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당신의 해석을 기다리며
2010-10-14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홍상수의 이야기 교육2, 이야기의 무한한 변화와 성장를 경험하라

허다한 평자들이 이미 지적했던 바, <옥희의 영화>에서 인과의 질서를 규명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는 짓이다. 이 영화에는 지엽적인 세목들을 통솔하여 조리있게 이야기를 엮어가려는 서사의 움직임이 의도적으로 회피되고 있다. 서사의 일관성, 질서정연함, 통일성은 부단히 훼손될 뿐 아니라 종국에는 사라지고 만다. 4부 ‘옥희의 영화’에서 ‘나이 든 남자’와 ‘젊은 남자’라는 탈인격화된 호명법으로 불리는 두 남자는 개체성을 지닌 한 인물이라는 영화의 정통 관념마저 의문시한다. 그러므로 진구는 다 한 진구이며, 옥희는 다 한 옥희인가, 송 교수는 하나의 송 교수라고 할 것인가 따위의 물음은 <옥희의 영화>에 관한 한 그리 건설적인 질문이 못 된다. 한 이름과 한 배우에 의해 표현되는 네편의 인물이 동일인인지, 한 인물의 과거와 현재 상(像)인지, 그도 아니라면 한 인물 속에 여럿의 특성이 혼재된 합성과 분열의 상인지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정형화되지 않은 패턴에 따라 교차하고, 우연히 만났다가 헤어지며, 심지어 우연조차 필연을 은폐하기 위한 장막으로 읽어낼 수 있는 인과의 논리를 품고 있지도 않다. <옥희의 영화>는 대답을 예비해두지 않은 질문이므로 애써 큰 그림을 그릴 생각은 포기하는 편이 좋다.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기를 기대하는 관객의 소망을 배반하는 홍상수의 다른 영화들처럼 <옥희의 영화>는 종종 완고한 형식주의자의 정밀함과 지엄함으로 생기를 얻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연상케 하는 네 조각 구성을 취한 이 영화는 나란히 세워진 이분구조를 즐겨 사용했던 이전 홍상수 영화들을 완곡하게 벗어나려는 홍상수다운 욕망의 귀결이다. 그러나 창작의 비밀을 선선히 들려주는 듯한 4부 ‘옥희의 영화’처럼 <옥희의 영화>는 반복과 차이의 원리에 대한 새삼스러운 진술만은 아니다. 여전히 홍상수 영화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요소는 ‘내러티브 구축의 원리’이며 오로지 그만이 소화할 수 있는 독창적인 이야기의 구문론이다. 절대가치와 의미, 신의 전언이 부재한 무정형의 이미지들 안에서 홍상수는 이미 주어진 또는 역사적으로 신봉되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에게 내재한 본성에 의해 구성된 이미지, 새롭게 건설 중인 미완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나이콘 카메라와 영수의 일생

<옥희의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나를 자극한 것은 1부 ‘주문을 외울 날’의 도입부에서 진구의 아내(백정림)가 열린 대문을 나서며 잘못 부른 이름 ‘영수’이다. 진구(이선균)의 머릿속에서 빙빙 맴도는, 그래서 “영수가 누구지? 영수가 누구야?”라고 진구가 되풀이해 자문하는 영수는 진짜 누구인가? 진구는 불현듯 사촌 형 이름이 영수라는 걸 기억해내고, 그럼 “마누라와 사촌 형이 사귀는 건가”라고 상상의 비약을 펼친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강사 회식 자리에서 진구는 송 교수(문성근)가 유도 5단인 사촌 형이랑 닮았다는 걸 두번이나 이야기한다. 요컨대 진구의 부인이 잘못 부른 이름 영수는 진구의 사촌 형과 동명이며, 송 교수는 그 사촌 형과 닮은꼴이다. 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는 말을 단서 삼아 조금 더 관계망을 넓혀보자. 영수는 홍상수의 세 번째 영화 <오! 수정>에서 문성근이 연기했던 독립영화감독의 작중 이름이기도 하다. 고로 <옥희의 영화>에서 진구가 궁금해하는 영수는 송 교수를 닮았는데, 그는 <오! 수정>의 영수와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송 교수와 영수는 모두 문성근이 연기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오! 수정>과의 아리송한 연결고리는 이름을 잘못 부른 빗나간 호명에도 있다. <옥희의 영화>에서 이름을 잘못 부른 아내처럼 <오! 수정>에서 재훈(정보석)은 연심을 품은 수정(이은주)과의 섹스를 앞둔 중요한 순간 그녀의 이름을 ‘정화’라고 잘못 불러 낭패를 본다. 재훈의 실수는 먼 길을 돌아 진구의 아내에게 전염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이렇게 비약적인 상상을 동원해볼 참이다. <오! 수정>의 영수가 독립영화감독으로서의 고단한 삶을 포기하고, 대학교수가 되었다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별 주목을 끌지 못할 테지만 말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닌 디테일의 부활은 ‘주문을 외울 날’에 더 있다. 이 사소한 미스터리의 주인공은 진구가 학교 벤치에서 만난 사진 찍는 여인이다. 화면 밖 목소리로 등장해 유령처럼 프레임 안으로 스며드는, 스토리의 진행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바로 그 여자이다. 대관절 이 여자는 누구인가? 벤치에 앉아 강사 회식을 기다리다 잠이 든 진구를 카메라로 몰래 찍던 그네는 진구에게 발각된다. “뭘 찍는지 알고나 찍는 거예요”라는 핀잔에 이어 “카메라는 좋은 거네”라고 눙치는 진구에게 그네는 “네. 나이콘 카메라예요”라고 한다. 상대가 민망할 정도의 실소를 흘리며 진구는 “나이콘이 아니라 니콘”이라고 바로잡는다. 여기서 나는 홍상수의 다른 영화에서 보았던 ‘나이콘’을 말하고 싶다. <강원도의 힘>에서 강원도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날 버스터미널에서 지숙(오윤홍)의 친구 은경이 분실한, 그래서 그곳에서 만난 유부남 경찰(김유석)이 “그 카메라 이름이 뭐라 그랬죠?”라고 묻자 “나이콘이요, 한달도 안된 거거든요”라고 했던 바로 그 나이콘이다. 그때도 ‘나이콘’이라는 이름이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옥희의 영화>의 진구에 의해 나이콘은 니콘으로 비로소 바로잡힌다. 카메라라면 또 다른 게 떠오르기도 한다. <오! 수정>에서 재훈이 영수에게 빌려주었다 받지 못하는 카메라, 그래서 선배를 도둑놈이라고까지 부르게 된 그 일제 카메라다. 그러니까 <강원도의 힘>에서의 오류는 <옥희의 영화>에서 비로소 수정(修正)된 셈이고, <강원도의 힘>과 <오! 수정>에서 분실되고 빼앗긴 카메라는 <옥희의 영화>에 다시 등장한 셈이다. 그래서, 나이콘이 어쨌단 말인가? <옥희의 영화>의 나이콘 카메라와 <강원도의 힘>의 나이콘 카메라 사이의 연결에 숨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주 새삼스럽고 먼 길을 돌아 이들 영화가 접속한다는 사실이다. 저들을 연결하는 모종의 배열의 원리 안에 나는 홍상수 영화에서 일화적 사건들의 구성에 작동하는 철학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옥희의 영화>에서 하찮게 보이지만 별안간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는 세 번째 오브제는 ‘처음처럼’이다. 2부 ‘키스왕’에서 진구가 하루 종일 입에 달고 다니는 소주 ‘처음처럼’. 1부 ‘주문을 외울 날’의 첫 시퀀스는 대문을 통해 걸어나오는 유부남 진구를 보여주는 것으로 열린다. 2부 ‘키스왕’은 같은 포즈로 대문을 통과해 나오는 청년 진구로 끝이 난다. 말하자면 ‘처음처럼’의 종결인 셈이다. 그러므로 ‘키스왕’에서 진구가 종일 가방에 넣고 다니며 홀짝거리는 ‘처음처럼’은 이미 우리에게 이 단락이 ‘처음처럼’ 끝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또 다른 ‘처음처럼’은 <생활의 발견>에 있다. 춘천을 경유해 경주에 당도한 경수에게 선영은 기차 앞에서 “처음처럼 언제나 그렇게 하세요”라고 당부하듯 말한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포한 다짐과 같은 그 말은 기묘한 공명을 이루며 <옥희의 영화>와 연결된다. 장담치 못하겠으나 홍상수의 영화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처음처럼’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사소한 디테일은 <옥희의 영화>에 널려 있다. 3부 ‘폭설 후’에서 송 교수가 골목가에 게워낸 토사물도 한가지다. 구토는 특히 홍상수의 영화에서 빈번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2부, 전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동우는 옆자리 승객의 토악질로 옷을 버리고, <오! 수정>에서 재훈과 영수는 토하기 위해 번갈아 화장실로 달려간다. 그러므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오! 수정> <옥희의 영화>를 미세하게 연결하는 구토의 계열이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시공간의 좌표를 넘어 접속하는 디테일

나이콘과 영수, 처음처럼, 그리고 구토. 이런 것들이 왜 흥미로운가 하면 서사의 핵심과 별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던 나이콘 카메라, 진구가 궁금해 죽겠다는 듯 안달했던 영수, 의도적으로 그 이름을 강조한 처음처럼에 대한 어떠한 해명도 <옥희의 영화>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궁금증과 혼란을 안기는 이 긴장감 넘치는 사물과 이름, 행위는 발생과 동시에 소멸해버린다. 소멸한다면 그것은 죽은 것인가? 그러나 한 영화에서 묘사된 디테일이 다른 영화로 이동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이 사물들은 새로운 차원으로 바뀐다. 시공간의 좌표를 비월하여 접속하는 저들은 전혀 다른 의미의 긴장을 증폭시키는 수직적 계열구조의 기호들이다. 아무런 상징이나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 이 낯선 오브제들은 그 자리에 삽입된 이유가 분명치 않은데, 멀리 떨어진 이야기를 이어주는 단순한 연결 기능을 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고, 한 영화의 이야기를 다른 영화로 결속하고 확장하는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고로 저들은 극적 기능을 상실한 무의미한 기표에 불과하지만, 구조적으로 디자인된 디테일이라고 볼 수 있다. <옥희의 영화>에서 이런 의외의 결합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그것은 때로 나이콘과 같은 오브제이거나 영수와 같은 인물, 때론 구토라는 형상, 더러는 ‘처음처럼’이 상징하는 초심의 다짐 같은 개념일 때도 있다.

<옥희의 영화>에서 홍상수의 서사 진술 방식은 플롯을 포기하고 패턴 또는 무늬를 택한다. 내러티브의 수평적 운동을 원거리에 놓인 디테일들의 연결이라는 수직적 운동으로 치환하는 것, 행위와 이미지의 반복과 차이를 통해 영화적 구문의 관계를 새로 정의하거나 무의미를 강조하려는 시도는 이같은 방법론이 실현된 결과이다. <옥희의 영화>는 특정한 개념으로의 환원 또는 개념화 자체를 거부한다. 그 자신이 독립된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네편은 각기 서로를 반영(‘주문을 외울 날’과 ‘키스왕’)하고, 종합하려는 욕망(‘옥희의 영화’)을 비추다가 끝내는 해체해버린다(‘폭설 후’).

관행화된 내러티브의 괄호를 벗어나 그 바깥에서 새로운 비전을 추구하는 홍상수의 내레이션은 주류 이야기 관습에 저항하는 것으로 본분을 다하는 대항의 내레이션이 아니라 그 자신의 논리와 체계에 근거한 대안의 내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몇개의 사례를 통해 탐문한 <옥희의 영화>의 내레이션 전략은 ‘수직적 계열구조’에 기초해 있다. 하나의 인물을 둘로 쪼갠, 그래서 한번의 마주침도 없었던 <하하하>의 두 남자주인공처럼 <옥희의 영화>의 인물들은 인간 됨됨이의 여러 특질이 겹치고 진화하는 양상으로 섞인 모습을 하고 있다. 말과 사물, 이미지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영화에서 미스터리하게 등장했던 말과 사물, 이미지들이 지금 영화에 투사되고, 그 순간 새로운 맥락으로 굴절되고, 예사롭지 않은 의미로 반향하는 구조이다. <옥희의 영화>는 바로 이 자리에 놓인 이미지뿐 아니라 이미 우리가 보았던 전사(前史)의 이미지들과 관계를 맺는다. 여기에는 선형적인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지나간 것들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며,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들에 의해 완전히 다른 맥락과 대답을 얻는다. 과거는 원인이기만 하고 현재는 그 결과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현재는 과거에 의해 재생산되며, 과거는 현재에 의해 갱신된 차원을 얻는다. 뒤늦게 그 미스터리의 일단을 슬쩍 비추는 유보된 이미지의 계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미지의 수직적 계열구조

이처럼 <옥희의 영화>는 기다림과 결벽의식, 죽음, 거짓말, 허튼 소문, 나이콘, 구토 등 홍상수 영화에 빈발하는 사물과 말, 행위들의 계열을 통해 성립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말들의 계열, 행위들의 계열, 이름들의 계열, 형상들의 계열 등 고립되어 분산되어 있는 이미지는 계열화의 섭리에 따라 하나의 플롯을 구성한다. 의미의 인력에서 풀려난 그 이미지들은 불안하고 희미하며,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불현듯 결속한다. 고로 별안간 출현한 저 극미한 세부들은 어찌 보면 ‘잘못된 연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옥희의 영화>에는 이런 이상한 디테일들이 많다. 어떤 흐름과도 거리가 먼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강원도의 힘>에서 멀리 떨어진 산 부근에 맥없이 버려진 금붕어, 그래서 지숙이 “야, 이게 왜 여기 있지?”라고 질문하는 그 괴이한 존재처럼 <옥희의 영화>의 진구는 벤치에 놓인 서울우유 팩을 보고 같은 질문을 되뇐다. “이게 왜 꼭 여기 있는 거냐고?” 그걸 알면 우주의 비밀을 알 것만도 같은 사물, 유령처럼 두 인물이 지나간 길에 놓인 그 물건은 그들의 동시발생과 우연, 우연한 마주침을 거쳐 발견되지만, 어떤 의미론적 해설도 들려주지 않은 채 남겨진다. 이러한 디테일들이 비로소 삶을 얻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다시 발견했을 때다. 홍상수가 구사하는 계열구조는 어떤 재통합의 의지도 결여된 이미지들로 짜인다. 거기엔 해명을 요구하는 논리적인 정합성이 부재하며, 의미에 강박된 수평적 결합 또한 느슨하지만 수직적 계열화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을 목격하고자 하는 울창한 신생의 욕망이 꿈틀댄다.

언젠가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 홍상수가 추구하는 세계의 비밀은 위상학적 특이성에 따른 상이한 배치에서 찾을 수 있다. 말과 행위, 이미지의 반복과 차이를 한 영화 안에서 연결짓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영화와 영화 사이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요소들의 연결이며, 그들의 새로운 관계맺기이다. 이미지의 수직적 계열구조는 한 영화 안에서뿐 아니라 영화와 영화 사이, 간 텍스트성이라는 측면에서 더 깊이 고찰될 필요가 있다. 영화와 영화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 한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 사이에 흩어져 있는 기괴하고 뜬금없는 이미지들은 아주 먼 거리를 넘어, 숱한 장애와 미로를 통과해 서로를 향해 움직일 것이다. 여기서 한 영화 안에서의 동질성 내지는 차이를 가지고 직관적인 인상을 형성해나가는 것으로서의 반복이 아니라 홍상수 자신이 만들었던 영화의 역사를 관통하고 가로지르는 이미지의 계열화가 중요해진다. 별개의 디테일들은 한데 놓여져 있는 전체의 상태, 그 전체가 유동적인 흐름을 갖는 움직임 속에서 독자적인 맥락을 형성한다. 시간과 그것이 놓인 장소에 따라 역동적으로 생성, 변화해가는 다면체의 특징을 지닌 이미지의 위상학을 홍상수의 영화는 보여준다. 예컨대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에서 계절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을 종종 강조했는데, 같은 이야기도 어느 계절에 보이느냐에 따라 그 정감과 뉘앙스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혹독한 추위가 인물들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암시하는 것만 같았던 <오! 수정>의 겨울 흑백 장면처럼, 변덕스러운 통영의 여름 날씨만큼이나 불투명했던 <하하하> 속 인물들의 불안한 미래처럼, 담뱃불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매서운,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제주도 바닷가 바람처럼, <옥희의 영화>는 그 계절감에 힘입어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진구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것은 그날이 “너무 추운 날”이라는 것이다. 몹시 추운 날 진구는 약속된 상(賞)을 놓치고 옥희의 방 옆에서 오들오들 떨다 아침에야 옥희의 방에 들어 언 몸을 데운다.

이야기 교육을 통한 인식의 테라피

이미지의 계열구조를 고려할 때 홍상수의 모든 영화에서 사소해 보이는 사물을 중심에 둔 새로운 이야기의 재편이 필요하다. 갑자기 <오! 수정>의 영수를 끌어당기는 <옥희의 영화>의 영수처럼, 또는 <강원도의 힘>의 금붕어나 우주의 진리를 품고 있는 <옥희의 영화>의 서울우유 팩처럼 저들은 어떤 것도 상징하거나 재현하지 않지만 힘이 센 기호들이다. 여기서 생생하게 부각되는 것은 말과 행위, 인물, 사물들간의 비약적인 연결이다. 홍상수에게도 마찬가지로, 스토리는 한 시퀀스에서 다른 시퀀스로 이행한 흔적, 기호에 기초해 만들어진다. 숏, 모티브, 사물, 대사, 사건은 그 두 번째 등장에서 종종 모습을 변형한다. 나이콘과 처음처럼, 영수와 같은 계열구조의 요소들은 완전히 다른 좌표 사이에 발생한 사물과 액션의 근접성을 통해 이야기를 매개할 뿐 어떤 의미론적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수한 기표들이다. 홍상수의 이미지가 텅 빈 기표의 무의미라는 것은 거기에 의미가 없다는 뜻이지만, 의미가 언제나 결정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미는 유보되고, 나중에 부연되며, 언제고 다시 부정될 것이다.

<옥희의 영화>의 곳곳에서 추출되는 계열구조의 이미지들은 쌍을 이루듯 겹치면서 조금씩 어긋나는 이야기 속에서 관객의 상상력을 확장하기 위해 이미지의 목록을 쌓아가는 홍상수의 연출과 관련된다. 이 영화에서 모든 인물과 사물은 그 자신의 우주와 잠재력을 가진다. 나이콘에게는 나이콘의 일생이, 처음처럼에는 처음처럼의 일생이, 영수에게는 영수의 일생이 있다. 그 장구한 일생을 모두 다 알 순 없지만, 눈밭에 난 발자국을 거슬러 밟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남자들처럼 목표와 종점이 존재하지 않는 홍상수의 세계 안에서 그들은 결코 끝나지 않을 선으로 부단히 연결되어왔다. 그러므로 벤치에 우연히 놓인 서울우유 팩에서 우주의 비밀을 캐내려는 진구의 절박한 바람처럼 작은 사물에 불과한 그것들은 거대한 형식을 바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당신에게 큰 퍼즐을 맞추려는 열망이 있다면, 그들은 사소한 조각이겠지만 어느 순간 전체의 스토리를 멈추게 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센 기호들이다. <강원도의 힘>과 <옥희의 영화>에 등장하는 나이콘 카메라 때문에, <생활의 발견>과 <옥희의 영화>에 놓인 ‘처음처럼’ 때문에 나는 멀리 떨어진 두 이야기 사이의 연결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옥희의 영화>에서 주변의 쇳조각을 끌어당기는 힘이 센 자석처럼 모든 이야기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진구의 사촌 형 ‘영수’를 둘러싸고 재구성될 수 있다. 어쩌면 마누라가 사촌 형과 사귈지도 모른다는 진구의 당치 않은 상상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더 멀리 나아갈 수도 있다. <오! 수정>에서 후배 재훈의 일제 카메라를 빌린 뒤 돌려주지 않은 영수의 행위와 사진 찍는 여자가 소유한 일제 카메라 ‘나이콘’은 어떤 공명을 일으킬 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녀는 어쩌면 영수의 아내일지도 모른다. 영수라는 베일에 싸인 남자는 여전히 사소한 존재지만, 약동하는 기운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건설하므로 중요하다. 그들은 마치 모든 점이 열려 있어서 줄기와 연결될 수 있는 접붙이기가 가능한 줄기와 같다. 다른 줄기의 어디든 달라붙었을 때 의미가 획득되는 것,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미래의 어느 시점, 이곳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 불현듯 출현하여 접붙이기가 가능한 계열체들인 것이다. <강원도의 힘>에서 분실된 나이콘 카메라가 <옥희의 영화>에서 생환한 것처럼. 이 관계적인 이미지의 계열과 증식 안에서 홍상수의 이야기는 건설된다. 그것은 계열구조의 요소들이 접속하는 선의 수가 늘어나면 그에 따라 차원 수가 증가하는 만큼 그 다양성 내지 복잡성이 증가하는 이야기이다. 선의 종결은 불가하며, <오! 수정>의 매달린 케이블카마냥 그 의미 역시 유보적으로 매달려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그 자체로 오리무중인데, 사람들은 그 불가해한 세계를 풀이하는 정련된 해법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구조를 읽고 산개한 이미지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전적으로 보는 자의 몫이다. 홍상수의 이미지는 이렇듯 구성주의적 입장에서 배열된 오브제들이다. 무엇도 예단하지 않은 홍상수의 이야기는 무심하게 던져진 사소한 사물들의 무정형적인 결합으로부터 생명을 얻는다. 홍상수가 구조에 집착하는 것은 이 창조적 해석 행위가 정교한 구조와 이미지의 관계망에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캐릭터를 넘어, 한 편의 영화를 넘어

<옥희의 영화>는 강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관객을 교육하려는 홍상수의 이야기 교육학이 유감없이 작용하는 영화이다. <옥희의 영화>는 한명의 캐릭터를 넘어, 하나의 사물을 넘어, 더욱 크게는 한편의 영화를 넘어 확장하고 갱신되는 이야기의 무한한 변화와 성장에 대해 거듭 생각하게 만든다. 홍상수의 피조물들은 한 영화 안에 고정되지 않으며 영화와 영화 사이를 가로질러 이동한다. 일년의 시간을 넘어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누군가는 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선 경험, 말과 행위의 흔적들은 뒤따르는 것들에 의해 조금 더 그 실체가 명료해지거나 수정될 수 있다. 아주 작은 사물들이 계열을 이루며 창조해내는 더 큰 구조(영화와 영화 사이를 뛰어넘는 글로벌한 구조)를 통해 인식의 한계를 실험하는 홍상수의 연출방식은 그래서 독보적이다.

<옥희의 영화>에 드러난 반복과 차이의 양상에 대한 어떤 독법도 홍상수의 계열구조 내레이션이 성립되는 이 과정을 마저 읽어내지 않는다면 일면적 이해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므로 만약 <옥희의 영화>로부터 무언가를 느꼈다면, 필시 그것은 영화의 질료와 그들을 배열하는 형식 사이의 어떤 필연적인 연결에 의한 게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우리 안에서 싹튼 인식과 상상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옥희의 영화>의 계열구조는 위상관계에 놓인 이미지들을 통해 관객을 새로운 인식의 영역으로 옮겨놓는다. 상이한 텍스트 공간 안에 있는 다채로운 이미지들의 기이한 접속은 단선적 배열로 이루어진 연속체가 아니라 다양한 정보들이 상호 링크되어 그물망의 구조를 이루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구조적으로 조밀하고 폐쇄적인 <옥희의 영화>가 활달하고 개방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서로 몸을 대지 않고 상대방을 끌어당기는 디테일들이 기묘하게 서로를 품고 있는 그 형상 속에서 경험의 일반화, 이야기의 표준화에 저항하려는 홍상수의 인식의 테라피가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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