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펜 감독이 9월28일 세상을 떠났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상징적 인물이 된 펜은 <미라클 워커> <체이스> <작은 거인> 등을 통해 미국영화계에 젊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평소 아서 펜의 작품세계를 사랑해왔던 이송희일 감독이 뜨거운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애초에 시도되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프랑수아 트뤼포가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길 위에 선 대공황 시대 갱들의 고독한 정취는 섬세하게 포착되었겠지만, 그 장엄하고 비극적인 마지막 엔딩은 결코 연출되지 않았으리라. 에릭 로메르 영화들이 마치 페인트 마르는 것과 같이 건조해서 싫다던 아서 펜은, 그에 앞서 <체이스>를 통해 구현한 동정 없는 세상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엔딩에 핏빛의 돋을새김처럼 새겼고, 이것은 곧 영화사적 사건이 되고 말았다. 기관총 세례와 함께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그래, 솔직히 고백하자, 나는 아서 펜 빠돌이다. 팬심이 너무 깊어, 엇비슷한 주제의 <탈주>를 제작하기 전에 의당 다시 보아야 했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일부러 건너뛰었다. 너무 많이 훔칠까 무서웠다. 대신 소심하게, <체이스>의 아름다운 오프닝 장면 일부분을 아무도 모르게 <탈주>에 그대로 베껴넣는 것으로 그에 대한 연정을 확인했더랬다.
누가 뭐라든 나에게 말론 브랜도가 가장 섹시하게 나오는 영화는 <체이스>고, <그들은 밤에 산다> <건 크레이지> <보위와 키치> <황무지> 등 거의 같은 계열로 묶일 수 있는 걸작들 사이에서 총을 들고 길 위에 선 연인의 이미지가 가장 강렬한 영화는 단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이며, <작은 거인>을 통해 사회적 소수자를 다루는 미덕을 배웠고, 또한 <나이트 무브>의 절망에 찬 엔딩을 통해 출구가 봉쇄된 사회를 견뎌내는 방법을 배웠다.
혹자는 아서 펜의 영화가 온통 절망뿐이라고 불평하곤 한다. 우리에게 내일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위장된 희망, 달콤히 제시되는 서푼짜리 그 거짓 희망보다 때론 심연의 밑바닥에 널브러진 채 총알을 향해 손짓하는 ‘데카당스’가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이 사회의 진짜 모습을 남김없이 폭로하는 데 훨씬 더 밝은 눈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아서 펜의 주인공들은 폐쇄적인 공동체로부터 튕겨져나간 주변인들이다. 그는 버림받은 자들의 절망에 그 사회의 실제 모습이 응축되어 있다고 믿었다. 바로 그 점이 내가 그를 지지하는 이유다.
어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거인 아서 펜이 88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답답한 스튜디오에서 벗어나 카메라를 들고 길 위에 섰던 뉴 시네마 시대의 별들이 하나하나 떨어지는 걸 지켜보는 일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아직도 배울 게 너무 많고 여전히 그들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 서툰 초짜 감독이어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그들이 영화를 통해 삶과 세상을 사유하던 한 시대 시선의 힘을 미처 다 터득하기도 전에 우리 곁을 떠나는 것 같아 그렇게 한참 먹먹하다.
그래도 불멸의 영화들이 우리에게 남아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그 위대한 영화들이 바로 우리에게 내일을 만들어주니까. 아서 펜 감독님, 편히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