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과 데릴라> Samson & Delilah(블루레이)
2009년 감독 워윅 손튼 상영시간 101분
화면포맷 1.78:1 아나모픽 음성포맷 PCM 스테레오 2.0, DTS-HD 5.1
자막 왈피리어&영어, 영어 자막(왈피리어 부분), 트리니티필름(영국)
화질 ★★★★ 음질 ★★★★☆ 부록 ★★★★
오늘 온 <필름 소셜리즘>의 DVD엔 ‘나바호어’ 자막이 지원된다고 적혀 있는데, 정작 나오는 건 영어자막이다. 세상을 자기 땅으로 아는 건방진 미국인에게 예전부터 시비를 걸어온 장 뤽 고다르의 새 유머일까?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거다. 모두가 주류에 매진할 때, 그는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원주민의 현재를 들먹인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은 <삼손과 데릴라>는 호주 원주민 출신 감독이 원주인 소년,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관심 밖으로 밀려난 호주영화를 영화계의 중심으로 복귀시킨 감독이 원주민이란 점이 의미깊다. 호주 원주민에 포커스를 맞춘 <토끼 울타리>나 <워커바웃> 같은 작품이 없지 않았으나, 이처럼 원주민의 잔혹한 현실을 간파한 작품은 그간 드물었다. 손튼은 일찍이 공교육에서 벗어나 음악이 좋아 DJ 수업을 쌓았고 영화가 좋아 영화를 배운 사람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에 확신이 서기까지 기다렸다는 그가 데뷔작의 소재로 선택한 건 당연히 오랫동안 봐오고 고민한 대상이었다.
중앙 오스트레일리아 사막지대의 외딴 마을. 삼손은 형과 친구들의 연주 소리에 깬다. 햇살은 화사하고 바람은 상쾌하지만, 먹을 게 없고 할 일도 없는 현실은 고달프다. 일어나자마자 휘발유 캔에 머리를 박는 건 그래서다. 그 기운으로 소년은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땅바닥에서 자던 이웃 소녀 데릴라도 눈부신 햇살에 일어난다. 아픈 할머니에게 약을 주고 아침을 준비하는 소녀의 하루도 유쾌해 보이진 않는다. 민화 그리기가 소녀와 할머니의 주 일거리로서, 매점을 운영하는 백인 남자가 그 그림을 시내에 내다 판 뒤 생필품으로 교환해준다. 어느 날 할머니가 노환으로 죽자, 풍습대로 마을 아낙들이 소녀를 몽둥이질하고, 소년도 형에게 시비를 걸다 귀퉁배기만 두들겨 맞는다. 피 묻은 얼굴로 마을을 떠나 먼 도시 ‘앨리스 스프링스’에 도착한 두 아이는 더욱 가혹한 시련에 직면한다.
원주민 마을은 모든 사람이 밑바닥 인생을 사는 저주받은 땅이다. 산업화의 변경에서 기본권마저 박탈당한 사람들은 개미가 발에 기어오르고 파리가 얼굴에 붙어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에겐 미래와 희망이 없다. 도시 또한 원주민에겐 사막의 오아시스가 될 수 없다. 현대도시란, 교환가치가 없는 노동력의 보유자가 생존 불가능한 곳이다. 소녀는 할머니와 그린 그림이 거액에 거래되는 화랑을 발견하는데, 소녀가 새로 그린 그림은 흥미를 사지 못한다. 휘발유 향(서구 산업화의 위대한 향기)에 탐닉하며 지옥의 계절을 보내는 두 아이는 미쳐가지만, 영화는 희망과 구원을 포기하지 않는다.
손튼의 주장은 명확하다. 그는 원주민 사회가 책임을 자각하길, 백인사회가 원주민에 대한 무관심과 부당 대우를 반성하길 원한다. 반면 영화의 참매력은 두 아이가 찾은 삶의 태도에 있다. 극중 삼손이 괴력의 사나이가 아니듯, 데릴라도 악녀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언어장애가 있는 소년과 몸짓으로 이야기하는 소녀는 오직 순수한 사랑으로 버티기로 한다. 두 아이는 신화의 욕망조차 사라진 한적한 사막으로 들어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 삶을 시도한다(이건 어쩌면 왕빙의 <이름 없는 남자>에서 한 남자가 가꾸는 기이한 삶의 방식과 뜻을 함께한다). <삼손과 데릴라>는 끔찍한 현실에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나와 너뿐이라는 믿음을 재확인하는 작품이다.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이 진심을 뒤집어써 아름다움을 발한다.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 러브스토리는 드물다. 이렇게 도전적이고 긍지에 찬 러브스토리는 더욱 드물다. <삼손과 데릴라>의 영국판 블루레이는 단편영화, 인터뷰, 메이킹필름 등 풍부한 부록을 제공하지만 지역코드의 문제인지 필자의 플레이어에선 부록이 재생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