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소로 들어온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손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자신의 방에 무려 약 600개의 카메라를 소장”할 정도로 카메라 마니아인 그는 부산영화제 기간 동안 “남포동, 해운대 등 부산의 여러 풍경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다”고 한다. <사냥>(1965) <카르멘>(1983) <보르도의 고야>(1999)등, 총 40여편의 영화를 통해 프랑코 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예술에 애정을 바쳐온 스페인의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이 처음으로 부산을 찾았다. 마스터클래스가 끝나고 마련된 관객과의 대화와 라운드테이블로 진행된 약 1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요약했다.
-건강이 좋아 보인다. 비결이 뭔가.
=딱히 비결이라 할 만한 게 없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삶의 힘이다. 글쓰기, 사진 작업, 음악을 즐기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
-<부랑자들>(1961) <사냥>(1965) <까마귀 기르기>(1976)등, 초기작들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가까워 보인다.
=원래 사진작가라 그런지 러시아영화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특히,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를 통해 ‘카메라의 눈’ 이론을 주창한 지가 베르토프는 ‘영화가 영화 자체의 속성을 되돌아보는 순간’을 알려줬다.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 친했다고 들었다. 로셀리니 또한 지가 베르토프를 여러 번 언급했다.
=네오리얼리즘의 기수였던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 역시 당대 사회 현실을 정면에서 바라보던 감독이었다. 다만 전후 이탈리아영화계는 스페인보다 사정이 훨씬 좋았다. 프랑코 정권이 독재정치를 하고 있었던 터라 스페인영화계에는 ‘자유’가 없었다.
-검열을 떠올리면 치가 떨리겠다.
=가령, 시나리오에 ‘A와 B가 대화를 한다’는 문장이 있다. 프랑코 정권은 ‘A와 B가 무슨 대화를 하냐’ ‘왜 하냐’ 등,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았다. <부랑자>를 쓰고 검열을 담당하는 문화부에 찾아갔다. 대본을 읽자마자 담당자가 책상 서랍 안에 있는 권총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그때 이후로 시나리오는 최대한 간결하게 쓰고 현장에서 찍고 싶은 것들을 전부 찍었다. 그런 나를 살린 건 내 영화를 끊임없이 지지해준 칸국제영화제와 수많은 해외영화인들이다.
-제목이나 줄거리가 바뀌는 건 일도 아니었겠다.
=다만 정부가 강제로 고친 제목 중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 <사냥>의 원래 제목은 <토끼 사냥>이었다.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 나름 머리를 쓴 건데, 정부에서 ‘토끼’는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라면서 그냥 ‘사냥’으로만 하라고 하더라. <사냥>이야말로 정말 정치적인 것 아닌가. (웃음)
-당시 스페인의 젊은 영화감독들은 프랑코 정권에 대항하는 선언을 했다. 그 유명한 ‘살라망카 담화’말이다.
=그때 나는 사진작가로 그 행사를 찍고 있었다. 막 영화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프란치스카>(1981) <불안>(1998) 등을 연출한 마뇰 드 올리베이라 감독 역시 그 행사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이들은 영화 한편 찍을 때마다 목숨을 내놓는다는 각오로 임했다.
-초창기에 스페인의 현실을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다가 어느 순간 예술에 눈을 돌렸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면서 특별히 정부에 맞서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진 건 사실이다. 그때 만든 영화가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질주>(1980)라는 작품인데 마드리드 뒷골목의 건달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이야기다.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기보다 돌려서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검열의 영향도 있겠지만 16세기 스페인 문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은유법이라고 할까. 어떤 대상과 상황을 돌려서 표현할 때 상상력을 더 많이 자극하고, 신비롭다.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아직은 없다. 2년 뒤면 여든 살이다. 독일 영화인 친구들이 80세 생일을 기념해 내 영화인생을 정리하는 이벤트를 독일에서 준비하고 있다. 전작 상영은 물론이고, 직접 찍은 사진들이 전시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