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톡]
[조성규] 마흔, 나에게 주는 선물이랄까
2010-10-13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오계옥
<맛있는 인생> 연출한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는 관심도 재주도 다방면이다. 그는 김기덕과 홍상수 감독 영화의 투자 및 제작자, 질 좋은 영화의 수입업자, 작지만 알찬 한국영화의 배급업자, 그리고 아담한 극장의 극장주다. 배우와 감독들이 즐겨 찾는 카페의 사장님이기도 하고 와인에 조예가 깊은데다 미식가다. 그런 그가 연출작까지 내놨다. <맛있는 인생>이란 제목이 자신과 썩 잘 어울린다. 빚에 쫓겨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강릉으로 내려갔던 영화업자가 20대 초입의 여자를 만나는데 그때 남자에게 문득 떠오르는 기억. 이 여자, 20년 전 그곳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낸 여자와 너무도 흡사하다, 혹시 내 딸은 아닐까. 생전처음 만들어본 것치고는 실력도 수준급이며 부산국제영화제 비전부문에서도 상영한다. 뭐랄까, 조성규의 ‘<브로큰 플라워>’ 혹은 ‘내 나이 마흔살에는’ 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리즈’의 탄생 일화를 들었다.

-배우들에겐 뭐라고 말하며 섭외했나.
=주인공을 맡은 (류)승수씨는 (이)민기의 소개로 알게 됐다. 마침 71년생이라고 하고, 싸이더스HQ 소속이라고 해서 시나리오를 보냈다. 그전에 제작사가 우리라고만 말했지 감독이 누구라곤 말 안 했다. 재미있겠다며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미친 척하고 내가 한다고 했더니 웃더라. 승수씨도 주인공은 처음인데 내가 감독이라고 하니까 똥 밟은 거지. (웃음) 그 와중에 못한다는 말은 못하는 거고. (고)창석씨도 마찬가지다. 하루면 된다, 강릉에 와서 회나 먹고 간다 생각해라, 그러고는 그렇게 많은 대사를 주고 3일이나 붙들어뒀다.

-소문 안 내고 찍느라 현장에선 더 바빴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전화가 많이 오는데 오죽했겠나. 찍는 동안 전화 오고 컷 하고 전화받고 다시 찍고. 아주 웃긴 거지. 하지만 영화를 잘 찍고 못 찍고의 두려움은 없었다. 현장을 보면서 그동안 배운 것도 좀 있고. 물론 처음에 주변 사람들은 다 말렸지만 말이다. (웃음) 강릉은 장소를 워낙 잘 알아서 힘들지 않았는데 첫 촬영이 가장 힘들었다. 잠실에서 한남대교까지 오가며 찍었는데 뭘 찍었는지 알아야 말이지. 전체 10일 동안 9회차로 찍었고 스탭은 15명, 나머지는 현지인을 썼다. 현장에 의자 놓여 있는 거 보기 싫어서 갖다놓지 말라고 했는데 나중엔 피곤해서 저혈당으로 거의 죽을 뻔했다. (웃음)

-바쁜 와중에 만들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나.
=2006년에 <별빛 속으로> 촬영 시작할 때 현장에 들렀다가 회사 식구들하고 오랜만에 강릉에 놀러갔다. 거의 20년 전 대학생 시절에 강릉에 왔던 게 생각났다. 물론 현지에 사는 아가씨를 만난 건 아니었고 같은 숙소에 있던 여대생들하고 미팅을 한 적은 있다. 문득 지금과 같은 이야기가 떠올라서 함께 여행 간 사람들에게 말하니까 재밌겠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영화로 만들 생각은 안 하고 조금씩 써나갔다. 꽤 긴 소설로 써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리즈’ 중 하나다. 그때가 서른여덟살이었다. 내가 예전부터 마흔이 된다는 것에 대해 좀 유별난 게 있었다. 이 일 시작할 때부터 나는 마흔까지만 하면 충분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남은 삶 동안에는 다른 걸 해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고. 그런데 마흔에 일을 끝내려면 자유로워야 하는데 벌여놓은 일이 너무 많아 자유롭지가 않더라. 게다가 2008년 즈음에는 뭔가 승부가 날 줄 알았는데 더 이상하게 꼬인 거다. 나에 대한 위로가 필요해졌고 일종의 내가 내게 주는 선물 같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강릉….
=일단 가깝다. 내가 너무 좋아해서 많이 갔던 곳인데 상황이 안 좋을 때면 더 가게 되더라. 지난해 4월인가 5월인가에는 강릉 간 김에 속초를 지나 대진에도 갔다. 30년 만에 가봤다. 원래 거기에 고모와 큰아버지가 살고 계셨다. 그때 있었던 가게들이 고스란히 있고 실제로 고모가 하시던 미장원 자리도 그대로 있고, 세상은 안 변하는데 내가 변하는구나 싶더라.

-여주인공 이솜은 새로운 얼굴인데 신선하다.
=크레딧에 보면 감사한 분 이름에 신민아 이름이 있는데 이것과 관련이 있다. 2006년에 이 이야기를 처음 썼을 때는 신민아라는 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다. 그 배우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풋풋함. 사실은 지난해에 얼핏 신민아 회사쪽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막상 찍을 때가 되니 민아는 이미 너무 성숙한 배우가 되어 있는 거다. 그때 역시 (이)민기가 자기하고 같이 뮤직비디오를 찍은 이솜을 소개해줬다. 이솜을 만났을 때 내가 “냉면 좋아해요” 하고 물으니까 “강서면옥 냉면 좋아해요” 이러더라. 보통 그 나이 때는“함흥냉면, 평양냉면”도 모르는데, 아 됐다 했다. 그러고 나서 스토리를 말해줬다. 여배우 누구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전지현과 신민아, 특히 신민아라는 거다! 그 자리에서 바로 캐스팅했다. 내 영화를 위해 온 배우 아닌가. 편집을 하면서 보니 정말 좋은 재능을 지녔다는 걸 알겠더라.

-결과적으로 <맛있는 인생>은 스스로에게 좋은 선물이 된 것인가.
=며칠 전 혼자 이 영화를 보면서 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내가 이렇게 마흔을 마무리했구나 싶더라. 중요한 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 영화에 하나로 다 모아놓았다는 것이다. 장소며 음악이며 하는 것들을.

-연출을 또 해볼 생각은.
=같은 방식으로 한번 더 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당장엔 하지도 못한다. 인터뷰를 이렇게 하고 있어도 오늘 찍고 있는 영화 제작 상황 신경 쓰느라 머리가 뒤죽박죽인걸 뭐. 십 몇년 동안 영화일 하면서 돈 버는 거 빼고는 이제 다 해본 건가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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