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소식]
광기의 전장에서 악마를 보았다
2010-10-13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으로 부산 찾은 올리버 스톤의 영화세계

1986년 <플래툰>으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쥐고, <닉슨>을 만든 1995년 즈음까지 10여년 간 올리버 스톤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논쟁적인 감독 가운데 하나였다. 블록버스터 열풍이 한창이던 할리우드에서, 올리버 스톤은 꿋꿋하게 ‘정치’영화를 만들었다. 아니 단순한 정치영화가 아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를, 올리버 스톤은 정면으로 파고들어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까지 종횡무진 누비며 도발적이고 열정적인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올리버 스톤이 그 영화들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는 <지옥의 묵시록>에서 프랜시스 코폴라가 보여주었던 ‘어둠’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구원받길 원했고. 예수처럼 두 팔을 벌리고 죽은 <플래툰>의 엘리아스 상사처럼.

어둠과의 대면을 위해 베트남으로 향하다

올리버 스톤은 1974년 <몰수>(Seizure)로 감독에 데뷔한 후 시나리오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남자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폭력적인 영화들에서 올리버 스톤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다. 앨런 파커의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1981), 존 밀리어스의 <코난>(1981),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1983), 마이클 치미노의 <이어 오브 드래곤>(1985). 폭력과 광기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살아남는 남자들의 이야기에 능한 작가가 바로 올리버 스톤이었다. 1981년에 연출한 <핸드>는 조용히 지나갔지만, 1986년에 만든 <살바도르> 그리고 <플래툰>이 결국 사고를 쳤다. 약 600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플래툰>은 ‘구원과 공포의 아이러니, 그리고 열정으로 가득 찬’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북미에서만 1억3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아카데미상까지 휩쓸면서, 올리버 스톤은 순식간에 할리우드 최고 감독의 하나로 부상했다.

이후 올리버 스톤은 <월 스트리트>(1987), <토크 라디오>(1988), <7월 4일생>(1989), <도어즈>, <JFK>(1991), <하늘과 땅>(1993>, <올리버 스톤의 킬러>(1994), <닉슨>(1995)를 만들며 열광과 비난의 소용돌이 속에 늘 있었다. 이 영화들은 거의 하나의 키워드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베트남전이다. 1946년생인 올리버 스톤은 예일대학을 중퇴하고 베트남에 갔다. 당시는 징병제였으니 누구나 가야했겠지만, 올리버 스톤은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세계를 떠돌아다닌 후에 자원했다. 몇 개월 동안 선원 생활을 하기도 하고, 베트남에서 영어 선생 일도 한 후에. 베트남이 어떤 곳인지 잘 알면서도, 올리버 스톤은 스스로 참전을 한 것이다. 올리버 스톤은 당시 미국과 유럽을 휩쓸었던 평화운동, 민권운동의 신봉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올리버 스톤은 자신의 어둠 그리고 세계의 광기를 만나기 위해 전장으로 향했다.

제임스 리어단의 평전 <올리버 스톤>의 추천사를 쓴 마이클 더글라스는 이렇게 말한다. ‘올리버는 할리우드를 감동시키려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돈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세상에 영향을 주려고 예술을 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올리버 스톤은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즉 그 자신의 악마를 정복하지 않으면, 광기를 이겨내지 않으면, 그리고 격발적인 성향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의 광기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마틴 스콜시지와의 만남

올리버 스톤은 1946년 9월 15일 뉴욕에서 주식중개인인 유대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군이었던 아버지가 파리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함께 미국으로 와서 결혼을 했다. 종전의 열광 속에서 사랑에 빠진 올리버 스톤의 부모는, 안타깝게도 전혀 다른 타입이었다. 아버지는 성공에 대해 강박적인, 소심하고도 철저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자유롭고 한편으로는 방탕한 성격이었다. 각각 이성과 감성이 절대적인, 전혀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올리버 스톤의 가정은, 사립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던 15세에 끝장났다. 그는 정신적 고아가 되었고, 동시에 모든 것을 돌파하겠다는 의지가 생겨났다. 올리버 스톤은 자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신을 갈망했다. 그래서 방황을 택하고, 60년대의 거대한 물결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뛰어들었다. ‘짐 모리슨’의 신봉자로서 기성 사회를 불신하고 조롱했지만, 대학생이나 히피들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상을 입고 제대한 올리버 스톤은 마약에 찌들어 있다가 뉴욕대학 영화과에 입학하여 마틴 스콜세지를 만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소설과 시나리오를 써 왔던 올리버 스톤은 영화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올리버 스톤은, 자신이 살아 온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인간을 미치게 하거나 신성하게 하는지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아군이건, 적군이건 가리지 않는다. 올리버 스톤은 자신의 시선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 해부하고 싶어 한다. 지극히 생생하게, 동시에 논리적인 분석을 통해서. 베트남 3부작이라고 부르는 <플래툰> <7월 4일생> <하늘과 땅>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플래툰>은 선과 악으로 대비되는 앨리어스와 반즈를 통해서, 결국은 그 모두가 우리의 얼굴임을 말한다. <7월 4일생>은 전장에서 살아남아 반전운동가가 된 상이용사의 이야기다. <하늘과 땅>은 베트남 여성의 입장에서 베트남전을 그렸지만, 역부족인 영화였다. 베트남 3부작은 베트남전이 대체 무엇인지, 우리를 어떻게 바꿨는지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도어즈>는 베트남전이 벌어졌던 시대의 록 밴드 도어스, 짐 모리슨의 이야기다. 그들이 무엇에 절망하고, 무엇에 반항했는지, 당대의 사회를 문화적으로 조명한다. <JFK>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이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존 F. 케네디의 암살에 대한 영화다. 올리버 스톤은 케네디의 일생을 조망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누가 그를 죽였고, 세상은 이후 어떻게 변했는가, 이다. 오스왈드가 죽이지 않았다는 음모론에 기초하여 군산복합체, 마피아, FBI 등의 암살 용의자들을 차례로 지목한다. 그리고 다시 케네디의 정적이었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오명의 대통령 닉슨을 조망하는 <닉슨>을 만든다. 마치 <플래툰>의 반스와 엘리아스 상사처럼, 시대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그린 것이다. 그들 모두가 결국은 우리의 ‘아버지’라면서.

아버지의 기억과 자본주의의 탐욕을 그린 <월 스트리트>, 미디어의 폭력성을 그린 <올리버 스톤의 킬러> 등은 올리버 스톤의 전형적인 영화였지만 이후 <애니 기븐 선데이>(1999), <알렉산더>(2004), <월드 트레이드 센터>(2006) <W>(2008) 등은 모호한 영화였다. 9.11이나 조지 부시 같은 21세기의 첨예한 이슈를 다룰 때, 올리버 스톤의 시선은 전혀 날카롭지 않았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코만단테>(2003)처럼 여전히 ‘60년대’를 조망한 영화도 만들었지만 도발적이지도 파괴적이지도 않았다. 치열한 광기마저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올리버 스톤은 철저히 60년대에 사로잡힌, 20세기에 머무른 거장이었던 게 아닐까.

타란티노의 시나리오를 망쳤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자신이 쓴 <올리버 스톤의 킬러>를 올리버 스톤이 망쳐놓았다고 비난했다. 올리버 스톤 역시 싸구려 동양영화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초기의 시나리오와 영화에는 폭력과 광기가 난무했다. 그렇다면 올리버 스톤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유희가 아닐까? 올리버 스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시대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이후의 세계를 다루기에는 힘이 부쳤고 타란티노처럼 유희정신으로 돌파할 수도 없었다. 올리버 스톤의 목적은, 광기와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따지고 들어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었으니까. 문제는 21세기의 세계를 파악하기에 올리버 스톤이 너무 늙었다는 것, 아니 낡았다는 것이다. 올리버 스톤의 시대는 지나갔다. 하지만 80년대 후반부터 10년간 만든 영화들은, 그 시절의 기운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수작들로 여전히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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