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갸우뚱했다. 박신혜가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한다고 ‘고집’했을 때. 박신혜는 영화에서 연애도 조작이 가능하다고 믿는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일원인 민영을 연기한다. 의뢰인의 데이트 코치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스타일까지 점검하는 막중한 역할이다. 게다가 의뢰인의 데이트 상대가 자신의 옛 여자친구란 이유로 흔들리는 팀의 대표 병훈(엄태웅)을 다그치는 시어머니 역할이자, 남몰래 그를 좋아하는 복합적인 캐릭터다. 박철민, 엄태웅 등 나이차 많은 구성원이 속한 연애조작단에서 가장 어리지만, 이성적인 지수로 보자면 가장 어른스러운 역할이 민영이다. 바로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런 역할로 각인돼온 박신혜에게 내려진 지령이었다.
“신혜를 왜 그런 역할을 시켜, 하는 반응이 많았어요. 게다가 여주인공은 이민정씨가 연기하는 ‘희중’이니 주인공 자리를 탐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였죠.” 아니나 다를까, 초반에 주변의 반발이 꽤 거셌나보다. 그런데 박신혜, 본인의 선택은 달랐다. “전 민영의 입장이 맘에 들었어요. 단원의 일원이면서도 한 발짝 떨어져서 그걸 즐기는 객관적인 캐릭터죠. <광식이 동생 광태>를 연출한 김현석 감독님에 대한 믿음도 컸고요.” 주연에 대한 욕심도 버렸다. “드라마는 경험이 많지만, 영화는 시작 단계잖아요. 굳이 역할 크기 따지지 않고 1분 1초라도 맘에 드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었어요. 이번 작품을 대하는 제 욕심이었죠.”
박신혜가 주조해낸 민영의 캐릭터를 평가하자면, 꽤 높은 점수를 주어도 아깝지 않다. 연애조작단의 모든 사건이 이른바 의뢰인인 상용(최다니엘)과 그걸 저지하려는 병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그 한켠에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민영의 시선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이미 맘이 뺏겨버린 사람을 다시 바라보아야 하는 쓸쓸함. 사랑에 있어서 영원한 약자,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민영은 바로 ‘여자 시라노’, 영화를 단순 코믹물에 그치지 않게 하는 숨은 축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고도의 연기가 필요한 감정싸움이었다. 그리고 21살, 어린 박신혜에게 역시 가장 생소한 감정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대학 들어와서 짝사랑 경험이 있었어요. (웃음) 그때의 기억을 살렸죠. 그래도 이제껏 밝은 연기를 해왔는데 이만한 난관은 처음이지 싶더라고요. 몸이 아니라 정신이 힘들었다고 해야 할까. 매니저 오빠가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촬영하면서 만날 울고, 이걸 어떻게 하냐고 하소연했으니까요.”
힘든 과정이었지만, 결과를 떠나 그녀는 이번 작품에 남다른 가치를 부여한다. “드라마 <미남이시네요>부터 따져야겠죠. 두 작품이 제가 사춘기를 통과한 뒤의 새로운 작품인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박신혜에게 또래 친구들이 말하는 사춘기는 연기하느라 바쁜 시절이었다. 교회 선생님들이 뮤직비디오 오디션에 박신혜의 사진을 보냈고, 그 길로 발탁돼 준비생을 거쳐 이승환 뮤직비디오 <꽃>을 찍은 게 데뷔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이미 연예계 생활을 경험한 아역 출신이니, 또래와는 다른 경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천국의 계단>도 <비천무>도 모두 또래 친구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시절, 그걸 뒤로 미루고 맡았던 역할이다. “연기하느라 남들 다 겪는 사춘기를 전 모르고 지나갔어요. 그런데 대학 들어와서 사춘기랄까, 질풍노도라고 말하는 그런 고민이 찾아오더라고요.” 대학에 들어간 뒤, 박신혜는 연기자로서 커리어에 1년여 무단결석을 감행했다. “대학생활을 경험하고 싶었어요. 그런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내 경험이나 생활바탕도 없어지겠다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죠.” 그녀의 결단이야 어쨌건, 박신혜의 휴지기는 거대한 연예계에 별스럽지 않은 사건이었다. 아역배우가 흔히 그러듯, 다들 연기 접고 이제 다른 생활을 하겠거니 추측했고, 자칫 잊혀질 뻔도 했다. 동기 친구들이 주목받는 동안, 그녀가 과연 카메라 앞에 다시 설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그녀의 사춘기도 차츰 정리됐다.
사춘기의 끝은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남장 여자 역할을 감행했던 <미남이시네요>의 고미남이 첫 번째 시도였고, 그 기운을 받아서 또 다른 시도를 감행한 것이 지금의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민영이었다. 둘 다, 모두들 아니라고 했고, 둘 다, 박신혜는 썩 잘해냈다. “아역배우에서 여배우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가 저를 지켜봐주는 분들의 걱정일 거예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그 성장이 어색하지 않다는 평을 들었어요. 부러 ‘변신’하려 하지 않고,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을 찾아가는 느낌. 그런 절차를 밟게 해준 작품이라 애착이 가고 고마워요.”
다섯살 때쯤 집에 도둑이 들었고 그때 이후 연기를 알기 전까지 그녀의 꿈은 쭉 경찰관이었다. 온갖 운동을 좋아했고, 여성적인 외모와는 사뭇 대척점에 있는 털털한 성격의 아이였다. 누군가 발탁해주지 않았더라면, 남보다 춤을 잘 추거나 노래를 잘 부르는 그녀의 요소들도 그냥 평범한 재주에 그칠 성질의 것이었다. 그런데 ‘연기자’라는 타이틀로 명명되는 요즘은 오히려 누가 시켜서 했던 그 시절을 많이 떠올린다. “어릴 땐 순수하게 감정 자체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슬픈 장면이 있으면 그냥 슬퍼서 우는 거지, 예쁘게 울어야 한다거나 그런 생각이 없었죠.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많아졌어요. 그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독이 될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작품 할 때는 계속 힘을 빼자, 라는 주문을 외웠죠.”
박신혜는 지금의 느낌을 되살려 빨리 다음 작품을 하고 싶다. 남들이 도전이라고 말하는 것, 말리는 것들은 오히려 더 해보고 싶다. 가령 액션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장쯔이가 보여주었던 연기도 그녀의 관심사다. 민영을 보고서 들어온 시나리오도 꽤 되니 이젠 결정만 남았다. “근데 요즘 인터뷰하면 연기 이야기 말고 제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 같아요. 어떤 배우가 돼야 할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지도 제가 애써 찾아야 하는 길이니까요. 제 연기도 그렇게 만든 제 모습이 반영되면서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