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산 배우 헬렌 미렌에게서 여왕의 위엄을 목도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엘리자베스 1세>(2005)에서 대영제국의 영원한 자긍심 엘리자베스 1세를, <더 퀸>(2006)에서 현존하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모두 연기해서가 아니다. 여왕이든 평민(<고스포드 파크>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이든 신분을 막론하고 그는 항상 꼿꼿한 자세와 또박또박한 발음,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물러섬이 없는 강인한 눈빛을 보여주었다. <레드>에서 헬렌 미렌이 연기한 빅토리아(이름도 무려 빅토리아다!) 역시 손에 총만 쥐어져 있을 뿐 태도는 여왕의 그것과 다름없다. 빅토리아는 “빵 굽고 꽃꽂이하다가 가끔 지루하면 프리랜서 킬러로 뛰는” 은퇴한 암살계의 대모다. 프랭크(브루스 윌리스)의 여자친구에게 “그 친구 아프게 하면 내 손에 죽는 줄 알아”라는 독설을 날리는가 하면, 한때 “사랑했던 스파이의 가슴에 총알 세개를 박아주는” 로맨틱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헬렌 미렌과 권총의 만남은 생소하다고? 천만의 말씀, TV영화 <프라임 서스펙트>(1991)에서 그가 맡은 강력계 여형사는 그 어떤 남성보다 마초적이었다.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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