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영화제 즈음부터 지금까지, 굳이 의도한 건 아닌데도 한국영화 제작자들을 꽤 여럿 만났다. 그중에는 1990년대 중반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주역도 있고 금융자본을 영화계로 끌어들인 이도 있으며 대기업 시스템에서 영화를 만들어온 분도 있다. 대화 초반 화제는 몇 가지로 수렴된다. 첫째, 자본이 없다는 것. 영화자본이 여전히 CJ를 비롯한 몇몇 대기업에 집중되다 보니 운신의 폭이 작다는 얘기다. 너무 지긋지긋하게 들어온 얘기인데다 별 대안도 없는 사안이라 이런 대화가 등장할 때면 어떻게 화제를 돌릴지 고민하느라 머리에서 드르륵 소리가 날 정도다. 둘째는 적은 예산으로 영화 만들기의 고단함이다. ‘순제작비 30억원이면 블록버스터’라는 말이 공공연한 진리로 자리잡을 정도로 빡빡해진 투자환경 속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겪는 어려움 말이다. 이 역시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여준 뒤 빨리 다음 화제로 넘어가야 하는 피곤한 주제다. 셋째는 영화진흥위원회의 무책임함에 대한 성토다. 특히 조희문 위원장 취임 이후 각종 지원이 표류하고 있으며 근거없는 ‘좌파 분리 정책’ 때문에 다양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 사안 또한 <씨네21>이 매주 기사로 다루고 있을 정도로 그리 신선하지 않은 이야기라 육두문자를 섞어 맞장구를 친 뒤 황급히 새로운 화제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장애물’들을 뛰어넘다보면 대화가 바로 끊어질 것 같지만 꼭 그렇진 않다. 푸념조의 화제가 지나고 나면 그들은 자신도 많이 변했다고 말한다. 그 변화란 대개 이런 것들이다. 예전에는 거품에 젖어 양주 마시고 그랬는데 이젠 막걸리와 소주만 먹는다, 상황이 어렵다고 기다리기만 하면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아서 어떻게든 돌파하려고 한다, 이번이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힘을 다한다 등등.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의 얼굴은 예전보다 늙고 지쳐 보이지만, 눈빛만큼은 반짝인다. 충무로 거품 시대에는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절박한 광채와 함께.
어쩌면 변화는 이미 시작됐는지 모른다. 취재기자들에 따르면 <심야의 FM>과 <부당거래>를 비롯해 <초능력자> <페스티발> <이층의 악당> 등 개봉했거나 곧 개봉할 한국영화들은 빡빡한 한계 안에서 만들어졌지만 나름의 확고한 장점을 갖고 있다. 제작비에 비해 알맹이 없는 영화들이 양산되던 3∼4년 전과 비교하면 한국영화의 체력이 어느 정도 강해진 게 확실하다. 이 또한 제작자를 비롯한 영화인들의 변화를 향한 의지 덕분일 것이다. 물론 스탭들에게 터무니없는 임금을 강요하는 우격다짐 제작방식은 머지않아 한계에 부닥칠 게 틀림없다. 이렇게 호전된 상황에 맞춰 자본을 투여하고 시스템을 정비하고 정책적 지원을 해줘야 한국영화의 새로운 도약도 가능할 것이다. 제작자와의 술자리 말미에 앞서 언급한 식상한 세 가지 주제가 다시 튀어나왔던 것도 다 그 때문이리라.