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1989, 수미다의 기억> First Love - 1989, Memory of Sumida
박정숙/ 한국/ 2010년/ 95분/ 와이드 앵글
시작은 우연히 손에 들어온 전화카드였다. 해묵은 카드에 인쇄된 사진 속에는 앳된 네 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카드의 주인은 말했다. “20년 전, 한국에서 온 그녀들은 감동 그 자체였어요.” <첫사랑>은 그렇게 ‘영화처럼’ 시작되었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녀들을 기억하는 이들의 표정에는 흥분과 설렘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스스로 빛나던 청춘이 또 다른 청춘들에게 눈부신 불꽃이 된 그 순간. <첫사랑>을 품고 감독은 그녀들을 찾아 나선다.
1989년 10월14일, 마산수출자유지역 내 한국수미다전기 노조에는 팩스 한장이 날아든다. 내용은 사업장 폐쇄와 450명 노동자 전원에 대한 해고통지였다. 팩스 한장으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일본 본사에 노조 대표를 파견한다. 이때 일본으로 원정투쟁을 떠난 사람들이 바로 전화카드 속 스무살 그녀들이다.
<첫사랑>은 40대가 된 그녀들의 오늘과 20년 전 기록 필름 사이를 오가며 시간과 기억을 일깨운다. 스무살의 외침은 날카로웠고, 그녀들의 열정은 사람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그녀들의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단호한 의지로 충만한 구호와 노래를 기꺼이 함께하며 연대는 깊어갔다. 그리고 그들의 깊은 공감은 세월을 거슬러 중년이 된 그녀들의 오늘로 되돌아온다.
한때 나를 살아 움직이게 했던 강렬하고 치열했던 정체불명의 덩어리를 무엇이라 규정하든, 그 시간을 쌓아올리고 오늘과 연결시켜 잠자던 기억을 깨우는 일은 말 그대로 고난도의 작업이다. 그것은 마치 잘 구워진 파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섬세한 결과 층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다큐멘터리 <첫사랑>이 시간과 기억을 어떻게 공들여 치대고 미세한 결을 만들어내는지, 이 파이의 성패를 확인할 수 있는 도구는 한입 크게 베어 물 준비가 된 당신의 오감이다. 바로 지금이 아득히 멀어진 기억의 문 앞으로 다가갈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