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우강호>에는 느끼한 정치적 메시지를 찾아볼 수 없고 여느 ‘무협 블록버스터’ 영화들처럼 규모를 키우고자 하는 헛된 욕망도 없다. 그 속에서 꿈틀대는 건 오직 달마의 유해를 찾아 모여든 검객들의 암투,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는 두 남녀의 끈끈한 사랑뿐이다. <적벽대전> 이후 오우삼 감독은 제작으로 물러나며 그보다 더한 물량에 이끌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메가폰을 잡은 대만 출신의 수차오핑은 자신의 영화광적 감식안을 바탕에 깔고 고전적 풍취로 가득한 무협영화를 완성해냈다. 그야말로 유려하고 우아하다. CG로 만들어진 군대와 군중이 등장하지 않는 무협영화를 보는 게 과연 얼마 만인가. <검우강호>는 지난 몇년간 만들어진 중국 무협영화들 중 단연 담백하고 세련된 영화다.
오우삼은 속편을 만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딱 한번 전편의 폭발적인 성공은 물론 서극의 적극적인 제의로 <영웅본색2>(1987)를 만든 적이 있지만 연출을 승낙하면서도 썩 내켜 하지는 않았다. <첩혈속집>(1992)도 엄밀히 말하자면 원제가 <랄수신탐>인 전혀 별개의 영화라 할 수 있다. <적벽대전>(2008) 2부작도 하나의 영화를 둘로 나눈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그는 사실상 언제나 이전작들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방식으로 새 영화를 완성했다. 그것은 할리우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드 타겟>(1993), <페이스 오프>(1997), <윈드 토커>(2002), <페이첵>(2003) 같은 영화들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기란 힘들다. 그의 팬들로서는 은근히 ‘오우삼이 만들어줬으면 하는’ 유형의 액션 누아르 영화들이 있지만 사실상 그의 관심은 언제나 딴 데 있었던 것이다. 물론 <검우강호>는 오우삼이 연출한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제작한 일련의 영화들 역시 그런 흐름 안에 있다. 그렇다면 <검우강호>는 오우삼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영화들 중에서 어떻게 다를까. 바로 <검우강호>는 오우삼이 연출 혹은 제작한 첫 번째 무협 로맨스 영화다. 제작을 맡은 곽부성 주연, 양백견 연출의 <낭만풍폭>(1996), 그리고 직접 연출한 <미션 임파서블2>(2000) 정도가 그나마 그에 가까웠다 할 수 있을 텐데, <검우강호>는 그들과 비교해도 본격적인 로맨스영화라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와호장룡>(2000)의 수련(양자경)에게 사랑을 허락하고 싶었던 것일까?
양자경이 사랑한 남자는 죽는다?
무엇보다 <검우강호>는 양자경의 영화다. ‘페이스 오프’하여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는 증정(양자경)이 처음으로 하는 일이 집을 산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언제나 혼자 살고 또한 부유한 여자였다. 말하자면 <검우강호>는 양자경이 가진 기존의 아우라를 적극 끌어온다. 장완정의 <송가황조>(1997)에서 자막에도 등장하듯 ‘돈을 사랑한’ 첫째 딸 애령은 부호와 결혼하여 은행업을 시작, 중국의 경제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성월동화>(1999)에서 장국영의 죽은 아내의 언니로 나온 그녀는 홍콩 외곽 지역에서 홀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여자였다. 그녀에게 있어 일종의 전환점 같은 허안화의 <스턴트우먼>(1996)에서 중국 군인이었던 그녀는 홍콩에서 스턴트우먼으로 일하다가, 사귀던 남자에게 딴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하나뿐인 아들과 새 인생을 시작했다. <실버 호크>(2004)에서 사회악을 처리하며 배트맨처럼 낮과 밤이 분리된 생활을 하는 룰루 역시 독신주의자였고, <게이샤의 추억>(2005)에서 과거가 궁금한 여자 마메하도 빈틈없어 보이고 강한 의지를 지닌 여자였다.
<와호장룡>은 말할 것도 없고 <와호장룡>의 주윤발과 다시 만난 <황시>(2008)에서도 아이들을 아낌없이 지원하는 대부호였다. 그렇게 양자경은 늘 기품있는 부자였고 뭔가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혼자 살아갈 때 가장 멋있었다. <검우강호>의 지앙(정우성)은 그녀와 결혼한 뒤 비단장수인 여자의 “돈을 보고 결혼했다”는 말은 듣기 싫다며 여전히 열심히 일을 하고, 증정 또한 지앙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그 마음을 여러 번 시험하고서야 어렵사리 마음의 문을 열어 결혼을 결정했다. 이처럼 양자경이 설레는 마음으로 한 남자를 사랑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던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지금껏 양자경이 사랑했던 남자는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가장 압권인 건 <예스마담2: 황가전사>(1983)인데 동료경찰이자 연인인 왕민덕은 자신이 인질로 잡히자, 양자경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빌딩에서 떨어져 죽어버렸다. <검우강호>처럼 무술 잘하는 여자친구와 못하는 남자친구의 구도랄까. 이후 <프로젝트S>(1993)에서도 우영광은 양자경을 위해 대신 죽었고, <미이라3: 황제의 무덤>(2008)에서 러셀 웡이 연기한 연인 ‘밍’ 또한 위기 속에서 죽음을 택했다. 이거 무슨 ‘저와 결혼한 남자들은 모두 3일을 넘기지 못했어요’라는 식의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도 아닐진대 묘하게도 그녀가 사랑한 남자들은 그렇게 종종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양자경이 ‘이제 나도 사랑을 해도 될까’ 고민하고 ‘정우성이 정말 괜찮은 사람일까’ 계속 시험에 들게 하며 지켜보는 모습은 묘하게 마음을 움직인다. 더불어 그것이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될 거라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장철의 흔적들
오우삼은 언제나 자신의 작품에 스승인 장철 감독의 서명을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영웅본색>(1986)이나 <첩혈쌍웅>(1989), <첩혈가두>(1990)에서 확인할 수 있듯 거의 퀴어영화에 가까울 정도로 남성적 유대와 의리의 정서를 큰 뼈대로 삼아왔다. 특히 그 스스로 ‘<영웅본색>의 전편’이라 말해온 무협영화 <호협>(1979) 역시 두 남성의 우정의 드라마이며 최근작 <적벽대전>에서 함께 악기로 대화를 나누는 주유(양조위)와 제갈량(금성무)의 모습에서도 그런 정서를 감지할 수 있다. 물론 <검우강호>에서도 이전 오우삼, 장철 영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오우삼도 데시가하라 히로시의 <타인의 얼굴>(1966)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그 자신의 연출작 <페이스 오프>(1997)다. 킬러가 자신의 얼굴을 바꿔 정체를 숨기고 속세를 떠나려 하는 그 모습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여기 더해지는 건 바로 장철의 <금연자>(1968)다. 강호를 떠나 비단 장사를 하고 있는 양자경을 기어이 끌어내 달마의 유해를 차지하려는 고수들의 이야기가 기본 줄거리라면 <금연자>에서 은붕(왕우)은 자신의 사매이자,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다시 강호로 끌어내기 위해 도적들을 죽인 자리에 금연자의 비녀를 놓으며 자극했다. <와호장룡>에 우정출연한 정패패가 바로 양자경의 선배 격 이미지라면 <검우강호>는 강호의 욕망과 자신의 평범한 삶 속에서 갈등하는 금연자의 그것을 기본 모티브로 삼고 있다. 또한 그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장철의 또 다른 영화 <오독>(1978)이 겹쳐지면서다.
타란티노가 <킬 빌>(2003)에 등장하는 5인 암살단 ‘데들리 바이퍼스’에 영감을 준 영화라고 밝혔던 <오독>에는 각각 지네, 뱀, 전갈, 도마뱀, 두꺼비 등 서로 다른 절세무공을 지닌 다섯명의 제자가 등장한다. 그 다섯 제자는 세상에 나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죽어가는 사부가 다섯명의 제자 중 막내에게 ‘오독문’을 없애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는 사형들을 찾아 거리로 나선다. <검우강호>에서 기어이 옛 동료를 찾아나서는 킬러 집단 흑석파는 그렇게 이해하면 될 것이다. 또한 흑석파의 우두머리이자 ‘절세무공을 지닌 환관’이라는 독특한 왕륜(왕학기) 캐릭터를 보며 호금전의 <용문객잔>(1967)에서 새로운 조직 동창을 이끄는 절대 고수이자 환관 조소겸(백응)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쇼브러더스 룩으로 완성된 세트
오우삼 자신의 <페이스 오프>를 시작으로 장철의 <금연자>와 <오독>을 지나 다다른 종착역은 의외로 초원 감독의 <유성호접검>(1976)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유성호접검>을 닮았다는 의미라기보다 <검우강호>가 지향하는 스타일과 이야기 구조가, 홍콩 무협영화의 거대한 전통 아래서 호금전과 장철 못지않은 스타일과 흥행의 역사를 써나갔던 초원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는 얘기다. 액션신 자체가 주는 쾌감 못지않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꽉 짜인 내러티브 또한 그 특유의 방식이었다. 특히 원색을 강조하는 가운데 은은한 실내조명 아래 도드라지는 인물들의 복식과 표정은 과거 쇼브러더스 스튜디오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야외 로케이션을 즐겼던 호금전과 장철에 비교해 초원의 도드라지는 특징 중 하나였다. 그는 마을, 정원, 성곽, 주택 등 어지간한 모든 장소들을 실내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며 그만의 독특한 실내극의 양식미를 만들었다. 물론 <검우강호>는 로케이션 촬영이 주를 이룬 영화지만 지앙 가족의 비극이 플래시백으로 보이는 과거의 집, 양자경이 일부러 문을 열어두어 세 고수를 기다리는 너른 집, 그리고 정우성과 양자경이 생계를 유지하는 성안 마을의 모습 등은 여러모로 ‘쇼브러더스 룩’으로 완성됐다.
초창기 애정문예영화로 이름을 높였던 초원은 기존의 호금전이나 장철은 잘 다루지 않던 무협영화 속의 로맨스를 한폭의 시화처럼 유미주의 기법으로 다뤘고, <유성호접검>을 비롯해 <천애명월도> <다정검객무정검> 등 주로 고룡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하며 특유의 세밀하고 탄탄한 구성을 보여줬다. 고룡이 대만 대표 무협 작가임을 떠올려보면 오우삼이 대만 출신 수차오핑을 감독으로 끌어들인 것은 자연스런 결정이었던 것 같다. 젊어서 고룡을 비롯해 무협지에 빠져 지낸 영화광인 그는 무협영화뿐만 아니라 첸쿠오푸의 호러영화 <더블 비전>(2002)의 시나리오를 썼고 데뷔작인 <애정영약>(2002)은 발랄한 코미디 감각이 돋보이는 영화이며 두 번째 장편 <실크>(2006) 또한 SF와 호러, 스릴러를 종횡무진하며 그를 주목받는 신진 감독 대열에 확고히 올려놓았다. 기존 고전 무협영화들의 세계를 자유로이 오가며 탄탄하고 유려하게 <검우강호>를 완성한, 그러니까 장철과 초원과 오우삼 모두를 연상시키지만 사실상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만의 영화를 완성한 수차오핑의 재능은 바로 거기서 유래한다. <검우강호>는 지난 몇년간 만들어진 중국 무협영화 중 단연 담백하고 세련되며 속이 꽉 찬 영화다.
대만 출신의 황금콤비
초원 감독과 고룡 작가
이른바 ‘유미문예 무협영화’ 스타일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초원은 고룡 작가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할 때 가장 빛났다. 사실상 1975년경 무협영화는 다소 침체기였는데, 장철 영화의 각본가로도 활동했던 예광이 고룡의 무협소설을 각색하고 초원이 연출한 <유성호접검>이 나오면서 홍콩과 대만에서 크게 흥행함은 물론 영화계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1936년생으로 14살 때 홍콩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고룡은 대만을 대표하는 최고 무협 작가다. 이미 1971년 쇼브러더스가 그의 <소십일랑>을 영화화한 적 있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초원-고룡-쇼브러더스’로 이어지는 독자적인 세계는 <유성호접검>이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유가량과 함께 장철 영화의 액션지도로 유명했던 당가 무술감독이 이들 영화를 도맡아 했는데, 그는 유가량 특유의 힘이 넘치는 격투술과는 다른 시원하고 깔끔한 검술 액션을 선보였다. 다소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화려한 액션을 구사하는 정소동이 아니라 동위 무술감독이 <검우강호>에 참여한 것도 어느 정도 의도한 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