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그 애달픈 비관
2010-11-11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스카이 크롤러> 속, 오시이 마모루의 미래와 노스탤지어가 맞닿는 심상
<스카이 크롤러>

눈이 크고 목이 짧으며 왜소한 체형을 지닌 인물들의 인상은 마치 아이와 같다. 그 눈짐작은 틀리지 않을 것인데,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은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하는 아이들인 ‘키르도레’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칸나미가 도착한 비행 부대 부근은 대단히 고요하고 평화로워서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부대의 파일럿들은 휴게실에서 신문을 읽거나 맥주를 마시고 때로는 드라이브 인 식당에 가서 미트파이를 먹는다. 하지만 경고음이 울려 적기의 침입을 알리면 복고풍의 전투기를 타고 나가 공중전을 치른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전투장면을 게임 보듯 즐기며 전쟁을 판타지로 경험한다.

<스카이 크롤러>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오시이 마모루가 <이노센스> 이후 4년 만에 완성한 SF애니메이션이다. 롱테이크와 우아한 리듬의 촬영, 실감나는 전투장면의 재현은 일본 애니메이션 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 작품이 일본 젊은 세대에 ‘희망의 전언’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김봉석이 언급한 바 있다(<씨네21> 776호). <공각기동대>(1995) 이후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은 미래를 신생의 이미지가 아닌 몰락의 이미지에 몰아넣는 재현의 관습을 보여줘왔다. 그의 SF물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은 묘한 노스탤지어와 맞닿아 있다. 도래할 신생의 어떤 것, 그 미지에 대한 기대감이라기보다는 이미 상실한 무언가에 대한 나른한 조우. 이 우아한 상실의 시선은 아마도 자신이 억압하고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 텐데, 이 글은 이 시선의 행방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평화의 나른한 권태와 가짜 전쟁의 재현

<스카이 크롤러>는 근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 SF애니메이션이다. 전쟁이 종식되었지만, 평화의 나른한 권태에 빠진 사람들은 군수회사를 동원하여 ‘가짜 전쟁 쇼’를 만들어낸다. 록스톡과 라우테른이라는 군수회사는 ‘키르도레’(Kildren)라는 미스터리한 아이들을 전투기에 태워 전쟁을 수행한다. 중요한 점은 어느 한편이 이겨서 전쟁이 끝나지 않도록 게임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의 룰은 다음과 같다. 키르도레가 동원된 전쟁에 ‘티처’라는 어른 남성이 등장한다. 흑표범이 새겨진 전투기를 모는 이 성인 남자는 모든 상대를 이기는 게임의 변수다. 그래서 라우테른사가 불리할 때는 그 회사의 일원이 되고, 록스타사가 불리할 때는 이 회사의 일원이 된다.

키르도레는 일종의 상수다. 신비롭게도 이들은 죽어도 되돌아와 다시 전투기에 오른다. 눈치챘겠지만 이 ‘전쟁쇼’는 악무한(惡無限), 즉 종결없는 반복지옥을 이미지화하고 있다. 게임의 룰을 벗어날 도리는 없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적이 있고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되돌아오는 아이들이 있으며 이들은 절대 어른이 되지 않는다. 영화는 키르도레가 품게 되는 질문,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기시감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느슨한 미스터리를 만들어가며 전쟁과 폭력에 대한 외면화된 주제 이면에 정체성과 윤리에 대한 민감한 문제를 배치하고 있다.

일본인에게 혹은 오시이 마모루에게 2차 세계대전은 하나의 최종 전쟁이었으며, 원자폭탄 투하 이후 세계가 균질한 시간대에 접어들었다는 판단은 전쟁에 대한 묘한 반감과 더불어 향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지식인의 이른바 ‘근대의 초극’ 좌담에서 전쟁이란 하나의 자연사적 현상이며 역사가 지속되는 한 끝나지 않으리라는 입장을 내세운 바 있다. 일본에 있어서 2차대전 이후의 세계는 외부의 전쟁을 관조하며 스스로의 전쟁 욕망을 다스리는 시기였기 때문일까? 패전 이후 폭력이란 내재화되고 미학화되어 전쟁이 불가능한 일본사회의 심리적 대안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실제 전쟁이 아니라 이미지로 폭력을 향유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런 입장은 극중에서 쿠사나기를 통해 직설적으로 제시된다. “전쟁은 어떤 시대라도 완전히 없어진 적이 없어. 그건 인간에게 그 현실미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야. 같은 시대에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가 싸우고 있다는 현실감. 인간사회의 시스템에는 불가결한 요소니까. 그리고 그것은 절대 거짓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어. 전쟁이 무엇인지는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옛날이야기만으로는 불충분한 거야. 정말로 죽어가는 인간이 있고, 그게 보도되고, 그 비참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평화를 인식할 수 없어.”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은 전쟁과 폭력에 대한 단호한 거부와 반대의 입장을 표면에 드러내는 동시에, 내면에서는 폭력에 대한 묘한 노스탤지어를 심미화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그가 각본을 쓴 애니메이션 <인랑>에서 <스카이 크롤러>로 이어진다. 고요한 평화를 찢는 공중전의 실감나는 재현은 폭력에 대한 강한 선망의 무의식을 건드린다. <인랑>과 <스카이 크롤러>는 전쟁이 불가능한, 혹은 전쟁이 폐쇄된 곳에서 그것을 대체하는 전쟁 게임을 수행하는 폭력-기계로서의 인간을 주제화하고 있다.

키르도레는 본래 군수회사의 상품이었다. 유전자 제어제 개발 도중 키르도레라는 묘한 상품, 즉 어른이 되지 못하며 죽지도 않는 상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들이 다시금 환생해서 돌아오는 까닭은, 그가 지닌 파일럿으로서의 성능을 보유하려는 회사의 의도 때문이다. 키르도레는 테크놀로지 조작을 통해 태어났으며, 자율의지 없이 전쟁 게임 속으로 들어와서 영원히 반복되는 폭력을 대리한다. 이 영원한 데자뷰의 세계에서 주인공 칸나미는 겉으로 보기에는 어떠한 의혹도 없이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내면에 깊은 의지를 지니고 있어서, 생을 끝내달라는 쿠사나기의 요청에 “그래도 너는 살아라, 무언가를 바꿀 때까지”라고 말한다.

결국 칸나미는 전사하고, 영화의 쿠키 영상(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뒤 나오는 부가영상)은 새로 부대로 전속받은 파일럿의 도착을 보여준다. 상관인 쿠사나기는 새로 배속받은 히이가리 이사토(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에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이 기다림, 권태와 퇴폐의 무한 지속 속에서 어떠한 온기처럼 잃지 말아야 할 유일한 한 가지는 이 기대감뿐이다. 무한히 반복 생산되는 상품이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회의하며 숙명에 저항하기 위해 영원한 시간의 반복을 감내하는 주인공의 결의는, 마찬가지로 생산된 프로그램에 불과했지만 스스로를 ‘생명’이라 선언했던 <공각기동대>에서의 프로그램 2501, 일명 인형사와 유사한 각성을 보여준다.

불가능한 전쟁을 대체하는 폭력의 미학

<스카이 크롤러>에서 주인공 칸나미가 배속된 전투부대의 지휘관은 쿠사나기(<공각기동대>의 주인공의 이름과 같다)다. 더불어 <이노센스>에 등장하는 개(실제로 오시이 마모루가 키우던 개로 알려져 있는데)가 등장해서 그의 전작과 연결되는 서사적 회로를 구성하고 있다. <스카이 크롤러>의 쿠사나기는 <공각기동대>의 결말에서 소녀의 의체를 입은 형상과 거의 유사한 키르도레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한편 주인공 칸나미는 ‘진로우’라는 전임자를 대체하여 이 전투부대에 배속되었는데, ‘진로우’란 <인랑>의 인간늑대인 ‘인랑’(人郞)의 일본식 발음과 같다. 광대한 네트로 ‘융합’하여 다른 생명의 진화 단계로 넘어간 쿠사나기와 전쟁 기계인 인랑은 다시 이 폐쇄적이고 반복적인 전쟁 지옥으로 들어왔는데, 이들이 이 회로에서 빠져나올 도리는 없다.

폭력에 길든 인간늑대 ‘진로우’나 살인 무기인 키르도레를 만든 자들에게 테크놀로지란 조작 가능한 것, 즉 숙명과 별개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들, 즉 인랑이나 키르도레에게 테크놀로지란 어떠한 숙명 같은 것인데 이들은 자율적 의지로 숙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애니메이션들이 매혹적이며 의미심장한 어떤 주제와 미학을 건설하고 있다면, 그것은 전쟁과 폭력의 비인도성에 대한 고발이나 ‘그래도 넌 살아라’라는 젊은이에게 건네는 희망의 전언과는 다른 방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오시이 마모루 애니메이션의 매혹은 ‘숙명’의 부근에서 나른하고 우아하며 퇴폐적으로 전개되는 폭력의 심미화에 그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나는 칸나미가 죽기 전에 독백한 ‘항상 지나는 길이라도 경치가 똑같은 것은 아니야.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것일까?’라는 가능성의 대사를 희망이 아닌 절망의 메시지로 읽었다. 그것만으로는 안되며, 결코 숙명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죽여줄까, 아니면 죽여줄래?’라는 쿠사나기의 도발에서 어떤 가능성을 감지하게 되는데, 그녀가 보여주는 그 애달픈 비관, 폭력의 긍정이면서도 부정인 미묘한 정치성이야말로 오시이 마모루 애니메이션이 보유한 심미성의 근거로 보이기 때문이다.

송효정 영화평론가. 대학원에서 식민지 도시문화를 연구한다. 영화와 문학에 대해 글을 쓰고 강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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