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안현진의 미드앤더시티] 소설쓰기보다 탐정 되기가 더 쉬웠어요
2010-11-05
글 : 안현진 (LA 통신원)
소심하고 유약한 브루클린의 현대판 돈키호테가 여기있네, <보어 투 데스>

서른이 넘어 유학생으로 살다 보면 눈치가 늘어서 통밥으로 때려 맞히기에는 도사가 된다. 못알아듣는 말이 나오면 우선 대충 들리는 대로 노트 한 귀퉁이에 한글로 적어놓았다가 집에 돌아와 그럴듯한 철자를 조합해 단어를 만들어보는데, 솔직히 그때는 이미 맥락을 놓친 뒤라 별 소용도 없다. 슬프게도 추측이 어려운 영어단어는 왕왕 나타난다. 그래서 옆에 있는 현지인에게 재빨리 물어보는 요령도 터득했다. 그런데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moonlight'인데, 동사로 활용될 때는 '달빛'이 아니라 '부업', '야간 아르바이트'를 의미한다고. 이토록 낭만적인데다가 귀여운 뉘앙스를 가진 단어라니,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구제불능의 귀여운 어른 소년들

최근 미국 TV시리즈 가을 개편과 함께 시즌2를 시작한 <HBO>의 <보어 투 데스>(Bored to Death) 역시 부업으로 사설탐정을 시작한 젊은 작가에 대한 코미디다. 직역하면 '심심해 죽겠다' 혹은 '죽도록 지루해' 정도의 타이틀을 가진 이 드라마는, 두 번째 소설을 쓰다 꽉 막혀버린 조너선 에임스(제이슨 슈워츠먼)가 여자친구 수잔(올리비아 설비)과 동거를 끝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정확하게는 "마리화나와 술에 늘 취해 있는" 조너선이 수잔에게 차였다. 수잔이 떠나 쓸쓸한 로프트를 둘러보던 조너선은 우연히 먼지쌓인 문고판 소설책을 발견한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쓴 추리소설, 필립 말로우 시리즈의 대표작인 <안녕, 내 사랑>이다. 그걸 계기로 조너선은 '사고'를 친다. 그는 크레이그리스트(Craigslist:룸메이트를 구하거나 중고물품을 사고파는 온라인 커뮤니티, 섹션별로 광고를 올릴 수 있다)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올린다. "사설탐정을 고용하세요. 특기는 실종 및 가정사. 자격증은 없지만 당신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가격도 저렴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조너선의 부업은 쏠쏠한 반응을 얻으며 시작된다. 하지만 알맹이보다 쭉정이가 많은 인터넷의 속성 때문인지 그에게 들어오는 의뢰는 시시껄렁하다. 남자친구의 외도가 의심돼 미행을 부탁하거나, 힘센 상급생에게 스케이트보드를 빼앗겼으니 되찾아 달라는 등 어딘지 구리면서도 별것 아닌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실연 때문에 고통스럽고, 소설은 쓰기싫었던 조너선은 마치 탐정이 천직인 양 성심껏 사건을 수사한다.

조너선의 '탐정놀이'에는 레이(자크 갈리피아나키스)와 조지(테드 댄슨)라는 두명의 조력자가 있다. 드라마의 중심에는 조너선이 있지만, 만화가인 레이와 조너선에게 정기적으로 일을 주고 마리화나도 나눠서 피우는 잡지사 편집장인 조지로 구성된 삼총사가 짐을 나눠진 모양새다. 세 사람의 뇌 구조도를 그린다면 조너선은 와인이, 조지는 마리화나가, 레이는 섹스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외모도 생각도 다른 세 사람은 하나의 종착역으로 수렴된다.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본능에 충실한 남자라는 것. 게다가 히어로 신드롬까지 있어서,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면 친구가 그리는 만화 속에서라도, 그것도 아니면 마리화나의 힘을 빌려서라도 영웅을 꿈꾼다. 탐정 일을 당장 그만두라는 레이의 성화에 조너선은 답한다. "마치 유체이탈 같았어. 완전히 다른 내가 된 것 같았다고. 탐정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뭘 해야 하는지도 다 알아. 정말 영웅처럼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그러자 레이의 일침이 이어진다. "너도 제정신으로 사는 거 아니면서 그러고 다니는 거 아니야."

<보어 투 데스>의 세 주인공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돈키호테'가 될 것 같다. 미약한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고, 각자의 둘시네아를 마음속에 품고 있기 때뭉니다. 조너선은 수잔을 잊지 못하고, 레이는 여자친구 라이와의 섹스 빈도수로 애정의 정도를 헤아리며, 비아그라의 도움 없이는 절정도 없는 60대 조지 역시 전처인 프리실라를 잊지 못해 광대짓을 벌인다. 본능에 충실한 남자들이 모였으니 에피소드마다 우스광스러운 성풍속도가 그려진다. 조지는 잡지구독률을 높인다는 명목아래 동성애 체험을 권유받고, 레이의 정자기증은 불법 정자판매로 돌변하고, 어쩔 수 없이 승낙한 스리섬에서 경쟁자의 사이즈에 충격받은 조너선이 레이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내 거 정말 작아?"라고 확인받는 등 해프닝이 벌어진다(레이도 보담으로 자신의 바지를 내린다).

삼총사는 그렇게 소심하고 유약하다. 남자를 꿈꾸지만 소년인 채로 지내는 것이 더 편한 사람들이다. 말다툼 끝에 주눅이 든 레이를 안아주는 리아에게서 모성(母性)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수잔이 조너선을 떠난 이유가 무책임함 때문이고, 조지가 지속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는 까닭은 여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솔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세 남자 모두 구제불능 같지만 사실 낭만적이고 귀여운 구석이 더 많다.

뉴욕 하면 맨해튼보다 브루클린!

<보어 투 데스>는 '브루클린의 조너선'으로 알려진 작가 조너선 에임스가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졌는데, 소설 외에도 대중에게 알려진 에임스의 삶을 소재로 가져온 것으로 유명하다. 에임스와 이름을 공유하는 드라마 속의 조너선이 비교당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는 예상된 결과이고, 픽션에서 논픽션의 증거를 찾는것도 이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다. 복싱을 좋아해 공개적으로 링에 오른 경험이 있고, 도서행사에서 엉덩이를 맞는 SM퍼포먼스를 한 것도, <보어 투 데스> 속 유사한 에피소드와 어우러져 재미를 더한다. 하지만 실제로 브루클린에서 자란 에임스와 할리우드에서 자란 제이슨 슈워츠먼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드라마 속 조너선이 30살이고 두 번째 소설을 집필 중이지만, 현실의 에임스는 43살이고 여러편의 소설을 발표했다는 점도 다른 점.

2009년에 <보어 투 데스>를 소개한 <씨네21>기사(725호)를 보면, "브루클린에 바치는 연가"라고 썼다. 브루클린은 2000년대 후반부터 맨해튼을 대신하는 뉴욕의 명소로 자리잡기 시작했는데, 기막힌 타이밍으로 <보어 투 데스>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드라마가 된 셈이다. <섹스 & 시티>의 사라 제시카 파커가 "맨해튼은 더이상 예전 같지 않지만 뉴욕의 다른 행정구들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퀸즈나 브루클린이 그곳만의 TV쇼를 갖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한 발언은 예언이 되다시피 했다. <뉴욕 매거진>은 이미 2006년에 뉴욕의 인기 거주지가 돌고 도는 것에 대해서 재미있는 기사를 내놓았다. 맨해튼에서 소호, 트라이베카, 윌리엄스버그 등으로 이어진 이른바 '힙하고 핫한' 지역의 유행에 대한 기사인데, 결국 어디에 살아도 뉴요커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지만 이런 트렌드 탓에 렌트비만 치솟았다는 냉소도 잊지 않았다.

뉴욕을 처음 찾은 여행객이라면 명소가 즐비한 맨해튼을 즐기고 싶겠지만, 브라이튼 비치에 가보지 못한 뉴요커도 태반이라고 하니, 쇠락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까지 풍기는 유원지 코니아일랜드도 볼 겸 브루클린을 다녀오는 것을 추천한다. 지하철이 24시간 운행하는 1일생활권이라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뉴욕에는 겨우 일주일 있었지만, 고층건물로 스카이라인을 채운 도시보다 벤치마다 앉아 있는 러시아 이민자들에게서 들리는 뜻 모를 언어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해변을 걷는 것이 메트로폴리스의 다른 얼굴을 보는 양 흥미로웠던 기억이 있다. <보어 투 데스>로케이션에는 그런 낭만이 있다. 마치 홍대 주차장 거리가 지금처럼 변하기 전에 보물찾기하듯이 멋진 카페를 발견했던 흥분, 친구와 함께 이 소중한 장소를 나누고픈 마음 말이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주 앉아 화이트와인을 나누며 싱거운 수다를 떨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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