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음악의 본질을 영상으로 엮어낸 탈은폐의 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
2010-10-20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영화가 시작하면 텅 빈 하얀 벽, 그리고 하나의 신비처럼 바흐를 연주하는 피아노 자동기계가 등장한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음악적 현실과 우리의 현실을 누빈다. 우리 삶 속의 구두점 사이에 음악이, 바흐의 마그니피카트와 평균율이 놓여 있다. 때로는 실험적 화면이, 때로는 역사극 같은 재연 다큐멘터리가, 때로는 우리의 옆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번갈아가며 제시된다. 마치 현실이 없었더라면 바흐의 음악 역시 없었다는 듯, 영화는 일상적 현실과 음악적 현실을 대위적으로 나열하지만 그것에 어떠한 의미구조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은 제작자이자 시나리오작가, 연출자이자 배우로서 실험적인 스페인 영상 미학을 개척했던 거장 페레 포르타베야 감독의 연출작이다. 예술로서의 영화가 지닌 사회적 역능에 대한 그의 오랜 미학적 관점이 설득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나 있다. 밥 먹고, 사랑하고, 잠자듯 바흐의 음악은 현실의 가까이에 있다. 매우 일상적이기에 그것은 혁신적이고 참여적이다. 이것이 포르타베야 감독의 영상 미학적 실천이다. 스웨덴의 시인 라르스 구스타프손의 시 제목에서 영감을 받은 제목의 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은 일상 속에 있는 바로크 음악에 대해 시간과 공간을 오가며 열어 보인다. 실험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영화 형식은 바흐의 음악이 지닌 형식적 혁신성을 영상 미학을 통해 이끌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바흐의 일대기를 위인화하지 않으며 정념과 열정의 드라마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덤덤히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의 삶 속에 깃든 음악을 구조화하는데, 그 일상의 봉합이 때때로 꿈처럼 아름답다.

한편 영화는 바흐가 1723년에서 1750년까지 만년을 보낸 라이프치히 시절의 활동을 되짚는다. 이 시기 바흐는 성 토마스 성당에 봉직하면서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푸가곡, 음악의 헌정, 수난곡과 칸타타 등 500여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경건함과 기하학적 엄밀함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다는 듯 이 시기 바흐의 생활은 그의 음악에 밀착되어 있었다. 바흐의 음악은 멘델스존이 이용하던 푸줏간에서 고기를 싸던 악보가 발견되기까지 오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멘델스존이 발견한 붉은 핏물이 배어든 악보에는 <마태수난곡>이라는 놀라운 곡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우연히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가 발견되었다. 그렇게 바흐는 우리 시대에 홀연히 출현했다.

그리고 음악. 혹은 그리하여 다시, 음악. 식탁 위에, 시장통에, 나치수용소의 학살 현장에,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 경건과 세속 사이에 바흐가 있었다. 우아한 아리아나 소년 합창단의 청아한 노래 속에도,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트럭 안이나 덜컹대는 지하철 안에도 그 반복적인 흔들림 속에 바흐의 리듬은 암호처럼 깃들어 있다. 어쩌면 바흐는 우리 일상에 담긴 그 암호 같은 리듬의 형식을, 기하학처럼 엄밀한 그 질서의 신비를 계발한 것일지도 모른다.

음악영화는 많다. 음악을 위한 영화나 영화를 위한 음악도 많지만 영화와 음악의 엄밀한 형식적 탐구를 집요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드물다. <바흐 이전의 침묵>은 음악의 형식을 빌려 바흐 음악의 본질을 영상으로 엮어낸 탈은폐의 영화다. 푸가와 푸줏간만큼이나 클래식은 일상의 남루함과는 멀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히 책장에 나란히 꽂힌 책들의 질서에서, 별들의 운행에서, 곤히 지쳐 잠든 지하철 열차의 반복적 흔들림 속에서, 구름의 무질서한 움직임 속에서 어떠한 인상을 발견했다면 그곳에 음악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곳에 리듬이 생기고 선율이 얹히면 은총과 경건과 세속의 신비가 깃들게 됨을.

피아노 자동기계가 꾸는 바흐에 대한 일장춘몽인 양 영화는 시적이고 실험적인 영상과 일상적인 현장을 뒤섞어 꿈같은 형식을 구조화했다. 푸가와 칸타타, 클라비어와 비올라처럼 바로 여기 우리의 옆에 고독과 열정이, 샴푸와 트럭이 있다. 그것들을 꿰어서 리듬을 얹고 선율을 부과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바흐다. 암전과 침묵 사이에 영상과 음악을 배치하면서 영화는 전위주의와 고전주의를, 시와 기하학의 질서를 뒤섞어 참으로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은 연주실에 갇힌 바흐의 음악을, 여기에, 그렇게 바로 우리의 옆에 갖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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