미성숙의 얼굴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의외로 정확하고 안정된 발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위화감이 있어서 그 목소리가 마치 성우가 더빙한 가짜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목소리와 입모양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곧 가짜라고 느껴진 것이 사실은 진짜이기 때문에, 그 존재의 현실성을 즉시 인정하길 꺼리게 하는 방식으로 그를 우리 현실의 바깥에 위치시킨다. 결국 그의 이미지는 동시간의 한국사회에서 그만이 뭔가 어긋난 공간에 혼자 떨어져 성장해온 것처럼 되어 있다. <아저씨>에서 ‘태식’이 전당포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소미 엄마와 마주하는 장면은, ‘원빈’이 투명한 벽에 막혀 세상과 단절된 이미지라는 것에 감독이 ‘순순히’ 복종해버린 결과다.

이러한 속성들이 남근의 미성숙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그의 이미지는 육체적으로 섹스불능/생식불능 차원까지 이르게 된다. 극단적으로 그는 거세된 남자 이미지다. 이는 ‘(태식의)불알을 떼버린다’는 소미 엄마의 대사에 직접적으로 의미 간섭을 한다. 실제로 그는 영화 내내 거세 혹은 생식불능의 위협에 처해 있다. 태식의 말처럼 ‘내일이 없는’ (생식불능인) 그를 조롱하듯 굴러오는 적출된 두 안구는, 소미 엄마의 대사처럼 떼어진 그의 고환처럼 보인다. 위협이 착시적으로 실현된 이 순간, 태식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정서적으로 흔들린다. 생식불능 이미지는 연애에 대한 체념적 비관을 내포한다(그는 사랑을 ‘이루는’ 멜로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애인과의 투숏을 견딜 수 있는 건 짧은 커피광고 정도다). 소미 엄마는 집에서 마약을 주입해 흥분에 빠진다. 이 장면은 그녀가 주사기와 섹스하거나 자위를 하는 것으로 보이도록 유혹한다. 태식이 옆집에 있음에도 생식불능인 그와 연애(섹스)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바꿔버리는 원빈의 이미지 질서

원빈의 이런 이미지가 얼마나 영화의 의도 안으로 사전에 들어온 것인지는 명확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 이미지의 견고함이 영화 속 결여(아버지 부재 등)를 보는 이에게 매우 신경 쓰이게 한다는 것이다. 아니 단지 신경 쓰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미지가 영화를 의미적으로 재구성한다. 모든 조건은 동일하고 <마더>에서 원빈만이 교체된다면 <마더>는 지금처럼 성립하지 않는다. 이정범의 <아저씨>는 원빈의 얼굴 이미지의 속성을 보는 이가 수용하느냐 여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영화다. 그의 이미지는 의미구성의 ‘질서’다. <아저씨>의 실질적 연출은 원빈이다. 이는 원빈의 미모와 액션의 감상이 영화의 전부라거나 감독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영화에서 그의 이미지의 ‘활동’이 텍스트를 바꾸는 것에 우리가 속수무책임을 다르게 말한 것이다. 원빈은 그 이미지의 두꺼운 실재를 통해 감독을 텍스트의 의미결정으로부터 소외시키는, 한국영화에서 어쩌면 유일한 배우다.

<아저씨>는 그런 원빈이 자신의 이미지와 싸우는 영화다. 영화를 보고 누구나 태식과 소미간의 교감이 서사적 설득에 실패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이방인’ 킬러 람로완과 소미의 관계가 반창고 접촉의 자극성으로 더 내밀해 보일 정도다. 그러나 이는 단지 서사 차원이다. 원빈의 이미지는 엄마나 아이를 부르도록 예정돼 있다. 초반 동선은 소미가 태식으로 향하지만 소미는 그가 소환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버지나 여자가 원빈의 이미지로 인해 갑자기 제거되는 것처럼 이들 관계의 갑작스러움 또한 당연함으로 처리된다. 그럴 경우 영화 전체가 원빈의 욕망이 만든 꿈처럼 보이게 된다. 엄마가 미성숙의 퇴행으로 표상된다면 ‘옆집 아이’는 그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감당할 만한 첫 관계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태식의 임신한 아내는 트럭 충돌로 죽는데, 이는 그가 아버지가 되는 것, 곧 남근 성숙을 봉쇄하는 세상의 무거운 선고처럼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넘기 위해 이 무거운 질량과 싸워야 한다.

그는 권총/칼이라는 진부한 가짜 남근과 ‘잘못에 사과하라’는 어린 윤리로 무장해, 어른의 질서인 돈으로 아이들의 목숨을 계산하는 장기밀매조직과 싸운다. 이것이 세상과의 싸움이라면 그에겐 자신과의 싸움도 필요하다. 그는 람로완이라는 자신과 유사한 골상의 이방인을 자신에게서 분리해내 상대로 세운다. 이는 자신이 극복해야 할 이미지와의 결투다. 람로완은 마지막에 제거되길 자청하듯 태식을 맞이한다. 둘의 결투는 일종의 싱크로나이즈드 액션이다. 둘의 숏은 심지어 장소가 달라도 자주 붙는데 두 숏의 경계를 대칭선으로 좌우가 바뀐 거울상과도 같다. 그런 람로완은 태식의 일부로서 소미를 위기에서 대신 구한다.

대체될 수 없는 '아저씨'라는 호평

세상과 싸우는 동시에 그곳으로 나가기 위해 유리창을 여러 번 부수는 태식은, 방탄유리창마저 뚫어내 목표를 완성한다. 이 완성의 순간 그는 소미에게 ‘아저씨’라고 불린다. 이 한국적 호명은 이름으로 대체될 수 없다. 이는 세상과 관계를 회복한 그의 성장을 한국적으로 승인하는 유일한 호명이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원빈이 자신의 이미지를 부수고 어른으로서 한국사회 안으로 들어오려는 안간힘에 관한 영화다. 그러한 원빈의 이미지를 경유해 <아저씨>를 다시 보면, 마지막 태식의 눈물은 원빈이 자신의 이미지와 싸워온 고통처럼 나른한 슬픔이 있다. 이를 경유하지 않으면 그 눈물은 설득에 실패한 신파일 뿐이다.

세월은 빨라서 원빈도 우리처럼 진짜 아저씨가 될 것이다(그래봐야 우리보다 멋있겠지만). 그 시간의 흐름은 한국영화가 하나의 대체불가능한 이미지의 얼굴과 그로 인한 제재(題材)를 상실하는 것이다. 욕심으로는 원빈이 그 이미지 안에 좀더 머물러줬으면 좋겠다. 미남은 넘쳐도 원빈을 대신할 이미지는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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