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환영의 예술, 영화적 마법
2010-10-14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대안적인 시간을 체험하게 하는 <엉클 분미>
<엉클 분미>

내가 처음 만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세속적 욕망>(Worldly Desire)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고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졸았다. 정글이었고, 한 여자가 무희들과 함께 ‘나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처럼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라는 내용의 노래를 끊임없이 불렀다. 뮤직비디오를 촬영 중인 듯했다. 사랑의 도피를 하는 한쌍의 남녀 이야기가 카메라 속에 담겨 있었고, 이를 촬영하는 카메라 뒤에서 스탭들이 목소리를 낮추어 농담을 주고받았다. 노래는 반복되었고, 도피는 허무하게 좌절되었으며 밤과 낮이 번갈아서 찾아왔다. 나는 내가 졸았기 때문에 그것의 서사를 언어적으로 기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졸음기 없이 다시 본 그 영화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만난 그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나는 <세속적 욕망>을 보면서 느꼈던 아늑한 현기증을 느낀다. 그것은 언어로 개념화되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그의 영화가 가진 독특한 성격 때문이다(이를 학술적인 용어로 번역하면 ‘구조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과 형식의 이분적인 구도에 저항하며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통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각적인 의미를 형성하도록 요구하는 구조영화의 특징에 대해서는 <현대영화연구 8권>에 실린 오준호의 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영화의 이중적 구조-영화적 구조에서 신화적 구조로의 확장’ 참고). 그의 영화는 보아야 하는 것이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핏차퐁의 새 영화 <엉클 분미>를 다른 환경과 시간 속에서 세번 만나면서 그것을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런 이유로 그의 영화는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글쓰기 욕망을 자극한다.

경계없는 비균질적 세계의 무한 확산

<엉클 분미>는 아핏차퐁 월드를 구축하는 수많은 ‘격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젠(제니이라 퐁파스)이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사실을 <세기와 징후>에서 이미 들었다. 뿐만 아니라 <엉클 분미>에서 절이 무섭다며 도망쳐온 통(샤크다 카에부아디)이 의젓한 스님이 되어 있는 모습을 <세기와 징후>에서 보았고, <열대병>에서는 그가 애인 켕에게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는 삼촌’ 그러니까 분미로 추정되는 인물에 대해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아핏차퐁의 영화들은 어떤 지점에서 모두 연결되어 있고 몇개의 모티브들은 미묘하게 변주되어 반복된다. <세기와 징후>의 사원 같은 병원과 공장 같은 병원에서 동일한 인물들이 유사한 대사를 전혀 다른 분위기와 상황 속에서 들려주었던 이질적인 풍경의 조합은 아핏차퐁 월드의 축약적인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영화 속의 통과 젠 그리고 다른 인물들을 아는 것은 분명히 그들에 대한 참조점들을 제공하지만 그것들이 선후 관계나 인과 관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단일한 지점으로 수렴되는 종류의 지식이 아니라 더 많이 열리기 위해 확산되는 종류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아핏차퐁이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은 루카스식 세계 구성법(혹은 일반적 내러티브 영화의 시퀄 구성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이 굳이 벽돌이라는 단어 대신 ‘격자’라는 용어를 채택한 이유다. 그의 세계는 ‘스타워즈’ 세계처럼 중심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축으로 한 시간적, 공간적인 질서를 구축하지 않는다. 분명한 경계와 순서가 존재하는 선조적, 구성적 세계. 그것은 분미가 결코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없어 창고로 쓰던 콘크리트집 같은 것이다. 격자들은 어떤 위상이나 중심없이 확산되고 무한증식할 수 있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그의 영화들은 리좀형 구조를 취한다. 한편 한편이 독립되어 있지만 서로서로 겹치고 한편이라고 구획된 영화 안에서조차 분절되며 접합된다. 분미의 생은 달아난 소와 원주민 가족들, 공주와 메기 이야기와 별다른 설명없이 붙는다. 그것은 분미의 전생일 수도 미래일 수도 혹은 다른 누군가의 환상일 수도 있다. 논리적인 정합성에 대한 요구는 이미지와 이미지들이 접합되는 순간의 마법 같은 황홀감에 의해 초라하게 퇴장당한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활용은 성과 속, 남녀, 현재와 과거, 밤과 낮, 선과 악, 미와 추, 허와 실, 생과 죽음 등 모든 존재 혹은 인식의 경계에 회의를 품는 아핏차퐁 월드의 존재 기반과 관련되어 있다. 그의 영화는 불교적인 철학과 전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설화와 현실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성스러움으로 박제되는 것을 거부한다. 남녀상열지사 혹은 남남상열지사는 사원과 불교적 우화들과 결합하고 승려들은 노트북과 채팅을 통해 세상으로 스며든다. 성(聖) 안에 속(俗)이 속 안에 성이 혼재되어 있다. 분미의 죽은 아내 후아이와 행방불명된 아들 분쏭이 각각 유령과 원숭이 유령의 모습으로 천연덕스럽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일부러 ‘TV드라마의 형식’을 빌려 찍은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신비로운 비존재를 가장 통속적인 재현 방식으로 조망하고 TV를 보거나 야식을 먹는 것과 같이 일상적인 행위들은 유체이탈 혹은 영육의 분리와 같은 신비 체험과 곧바로 접속되기도 한다.

‘정글이나 언덕 계곡 앞에 서면 짐승이나 다른 존재였던 나의 전생이 떠오른다’는 영화의 첫머리의 자막에는 아핏차퐁의 모든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정글에 대한 애정고백의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화에서 정글은 밤과 낮에 따라 두 가지 얼굴을 갖는다. 낮의 정글은 자연이며, 삶의 시간이고, 전쟁과 투쟁의 공간이다. 밤의 정글은 어둠이며 영혼들과 짐승들의 공간이며 신비스러운 시간이다. 원숭이 유령이 되어 저녁 식탁 자리에 앉은 분쏭은 말한다. “여긴 너무 밝아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여기서 빛은 시야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시야를 가리는 존재가 된다. 분쏭은 아버지의 카메라로 사진술을 익히다 원숭이 유령에 매혹되었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 빨갛게 빛나고 더 많은 것을 본다. 분쏭의 삶은 영화를 닮았다. 카메라가 발견하게 한 새로운 세계. 그것은 인간의 눈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기계적으로 포착하고, 때로는 뒤늦게 깨닫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인다.

빛과 그림자의 전복된 질서

분미는 후아이를 따라 어두운 동굴에 들어가 죽음을 맞는다. 그는 그곳이 자궁과 같다고 말하며 언젠가 자신은 여기서 태어난 것 같다고 한다. 그는 동굴 속에서 전생을 느끼며 미래를 본다. 그의 미래에 관한 내레이션과 함께 제시되는 것은 밝은 대낮의 초원, 포획된 원숭이 유령과 군인들의 스틸 사진이다. 미래는 물리적으로 밝지만 그 밝음은 희망보다는 공포를 내포한다. 이미지들의 움직임은 사라지고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처럼 귓가를 가득 채웠던 신비로운 정글과 동굴의 사운드 역시 정적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분미의 병든 육체를 지켜보던 원숭이 유령들의 빨간 눈빛은 어둠 속에서 루비처럼 빛났다면, 군인들에게 포획된 그의 눈빛은 빨갛게 충혈되고 초라하게 빛을 잃는다. 아핏차퐁은 분쏭의 이야기 속에 군대와 정부에게 내몰린 숲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역사를 담았다고 한다. 그것은 분쏭의 이야기인 동시에 분쏭의 아버지인 분미의 미래이기도 하다.

분미가 말하는 미래 속에서 ‘그들’은 한 사람을 잡아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화면에 비추고 그 사람은 사라진다. 이 섬뜩한 미래는 정보와 기록이 인간을 대신하는 현재 우리 삶의 어떤 단면을 내포한다. 하나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이로운 유동적 생명 에너지가 순간적으로 고정된 파편들을 통해 구성되어 인식되는 상태가 그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영화 형식에 관한 진술로 읽을 수 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 있는 내러티브와 시공간적 질서를 가진 영화 속에서 인간의 삶이 가진 다양성과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가. 그는 통과 젠이 각각 두개의 육체로 분리되어 하나는 호텔방에 다른 하나는 음식점에서 보내는 것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 순차적으로 흐르는 시간이 아닌 대안적인 시간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엉클 분미>는 눈을 밝혀주는 어둠과 본질을 압도하는 환영의 예술인 영화의 본령과 다종다기하게 뻗어나가는 시간성과 공간성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무정형의 삶을 마법처럼 접속시킨다. .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