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지나는 길이라고 해서 늘 경치가 똑같은 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것일까.’
오시이 마모루의 <스카이 크롤러>(2008)는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진 시대의 이야기다. 전쟁은 계약을 맺은 전투기업에 맡겨지고, 사람들은 게임 중계를 보듯 TV를 통해 전황을 지켜본다. 그들에게 전쟁의 공포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현실감을 얻고, 죽어가는 이들을 동정하거나 지켜볼 뿐이다. 실제로 전투를 담당하는 이들은 킬드레라 불리는, 아이에서 성장이 멈추어버린 존재들이다. 전장에서 죽지 않는다면 영원히 살아가야 하는, 그러면서도 어른이 되지 않는 가련한 존재. 모리 히로시의 6부작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카이 크롤러>는 그 킬드레의 비애와 의지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1995년의 <공각기동대>에서 2004년의 <이노센스>에 이르기까지, 오시이 마모루의 관심은 실재를 인지할 수 없는 현실, 현실을 압도하는 가상의 세계였다. 몸과 기억으로 성립되는 인간의 존재를 회의하고, 기계와 영혼(고스트)의 확장을 통해 초월적 인간을 상상한 것이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의 세계라고 한다면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입식사열전>은 뒤집어버리고 싶었던 일본 현대사, 소화사(昭和史)의 재해석이었다. 오시이 마모루는 언제나 현실, 사실 위에서 픽션을 만들어내고, 그림과 실사의 이미지를 뒤섞는다. ‘애니메이션이냐 실사영화냐를 떠나서 영화의 본질, 무엇이 이 영화를 영화답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처럼 오시이 마모루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대상에 따라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넘나든다.
도입부 압도적인 공중전은 전쟁의 리얼리티
<스카이 크롤러>가 시작되면 눈을 의심할 만큼 압도적인 공중전이 전개된다. 이전에 공중전을 다룬 모든 (실사)영화를 뛰어넘고 싶었다는 오시이 마모루의 야심은 성공했다. 오타쿠에 대한 편견의 하나는, 그들이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대상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아니다. 그들은 가상 이상으로 ‘사실’에 집착한다. 가이낙스가 <왕립우주군>의 로켓 발사 장면을 그리기 위해 직접 NASA를 방문했던 것처럼, <스카이 크롤러>에서 프로펠러 전투기의 우아하고 섬세한 공중전 장면은 철저한 사실성을 추구한다. 바다 위를 낮게 스칠 때 이는 물결과 튀어오르는 물방울 하나까지도 세밀하게 그려낸다. 비행기 너머로 펼쳐지는 끝없는 구름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실성 자체가 아니다. 오시이 마모루가 압도적인 하이퍼 리얼리티를 통해서 말하는 것은, 그 사실로 인해 규정되는 인간의 조건이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에서 도시의 쇠락한 풍경을 극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은, 도시의 난개발이 가져오는 인간의 소외와 과거의 소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카이 크롤러>의 공중전이 그토록 사실적인 것은, 전쟁의 리얼리티를 말하기 위해서다. 그 리얼리티를 통해서,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 그리고 킬드레가 무엇을 생각하고 변해가는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스 기지에 칸나미 유이치가 배속되어온다. 이곳의 파일럿은, 보스인 쿠사나기 도키노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명. 쿠사나기에게는 킬드레면서도 아이를 낳았다거나, 칸나미의 전임자인 진로를 사살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전투가 격화되면서 동료들이 하나둘 죽어가고, 기체에 검은 표범을 그려넣은 최강의 적 티처가 나타난다. 그는 킬드레가 아니라 어른 남자였고, 한때 쿠사나기의 상사였다고 한다. <스카이 크롤러>는 적요하게 흘러가면서도 끊임없이 충격적인 비밀들을 툭툭 던져넣는다. 킬드레가 무엇인지, 칸나미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그들이 계속 싸울 수밖에 없는지 등등을.
완벽한 평화의 시대에 전쟁이 왜 필요한 것일까? 쿠사나기(<공각기동대>의 주인공과 성이 동일한)는,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이 사라진 적은 없다고 말한다. ‘지금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싸우고, 죽어간다는 현실감이 있어야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전쟁이 없다면 평화의 의미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2>의 문제제기와 비슷하다. 평화를 누리며, 전쟁이라는 실감에서 멀어진 일본인들. 오시이 마모루는 ‘일본은 전쟁도 없고 언제나 평안하다고 교육받았지만, 그것은 거짓’이라고 말했다. 전쟁은 저기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곳에 언제나 내재되어 있고 은밀하고도 치열하게 지속되고 있다. 다만 총과 폭탄을 쓰지 않을 뿐. 칸나미가 배속된 기지 비행장의 지나칠 정도의 고요와 평화처럼.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들 ‘킬드레’의 모순성
이 세계에서 전쟁을 하는 것은 킬드레다. 폭격기가 하늘을 날아가도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어가는 킬드레를 보고 불쌍하다고 말하거나, 전장에 나가는 칸나미에게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 순간 쿠사나기는, 칸나미는 반항한다. 우리는 불쌍하지 않다고,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이냐고. 킬드레는 회사가 계약을 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싸우지 않는다. 사람들이 킬드레에게 갖는 연민은, 어쩌면 애완동물에게 갖는 애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일종의 스포츠 경기다. 전투 기업을 후원하고 파일럿인 킬드레를 선망하지만 결코 그들이 링 위에 오르지는 않는다. 안전하게, 전황을 지켜보면서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죽어간다는 거짓 위안과 안도감을 누린다. 사실은 텅 비어 있으면서도.
정확하게 말하면, 킬드레는 만들어진 병기로서의 인간이다. 우연히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지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킬드레는 전장으로 내몰렸다. 하늘에서가 아니면 죽을 수 없는 킬드레는, 말 그대로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느낌’의 존재다. 그들은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이 있다 해도, 그것이 정말 자신이 경험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킬드레의 정체성은, 하늘에서 싸울 때 이외에는 모호하다. 진로를 알고 있던 여인은, 칸나미에게 말해준다. 진로는 ‘마음을 어딘가, 하늘에 두고 다니는 것 같았다’라고. 킬드레는 모순적인 존재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인간이 어른이 될 필요가 있을까’와 ‘누군가가 죽여주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이대로야’라는 상태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인지 어느 한 순간, 쿠사나기의 모습은 영혼을 얻은 인형 혹은 육체를 잃어버린 영혼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노센스>의 인형, 인간을 초월한 인형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있다. <스카이 크롤러>에서 전장에 나가는 이들은, 영원한 아이 킬드레다. 사실적인 로봇 또는 모빌 슈트가 등장했던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서 중요한 주제 하나는 전쟁이라는 상황에 던져진 아이들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파일럿 역시 14살 아이들이다. 어른들의 사회에서, 어째서 아이들이 가장 격렬하게, 때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가. 가장 쉬운 답은, 애니메이션의 주요 타깃이 청소년이라는 점이다.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등신대의 주인공이, 싸우고 사랑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에 수월하게 빠져들기 때문에. 하지만 대단히 심각하고, 사실적인 성인 타깃의 작품도 그런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는 어떨까? 가상의 전쟁이라는 것이 기성사회의 균열 혹은 투쟁이고, 이 세계를 부수거나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젊은 세대여야 한다면. <기동전사 건담>의 아이들은,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친구를 죽이거나 죽어가면서, 어른들의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깨닫는다. 전쟁이라는 극단을 통해서, 가장 고통스럽고 뼈저리게 세상의 법칙을 배우는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어른들은 거의 반강제로 신지를 에바에 탑승시킨다. TV판에서는 결국 도망치거나 자신 속에 숨어버리기도 했지만, 리빌드한 극장판에서 그들은 능동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인다. <스카이 크롤러>의 킬드레는 회사가 시키는 대로 싸우지만, 의문을 가지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싸워야 하는가, 라고.
쿠사나기, 최강의 적인 티처가 게임의 규칙이라고 말한다.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챔피언 그리고 시스템. 오시이 마모루는 티처가 어른 남자, 기성세대라고 말한다. 그는 적이며 스승이며 감시자며 지배자다. 아이들은 어른을 이길 수 없다. 아이인 채로는 결코. 그래서 킬드레는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반복한다. 세상의 아이들은 영원히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 아이의 기억을 잃어버리거나 내팽개치고, 새로운 아이들을 탓하거나 매질하면서 시스템에 복종할 어른으로 만들어낸다. 거역한다면? 하늘처럼 텅 빈 어느 곳에서 죽거나 ‘바깥’으로 추방된다. 쿠사나기가 진로를 쏜 것은 그런 이유였다. 예정된 결말, 반복되는 과정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죽거나 죽여주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오시이 마모루가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희망 메시지
너무 가혹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시이 마모루는 <스카이 크롤러>가 자신이 만든 작품 중에서 ‘젊은 세대에 가장 다정한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죽거나 죽이려는 쿠사나기에게, 칸나미는 말한다. ‘살아라. 무엇인가를 변화시킬 때까지’라고. 그리고 마지막 전투에 나서 이렇게 말한다. ‘항상 지나는 길이라고 해서 늘 경치가 똑같은 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것일까. 아니 그것뿐이니까 안되는 것일까’라고. 답은 이미 나왔다. ‘살아라’다. 그건 <모노노케 히메>의 해답과도 비슷하다. 이 세상은 모순적이고 뒤틀려 있지만, 그래도 살아라. 오시이 마모루는 <공각기동대> 이후 조금씩 지쳐갔다고 한다. ‘그 누구도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없는 세계’를 만들면서 마모되어갔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이노센스>를 만든 뒤, 생사관을 이야기하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스즈키 세이준의 <츠고이네르 바이젠>, 기타노 다케시의 <소나티네> 같은 영화들.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그 영화로 미야자키는 부활했다. 다시 생동감, 생기가 넘쳐흐른 것이다.’ 지독하게 현실을 파고들어 의미를 찾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희망을 보여주는 것. 그렇게 젊은 세대에 손을 내밀고 이끌어주는 것. 원래는 남자로 설정되어 있던 비행기 정비사 사사쿠라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파일럿들이 ‘마마’라 부르는 것에서도 오시이의 선의를 엿볼 수 있다. 게다가 사사쿠라가 키우는 개는, 바로 오시이 마모루의 개다.
<스카이 크롤러>가 일본에서 개봉할 즈음에, 오시이 마모루는 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이 흥행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다시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겠다고 반농담식으로 말했다. 물론 비평에서는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흥행에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사실 <스카이 크롤러>가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스토리는 전작들보다 명확하고 공중전의 스펙터클도 대단하지만, 고요함 속에서 세밀하게 전개되는 관계와 심리의 미묘한 리듬은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다. 하지만 일단 그 리듬에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한다면 <스카이 크롤러>는 순식간에 당신을 하늘 속으로 인도할 것이다. 왜 오시이 마모루가 <스카이 크롤러>가 대중적이고 쉬운 작품이라고 말했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스카이 크롤러>는 느리지만 명확하게, 변하는 게 없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강하게 들려준다. 당신이 살아간다면 세상은 변할 것이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