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복수란 이런 것 vs 과도한 스펙터클
2010-08-24
<악마를 보았다>에 대한 찬반, 네 평론가의 시선

<악마를 보았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김봉석



확실하게 말하면 나는, <악마를 보았다>가 좋다. 누군가는 진짜 악마가 누구이고, 복수의 자장이나 의미 같은 것을 말하겠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악마를 보았다>가 좋았던 이유는, 복수의 끝까지 매진하기 때문이다. 원래 복수라는 것은, 싸울 만한 상대에게 하는 것이다. 복수할 만한 가치가 없거나 보람이 없는 상대와는,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웬만하면 복수를 하다가도 한순간에 물러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이제 그만할 만도 한데’ 하는 순간 확 질러버리면서 마구 달려간다. 악마 같은 두 남자의 겨루기가 무척이나 살갑게, 그러나 독하게 최후까지 진행된다. 의도적으로 관객을 불편하게, 몸서리치게 만들면서도 <악마를 보았다>는 명료하다. 위악을 떨지도, 냉랭한 척하지도 않는다. 다소 과잉이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킬 빌>이 복수의 파노라마라면 <악마를 보았다>는 복수의 막장이다. 아마 수현도 복수의 끝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예감했겠지만, 완벽한 무(無)라고는 생각 못하지 않았을까. 이건 도(道)나 선(禪) 같은 것으로 얼버무릴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복수의 끝, 누아르의 막장까지 <악마를 보았다>는 몰아친다. 메이저에서, 그것도 A급 감독이 만든 <악마를 보았다>를 보는 건, 유쾌한 경험이다. 아직 한국영화계에 기대할 만한 여지가 남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니까.

김종철



한 남자가 살해당한 약혼녀의 복수를 행한다. 그 복수는 후련하거나 통쾌하지 않다. 음습하고 어둡고 절망적이다. 영화 전편에 걸쳐 파괴적인 에너지와 유혈 낭자한 폭력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 수위는 해외의 유명 고어영화에 필적한다. 먹고 먹히는 정글 같은 세상에서 이성과 본능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그 끝자락에 이르면 악마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린다. 복수를 행하던 남자는 악마에게 먹힌다. 김지운 감독은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다. <악마를 보았다>는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겪어보지 못한 강렬한 충격이다. 최고의 배우들은 최선의 연기를 펼친다. 마치 인간의 영혼을 상실한 것 같은 최민식의 광적인 연기는 경배의 대상이다. <악마를 보았다>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성을 자극한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내 속에 잠재된 악마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한없이 불편하면서도, 영화이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악마의 쾌락이다.

안시환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가 되는 남자의 이야기. 이건 뻔한 이야기다. 남자의 복수는 고통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을 내리는 것이다. 이건 흥미롭다. 남자는 복수를 위해 하계를 향하고, 관객은 하계의 잔혹한 스펙터클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사랑하는 연인을 되살리기 위해 하계를 여행하는 오르페우스 신화의 변주.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살리겠다는 신념이 있었지만, 경철은 약혼녀를 죽인 악마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겠다는 욕망이 전부다(또는 죄의식으로 인한 자학적 욕망).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여행은 무의미하다. <악마를 보았다>는 그 무의미함을 과도한 스펙터클로 덮어씌우려 한다. 그 결과는 잔혹 스펙터클의 무한 반복이다. 그러니까 악마성은 신체의 훼손으로 스펙터클화되고, 그에 대한 복수 역시 또다시 신체 훼손의 스펙터클로 향하며…, 이 반복 속에 인물(그 내면과 정서마저)은 스펙터클의 전시를 위한 부품으로 전락하고, (흥미로운 몇몇 설정에 대한) 사유의 가능성 역시 훼손된다. <악마를 보았다>는 인물의 극단적인 선택과 그로 인한 과도한 스펙터클의 전시, 그리고 혼성모방이라는 최근 한국영화의 병폐를 그대로 보여준다. 인과율적으로 미흡한 서사와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김지운답지 않은 투박한 연출도 거슬린다. 하지만 최민식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광기가 쉴새없이 지속될 때 그 임팩트가 분산되는 역효과가 있긴 하지만.

황진미



시작은 상투적이다. 여자가 죽고 남자가 복수에 나선다. 용의자 4명을 가리지 않고 응징한다. 어차피 비슷한 놈들이니까? 한명은 물리적 거세. 드디어 악마를 찾아낸다. 그를 고문하고 추적 장치(고성능 전자발찌?)를 장착하고 풀어준다. 악마를 계속 고문하기 위함이요, 결정적인 순간에 남자가 나타나긴 하지만, 풀려난 악마로 인해 누군가는 피할 수도 있었을 고통을 겪는 건 문제 아닌가? 영화는 이런 도덕적 딜레마를 간과하지 않고, 남자에게 되돌려준다. 영화는 악마를 고문하며 그에게 뉘우침을 얻어내고자 사투를 벌이는 남자의 ‘도덕적 패망’을 보여준다. 악마에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그가 택한 마지막 복수는 가족에게 죄의식을 심는 연좌제다. 마지막 장면은 꽤 충격적이고 창의적이지만, 아들에게 뿌려진 복수의 씨가 발화하여 누군가를 향한 폭력으로 전화할 것을 생각하면 더 큰 딜레마로 남는다. 영화는 극단의 사고실험을 통해 역설적으로 복수의 불가능성과 사법이 보복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할 때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 비판을 던진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를 왜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는지는 심히 아쉽다.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편집과 독창성이 떨어지는 화면구성(<친절한 금자씨>와 <박쥐>가 생각난 것은 나뿐인가?)은 고어한 장면 이상으로 관객을 괴롭힌다. PS. 제한상영가 판정을 비난할 게 아니라, 하루빨리 제한상영관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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