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9일 프랑스의 알랭 코르노 감독이 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67살. 그는 <세리 누아르>(1979), <세상의 모든 아침>(1991), <밀고자>(1998), <두 번째 숨결>(2007), <미녀들의 전쟁> 등을 만들어 한국 관객에게도 친숙한 편이었다. 10여년 동안 코르노와 인연을 이어왔던 임상수 감독이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글을 보내왔다. 임상수 감독은 1998년부터 이어져온 코르노와의 기억을 담담한 말투로 전했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물기 또한 느낄 수 있다.
1998년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들고 부산국제영화제에 처음 갔을 때, 한 파티에서 알랭 코르노를 만났다. 나는 그가 만든 <세상의 모든 아침>이 데뷔 전 거친 세월을 보내던 내게 얼마나 힘이 돼주었나를 주절거리며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는 내 칭찬의 말에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영화 속 음악이 참 좋았었다고 말을 돌렸다. 겸손하고 담백한 아저씨라는 인상이었다.
2004년 선댄스영화제에서 <바람난 가족>을 틀었을 때 한 미국인 관객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너희 나라에서는 아직도 남편들이 마누라를 이렇게 패냐?” 격분을 넘어서 가소로움을 느끼게 하는 태도였다. 나는 당시 프랑스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마리 트랭티냥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걸로 답을 줬다. 리투아니아에서 영화 촬영 중이던 마리가 어느 날 밤 술과 마약에 취해 있던 동거남의 구타로 뇌손상을 입고 죽은 사건이었다. 마리가 <남과 여>의 배우 장 루이 트랭티냥의 딸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마리의 어머니 나딘 트랭티냥과 새로 결혼을 해서, 마리를 어릴 적부터 키워온 양아버지가 알랭 코르노였다는 사실을 안 건 몇년 뒤였다. 그때 나는 <오래된 정원> 개봉을 앞두고 파리에 있었다. 알랭은 내 프랑스영화쪽 친구를 통해 나와 커피라도 한잔 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뜻밖이었다. 그 친구에 의하면 알랭은 그때 양딸 마리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속에서 길고 고통스러운 칩거 생활을 끝내고 새 작품의 후반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다니엘 오테유, 모니카 벨루치가 나오는 제법 큰 예산의 영화 <두 번째 숨결>이었다.
카페에 나타난 알랭은 내게 아주 다정했다. 새 영화를 찍으면서 <그때 그사람들>의 몇 장면을 그대로 베꼈으니 이해해달라는 농담도 했고, 내가 기획하고 있던 파리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격려를 해주었다. 프랑스 말을 하나도 못하는 아시아 감독이 프랑스 배우 스탭들과 영화를 만든다는 게 가당키나 하나, 라는 나의 걱정에 그는 자기가 일본에서 영화를 찍은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개봉하는 <오래된 정원>도 꼭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편집실로 사라져버렸다. 나와 함께 있었던 프랑스 친구들은 도대체 알랭이 뜬금없이 오늘 여기에 왜 나타났는지 잠시 토론을 했다. 나는 그가 나한테 다정하기 위해서 나타났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다정함이 고마웠고 진심으로 부러웠다.
며칠 뒤 서울에 돌아왔을 때, 알랭의 이메일이 와 있었다. <오래된 정원>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이 담긴 짧은 글이었다. 하지만 알랭은 분명히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 마지막에서 지진희, 이은성 부녀가 마침내 만나는 모습을 염정아 귀신이 지켜보는 장면은, <세상의 모든 아침> 속 생트 콜롱브가 매일 밤 죽은 아내와 나누는 뼈아픈 해후를 베낀 거라는걸.
알랭을 마지막으로 본 건 샹젤리제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시사회장에서였다. 그때 살짝 눈인사만 나누었던 알랭의 부인 나딘 트랭티냥이 마음에 계속 걸린다. 그 다정한 남자를 잃고 혼자 남겨지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