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역사상 최고요원인 프랭크(브루스 윌리스)의 꿈은 소박하다. 그는 매달 연금을 타면서 든든한 노후를 보내고 싶고, 매일 전화로만 대화를 나누는 사라(메리 루이스 파커)와의 진지한 관계를 꿈꾼다. 어느 날 갑자기 무장조직이 그의 집을 습격하기 전까지 프랭크의 바람은 실현 가능한 듯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자가 누구인지 조사하는 과정에서 프랭크는 CIA가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옛 동료인 지략가 ‘조’(모건 프리먼), 폭탄전문가 ‘마빈’(존 말코비치), 암살계의 대모 ‘빅토리아’(헬렌 미렌)를 차례로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레드>는 2003년 세 권으로 출간된 DC코믹스의 동명만화가 원작이다. 워렌 엘리스가 글을 쓰고 컬리 해머가 그림을 그린, 표지부터 내지까지 배경이 전부 빨간색인 만화책이다. “최대한 원작에 충실하려고 했다”는 제작자 로렌조 디 보나벤츄라의 말처럼, 영화는 서사구조, 등장인물 등 원작의 주요 골격을 그대로 옮겨왔다. 과장스럽다 싶을 정도로 화끈하게 총알 세례를 주고받는 총격신 또한 영화 속에 재현된다(총격신의 사운드는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퀄리티가 뛰어나다!).
원작과의 차이는 브루스 윌리스,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 등 관록 넘치는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따뜻한 유머를 던진다는 점이다. 덕분에(?) 원작에서 묘사하는 인물들에 비해 평균나이는 훨씬 높아졌고, 이야기의 긴장감은 다소 떨어졌다. 대신 냉혹한 원작에는 없는 온기가 영화에는 가득하다. 브루스 윌리스가 총을 쏘고 액션을 소화하는 장면은 <다이하드> 시리즈의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의 모습이 겹쳐지고, 네 명의 노장이 파티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장면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파티신을 연상하게 한다. 무엇보다 “나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모건 프리먼) “가슴팍에 총알 세개 확 박아줬지!”(헬렌 미렌) 등과 같은 배우들의 자기 반영적인 대사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짠하다. 그게 감독이 의도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가 노장들의 낭만적인 의리를 강조한 것은 분명해보인다. 이후, 노장들로 뭉친 전직 CIA는 현직 CIA의 음모를 파헤치고, 이들의 추격을 따돌린다. 다소 전형적인 액션 영화의 결말이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제법 재미있고, 귀여워 눈 감아줄만 하다.
아쉬운 점도 있다. 비행기 납치사건을 다룬 로베르트 슈벤트케 감독의 전작 <플라이트 플랜>처럼 영화의 초반부가 좀더 빠르게 전개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옛 동료들이 의기투합하기까지가 다소 길어 지루한 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