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불안에 시달리는 자들을 위한 작은 연못이다. 그것 자체로는 지친 이들의 좋은 쉼터일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연못에 공적인 일, 이른바 사회적 절차와 규칙이 필요한 일이 섞여 들어오기 시작하면 이 작은 쉼터는 고약한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다.
<돌이킬 수 없는>은 아동실종사건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쉽게 진실로부터 눈돌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조용한 교외의 한 마을, 충식은 7살 난 딸 미진을 끔찍이 아끼며 작은 화원을 운영한다. 어느 날 미진이 갑자기 실종되고 충식은 생업마저 내팽개친 채 딸을 찾아 나선다. 그 와중에 딸의 실종 얼마 전 아동성범죄 전과가 있는 세진이 이사를 온 것을 알게 된 충식은 그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심적으로 유력한 용의자가 된 세진은 가족과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그럴수록 세진을 향한 충식의 의심은 깊어진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바람과 달리 세진이 무죄방면되면서 갈 곳 잃은 그의 슬픔은 돌이킬 수 없는 곳을 향해 치달아간다.
사실 아동실종이 일어난 마을에 아동성범죄 전과자가 들어오는 것만으로 수사는 이미 결정나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를 가진 부모들의 불안은 아동성범죄자라는 움푹 팬 낙인의 구덩이 안에 고이고, 악의로 가득 찬 믿음의 연못은 이내 썩어들어간다. 답을 정해놓고 원인을 찾아가는 것이 위험한 까닭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기 때문이다. 정보의 취사선택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편견과 배척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요즘 유행하는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는 것”이라는 말이 연상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영역이 아니라 좋고 싫음에 관한 감정의 영역이며 최근 우리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죄의식일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은 이러한 사회적 편견이 낳는 폭력의 황폐함을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에서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헐거운 만듦새를 덮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다. 지나치게 메시지 전달에 집중한 탓인지 장르적 활력은 어느새 휘발되고, 주연을 비롯한 대표적인 충무로의 연기파 조연들의 나쁘지 않은 연기마저 어딘지 겉도는 인상을 남긴다. 주제와 상황의 포착이 흥미로운 만큼 거친 만듦새를 동력으로 전환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